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구판절판


오후 네 시였다. 그러나 사실 시계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시계는 일부터 십이까지 움직일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170쪽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0쪽

사람들이 흔히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 사랑도 그 나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217쪽

남자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패배했다. 여자들의 분노는 정당했다. 여자들은 각자의 교양, 사회적 배경, 개인적 기질에 따라 남자들을 신둥부러진 놈, 기둥서방, 기생충, 흡혈귀, 착취자, 뚜쟁이 등으로 불러댔다. 어떤 여자들은 그동안 순전히 관용과 동정심 때문에 불행에 처한 동반자들의 성적인 제의를 수락해 왔는데, 이제 그 일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이제 여자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으려 하는 이 배은망덕한 행동을 보라는 것이었다. -235쪽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말싸움에서 재치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그 뒤에 불가피하게 따르게 되는 패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병실들에서 벌어진 논쟁도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이성과 비이성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 아닌가. -237쪽

여자들은 귀가 멀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채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앞에 있는 여자의 손을 놓치지 않을 만큼의 의지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올 때와는 달리 어깨가 아닌 손을 서로 잡았다. 누가 왜 돌아갈 때는 손을 잡고 가느냐고 물어도, 여자들 가운데 누구도 대답을 못했을 것이다. -255쪽

눈 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305쪽

도시의 미로에서는 기억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란 어떤 장소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뿐이지, 우리가 그 장소에 이르는 길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05쪽

그들은 자기가 돌이 된 꿈을 꾸고 있었다. 돌이 얼마나 깊은 잠을 자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다. 시골에 나가 산책만 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돌들은 땅을 반쯤 묻힌 채 누워 잠을 자면서 깰 때를 기다리고 있다. 돌이 깨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누가 알겠냐만. 그러나 먹을 것이라는 말은, 특히 굶주림이 심할 때는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언어를 모르는, 눈물을 핥아주는 개도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본능적인 행동을 하다가 개는 젖은 개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힘차게 흔들어 사방으로 물을 튀기는 행동이다. 개들에게는 그것이 쉬운 일이다. 그들은 외투를 입듯이 털가죽을 입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가장 효험 좋은 성수(聖水)가 개의 몸에서 튀자, 돌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빨라졌다. -331-332쪽

딱딱한 빵 한 조각의 냄새는, 숭고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삶 자체의 본질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332쪽

사모님은 우리의 복수를 하려고 죽인 거예요. 여자의 복수는 여자만이 해줄 수 있어요, 복수도 정의롭기만 하면 인간적인 거예요, 부정한 방법으로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 피해자가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어요. -359쪽

자연스러운 지도자지, 장님의 나라에서는 눈을 가진 사람이 왕이니까.-360쪽

눈물을 핥아주는 개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식과 자신이 보호하던 인간이 떠난다는 깨달음 사이에서 아주 짧은 순간 망설이더니, 즉시 부드러운 땅을 발로 긁기 시작했다. -363쪽

그녀의 멀어버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367쪽

우리는 모든 모욕의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387쪽

우리는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방식은 다를지라도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도 그곳에서는 그런 타락이 다른 사람들 탓이라고 핑계댈 수 있었어요, 지금은 그게 안 돼요,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387-388쪽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 사실 신경은 많은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견딘다. 갑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의 신경은 강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이런 단순한 문법적 범주들 때문에, 단순한 부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두 여자, 부정(不定)대명사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 그들 역시 울고 있다. 그들은 온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여자를 끌어안는다. 쏟아지는 비 아래 미의 세 여신이다. -395-396쪽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419쪽

사물의 질서가 뒤집혀 있어요,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어요. -428쪽

그러나 지금은 말의 음악밖에 없다. 이런 말의 음악이란, 특히 책 속에 나오는 말의 음악이란 두드러지지 않다. 그래서 설사 이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호기심에 이들의 문간에 귀를 대어보았다 해도, 한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긴 실 같은 소리밖에 못 들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책이란, 그것을 다 합쳤을 때는, 사람들이 우주를 두고 하는 말처럼, 무한한 것이다.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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