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구판절판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형편없는 ‘성장’ 기록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성장의 가속화 - 필요하다면 불평등의 증대와 약간의 빈곤 증대라는 대가를 치르고라도 - 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내건 목표였다. 우리는 부를 더 많이 나누어 가지려면 그 전에 먼저 ‘더 많은 부’를 창출해야 하며, 신자유주의야말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들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결과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불평등은 증대한 반면, 성장은 사실상 크게 둔화되었다. -53쪽

그러나 부자 나라들이 가진 막강한 영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영향력을 발휘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들고자 하는 부자 나라들의 의도이다. 예컨대 선진국들은 특정한 정책의 채택을 대외 원조의 조건으로 삼는다거나,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채택과 같은) ‘착한 행동’에 대한 대가로 특혜적인 무역 협정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가난한 나라들이 특정한 정책을 채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발도상국들의 정책 형성에 있어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내가 ‘사악한 삼총사’라고 부르는 다자적 기구들, 즉 IMF, 세계은행, WTO이다. 이들 사악한 삼총사는 부자 나라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은 아니지만, 주로 부자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고, 부자 나라들이 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58쪽

IMF와 세계은행은 상당히 제한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범하였다. 그렇지만 이 기구들은 자기들로부터 돈을 빌려가는 나라들은 경제 운용에 실패한 나라들이고, 그런 만큼 그것이 경제적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면 자신들의 본래 임무를 넘어서는 새로운 영역이라 하더라도 마땅히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59쪽

리카도의 이론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 이론은 좁은 테두리 안에서는 그렇다. 리카도의 이론은 정확히 말해 각 나라들이 ‘자신의 현재 기술 수준을 그대로 감수하는 한에서는’ 자신이 비교적 잘 하는 것들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반박할 수가 없다.
그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 것은 어떤 나라가 보다 고도의 기술을 획득해 대부분의 다른 나라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들을 하고자 할 때, 즉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할 때이다. 새로운 기술을 흡수하려면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때 기술적으로 뒤처진 생산자들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동안 국제적인 경쟁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희생이 따른다. 보다 우수하고 보다 저렴한 상품을 수입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선진적인 산업을 발전시키길 원한다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감수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80쪽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 나라들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권장하면서, 자신들이 모두 완전한 무역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보고, 성공한 어른들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여섯 살 먹은 그 아이를 일터로 보내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성공한 어른들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립을 한 것이지,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119쪽

자유 무역은 단적으로 말해 개발도상국들이 생산성 증대 효과가 낮고, 따라서 생활수준 향상 효과도 낮은 부문들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쉬운 정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 무역을 통해서 성공을 거두는 나라들은 거의 드물고, 성공한 나라들의 대부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유치산업 보호 정책을 사용해 온 나라들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경제 발전의 취약에서 비롯된 낮은 소득 때문에 자국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있어 구사할 수 있는 자유를 크게 제약 받는다. 따라서 ‘자유’ 무역 정책은 역설적으로 그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개발도상국들의 ‘자유’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120쪽

신자유주의자들은 옛날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존 경제 구조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정치 권력을 줌녀 소유권(그리고 기타의 경제적 권리들)의 분배의 측면에서 반드시 현재 상태를 ‘불합리하게’ 수정하는 결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만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선배들과는 달리 공개적으로 민주주의에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 일반에 대한 평판을 깎아내리는 방법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들에게서 결정권을 빼앗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런 방법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고도 민주적인 통제의 반경을 축소시키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그 결과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개발도상국에 대해서 (세무기구의 정치적 독립성 따위의) 부자 나라들 내에서라면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의 ‘반 민주주의적’ 행동을 밀어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271쪽

"사실이 바뀌면 나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존 메이나드 케인즈)-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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