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품절


*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인간이 가끔 두려움 때문에 또 가끔 자신의 이익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가끔씩은 거짓말이 진실을 방어할 유일한 수단임을 적시에 깨닫는 바람에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61쪽

테러 사흘 뒤인 이른 아침,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굳은 얼굴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기를 들었다. 모두 왼팔에 하얀 완장을 둘렀다. 장례 예절에 밝은 사람들이 흰색은 애도의 상징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175쪽

열한 시가 되자 광장은 이미 가득 찼다. 그러나 군중의 커다란 숨소리, 공기가 허파를 들락거리며 내는 둔한 속삭임만 들릴 뿐이었다. 공기는 들락거리며 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피에 산소를 먹이고 있었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갑자기, 이 말은 끝을 맺지 않겠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생존자들에게 그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175쪽

시위대는 대통령궁으로 간다던데요. 조직한 사람들한테 물어보시오. 그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누굽니까. 모두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니기도 하고 그런 것 같소. 틀림없이 지도자가 있겠지요. 이런 운동은 저절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발적인 세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런 규모의 대중 행동인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그랬지, 맞소, 그러니까 백지투표 운동이 자발적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그런 추론을 하다니 언어도단이로군. 이 일과 관련하여 지금 말씀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가 늘 오기 마련이지, (중략) 놀라운 건 아무런 외침도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만세 소리 하나, 타도하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구호 하나 없습니다, 그냥 등뼈까지 떨리게 만드는 이 위협적인 전율뿐입니다. -183-184쪽

이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그들은 말했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대통령 인형이라도 태우고, 창문 좀 몇 개 깨고, 낡은 혁명가도 부르고, 자신들이 방금 묻어버린 사람들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도착해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잉는 낯선 사람에게서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 -184-185쪽

인간 본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여서 이들 사이에서도 이기적인 환상, 거짓된 방심, 헤픈 감상을 향한 변덕스러운 호소, 기만적으로 유혹적인 조작 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지만, 감탄할 만한 이타심의 사례도 있었다. 우리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훌륭한 포기를 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우리도 창조라는 불멸의 기획에서 우리의 작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유지하게 해주는 그런 사례들 말이다. -186-187쪽

진실을 말하면 안 된다는 것뿐 아니라, 필요하면 진실이 하나하나 거짓과 일치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사물의 틀린 면과 옳은 면이 늘 아주 자연스럽게 함께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258쪽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배운 바로는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것 앞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고, 외려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이용해서 양심을 무디게 하고 이성을 파괴하오.
-377쪽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 평생 지킬 협정에 서명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자문할 날이 온다, 누가 여기에 나 대신 서명을 했는가. -377쪽

검은 색과 빨간색으로 된 표제만 보더라도 각각의 신문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우리도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조국의 적들의 또 한 번의 전복 행위, 누가 복사기를 돌렸는가, 허위 정보의 위험, 누가 그 복사 값을 냈는가.-419쪽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가 인용한 주제 사라마구의 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예의를 약간 걷어내고 말을 하자면, 이런 남자와 이런 여자들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거울 앞에 서서 매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라는 가래로 과거의 자기 모습이라는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 -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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