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품절


(국제노동기구는) 노동자 10명 중 1명꼴로 업무에서 비롯된 우울증, 정서불안, 스트레스 내지 신경쇠약 등 각종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한국에서는 직장인의 70퍼센트가 스트레스성 정신신체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노동자의 50퍼센트가 직장에서 매우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최근 한 조사에서는 직장인의 3분의 2가 이직을 고려한 바 있다는 결과가 나올 정도로 직장생활이 삶의 스트레스를 높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이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느낌을 가짐에도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느낌을 ‘그냥 옆에 제쳐두고’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이다. 이것이 일중독의 심각성이다. -19-20쪽

"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집안일에 묻혀 바삐 지내는 것은 실제 그 일이 꼭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 스스로 바쁠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A.W.셰프)

"우리는 스스로 자기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속을 들여다보았다가,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A.W.셰프)-21쪽

‘팔꿈치사회’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마라톤경주와 차원이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마라톤에서는 설사 번번이 일등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존 자체가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닌데 비해, 자본주의 상품경쟁에서는 남보다 계속 뒤처지게 될 때 생존 자체가 큰 위협을 받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신자유주의시대에 와서는 생존경쟁이 범지구적 범위에서 치열해지기에 심지어 ‘거지를 동정하지 마라’는 제목의 책이 나오기도 한다. ‘팔꿈치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지에 대한 동정은커녕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냉혹해야만 하는 ‘경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6-37쪽

생존에 대한 두려움, 강자와의 동일시, 경쟁의 내면화가 초래하는 자기소외나 자기고립을 적극 넘어 ‘관계적 존재’로 다시 서려는 것이 소통이며, 문제상황의 정면 돌파를 위해 힘을 합쳐 해결의 주체로 ‘함께 ,당당히’ 나서는 것이 연대다. (중략)

"만약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왔다면 그냥 돌아가시오. 그러나 만약 당신의 문제와 우리의 문제가 뿌리가 같다고 보고 함께 해결하고자 한다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사파티스타 농민군 여성의 말) -47-48쪽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모든 기업들은 서로 일등을 하기 위해 사람과 자연의 생명력을 부단히 경쟁적으로 추출한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 일등을 하든 꼴찌를 하든 자본주의 시스템에 종속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등과 꼴찌의 차이가 있다면 사람과 자연으로부터 추출한 엑기스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누가 좀더 많이 가져 가고 누가 좀더 덜 갖고 가는가 하는 차이일 뿐이다. 심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파산하고 소멸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서로 살벌하게 경쟁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전략이라 믿고 따르는 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자로 행위하고 또 그러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배적 시스템에 ‘모두’ 지배당하게 되는 근본원리다. 결국 경쟁은 지배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쟁만이 살 길’이라며 사람과 자연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것, 그러면서도 소수의 기득권층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 세상이 얼마나 병들어 가는지 눈치 채지도 못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기업체제의 근원적 무책임성이 아니고 무엇인가. -79-80쪽

미국 주도의 군사력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제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에 대해 에마뉘엘 토드는 "문제의 근원은 미국이 강해서가 아니라 너무 약해서"라고 말한다. 즉 세계적 무력행사 뒤에는 세계에 대한 미국의 경제 의존이라는 취약함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미국의 무역적자는 1990년에 천억 달러였는데 2000년엔 4천 5백 억 달러, 2005년에 5천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대량소비 위주의 낭비적 생활 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를 시장화, 세계를 공장화한 결과가 대형적자로 나타나고 또다시 이를 모면하기 위해 더욱 강제적으로 시장자유화를 추진하려 하니,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파국과 제국의 몰락을 자초하는 것이다. -140-141쪽

일리치 선생에 따르면 평화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하나는 가진 자, 위로부터의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기층민중, 아래로부터의 정의다. 전자는 ‘평화의 유지’를 강조한다. 즉 온 세상이 자기들 뜻대로 굴러가는 것, 아무도 기존질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잘 따르는 상태, 바로 이것이 위로부터의 평화 개념이다. 후자는 ‘평화로이 내버려두어져 있기’를 평화로 보는 것이다. 즉, 세상 살림살이를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대로 제발 그냥 놔두라는 것이다. 풀뿌리 민중에 의한 삶의 자율성, 바로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평화다. -154-155쪽

"나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온전한 인간이 된다." (일리치)-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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