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 위기의 시대를 돌파해온 한국인의 역동적 생활철학
탁석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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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계를 고찰하는 방식에 있어서 은밀하고 급작스러우며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어떤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강준만, <한국 생활문화 사전>)-28쪽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는가에 대해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 이주민의 성공적인 근대화 사례가 논쟁의 진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즉 일본과 관계없이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면, 일본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를 도왔다든가 혹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 근대화의 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대중이 일본을 이용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국인은 존재하였고, 일본의 지배조차 이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한국인은 대중을 말한다. -32쪽

실용주의란 어느 시기에는 천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대의 가장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것이 가장 유용한가를 찾아내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36쪽

한국은 종교, 이데올로기, 전통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실용주의를 택하게 되었고, 실용주의는 그 시대에 필요한 것들 중 최우선하는 것을 택하는 특성이 있다. 민주주의도 곁에 있었으나 생활에 밀려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생활을 어느정도 해결한 뒤에는 민주화를 택했다. -39-40쪽

(불교가)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답을 하지 않는 것은 현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는 뜻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라면, 지금 눈으로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믿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59쪽

한국의 불교는 전래 당시부터 이미 말법시대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즉 깨달음의 종교에서 이미 믿음의 종교로 바뀐 것이다. 이 점은 미륵반가유상으로 대표되는 불교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륵은 미래불로서 현재 고통의 구제를 주임무로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수행을 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저 세계마저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세상을 구제해줄 미래불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는 종교로 바뀐 것이다. 문제는 해탈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현세주의의 모습이다. -59-60쪽

한국에서 기독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거쳐 하느님이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즉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거쳐 부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기독교 역시 스스로를 수양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보다는 예수를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에수를 통하거나 성당을 통하거나 중개자를 통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타력구제 신앙인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불교와 기본적 구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믿는 대상이 부처에서 하느님으로, 아미타불에서 예수로 바뀌는 것뿐이다. -62-63쪽

인생주의는 이 모두가 아닌 인생 자체를 중시한다.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만든 제도나 작품이 아닌 인생을 중시하는 것이다.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는 결코 인간중심 사회가 될 수 없고, 인간중심이 아니라면 인생주의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라고 해서 인생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제도나 인간이 만든 작품에 삶 자체보다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는 자연이나 인간의 제도나 작품이 아닌 인생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주의다. -78쪽

휴머니즘이 신보다 사람이 중심이라는 뜻이라면, 인생주의는 사회적 제도나 법보다는 사람이 더 소중하며 사회적 성취나 성공보다는 삶의 쾌락이 더 귀중하다는 뜻이다. -82-83쪽

일본은 세상을 긍정으로 가득한 것으로 파악하는 성향이 있는데, 이는 엄밀성과 함께 긴장감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정신적 긴장의 지속이라는 댓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인생은 원래 허무한 것이라는 믿음이 상존하기 때문에 정신적 긴장감은 훨씬 덜하다. 한잔 먹고 풀고, 한바탕 싸우고 풀고 하는 식이다. 즉 회복력이 빠른 편이다. -109쪽

"프래그머티즘은 '실용주의'로 번역되지만, 사실 그 사상은 우리말의 '실용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뉘앙스보다 훨씬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이란 단순히 '실용성이 최고'라는 발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용성뿐만 아니라 실천주의, 결과주의, 실험주의, 개방성, 진취성, 창의성 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성격과 특징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프래그머티즘은 단지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들의 타개를 위한 단순한 방책이나 기술이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 및 방법론 등도 아울러 함축하고 있는 하나의 사조이다."(<프래그머티즘>, 김동식)-131-132쪽

진리나 정의도 좋음 앞에서는 순위가 밀리는 상황이므로 서양처럼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싸우는 일은 한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진리나 정의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이 앞서기 때문에 인생의 즐거움에 좋은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139쪽

창조적 실용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무슨 개념인지 알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사이비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말만 실용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무엇이 실용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효율이나 경제성이 높은 것을 실용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천박한 실용주의로 불러도 되겠다. -149쪽

실용주의는 이 세상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어떤 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은 감각적 즐거움이 인생주의의 내용을 채우고 있지만 상황이 변한다면 사색의 즐거움이 이를 대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인생주의는 유지되겠지만 그 내용은 변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구의 뛰어난 효능 때문에 의도나 내용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현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 좋은 것이 무엇이냐를 판단할 때 이 세상이 아니라 죽음 후의 세상을 진정한 세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결론을 내리면 현세주의가 사라질 수도 있다. 물론 허무주의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허무주의가 현세주의와 인생주의의 보험 역할을 하고 있지만 현세주의가 무너지면 허무주의도 쇠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59쪽

인생주의가 추구하는 감각적 즐거움은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이성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쳤다. 누가 주도적으로 퍼뜨린 것은 아니지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즐거운 인생을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전파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중략) 다시 말해서, 사람들 속에서 자발적으로 자라나서 오랜 시간 검증을 받았다는 것이다. 학교가 아닌 집에서, 시장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인생주의는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정착한 것이다. 저잣거리에서 생겨나 자랐기에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나선 것도 아니고 고매한 학자들이 주창한 것도 아니며 외국에서 수입되어 일시적으로 유통된 것도 아니기에 그 생명력은 강하다. -173쪽

우리는 문화재와 문화를 혼동한다. 눈부신 문화재를 가진 국가가 훌륭한 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중략) 문화는 삶의 총체적 방식이고 물리적 대상들은 인간 마음속에서 개념들로 표상될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문화재는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활동의 소산’이라고 정의되어 있는데, 보통은 현재의 것을 제외한 옛날 것에서 지정된다. 즉 문화재라는 것 자체가 정의상 현재의 삶의 방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설사 포함되어 있다하더라도 문화재는 삶의 총체적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첨성대는 문화재이지만 첨성대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문화이다. -238-239쪽

동일한 것이 문화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문화가 단절을 통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문화가 연속적으로 단절 없이 계승되고 전달된다면, 다시 말해서 삶의 총체적 방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동일한 물리적 대상은 동일한 의미를 확보할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단절을 통해 진화한다. 따라서 동일한 대상이 상이한 문화 속에서 상이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문화재를 연결함으로써 문화를 구성하는 시도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39-240쪽

문화가 낱낱의 대상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한국 문화를 논할 때 흔히 등장하는 원전중심주의도 비판되어야 한다. 즉 문화현상을 중요시하지 않고 원전을 가장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 원전이 아니라 원전을 둘러싸고 어떤 현상이 있는가가 삶의 방식 그리고 당대의 문화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원전 콤플렉스라고 부를 수 있는데,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했느냐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곤 한다. 그런데 문화는 심지어 오역에서도 비롯된다. 즉 오역을 했는데 오역이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문화에는 정오표가 없다. 그때그때의 현상이 바로 문화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는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으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240-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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