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엔 의외로(?) 보수주의자들이 많다. 아니 본인의 정치성이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굳이 구분하지 않지만, 선거날만 되면 보수 - 엄밀히 표를 받는 이는 보수가 아니라 그냥 꼴통인 경우가 절반 이상 - 에 한 표를 던지는 이들이 많다. 내 아버지는 지금 촛불시위대의 정반대에 위치한 이들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에,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수십년 경찰에 몸담은 위인이다. 고엽제 어쩌고 하는 전우회에는 가입했는지는 모르겠다. 무식하지도 무대뽀도 아닌 분이지만, 선거날이면 언제나 박정희-전두환-이회창 라인을 달려오신 분이시다. 지금은 아버지 혼자 멀리 어디가서 살고 계신지라 전화한지도 만난지도 수년이 지나 이번 대선에서 누굴 찍었는지 모르지만, 둘 중 하나다. 이명박 아니면 이회창.
열여섯번째 촛불집회(내 기준)에 나와 함께 처음 나간 A는 대선 때 이회창을 찍었다. A의 정치성이 보수여서가 아니라, 마땅히 정치성이 없었고, 이명박은 아닌 것 같았고, 결정적으로 A의 아버지가 이회창 지지자였기에 A 역시 아버지를 따라 이회창을 찍었다. 그리고 이회창이 떨어졌고,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로부터 네 달이 지났고, A의 아버지는 A가 촛불집회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칭찬해줬다고 한다. A는 무서워서 그동안 못나갔지만 함께 처음 나가고는 밤을 새자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나를 당황케했다. 무섭지 않고 오히려 재밌었다고. 촛불집회를 오래전부터 지지해왔으나 무서워서 반, 귀찮아서 반, 못나가고 안나갔던 A는 나보고 또 나가자고 한다. -_-
직업상 만나는 B는 또 부모님이 이명박 지지자라 이명박을 찍었는데, 지금의 촛불집회를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 관심은 또 별로 없는 듯 하다. 그러니까 엄밀하게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벌어지는 구호들에는 동의하면서도, 누군가 알려주기 전에는 혼자서는 관심갖지 않는 유형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지만 딱히 목소리 높여 반대하지는 않는달까. 또 밴드에서 기타를 쳤던 C는 명백히 자신의 정치성을 보수라고 밝혔는데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거나 관심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주변인들에 비해 과도하리만큼 촛불집회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밤을 새기를 밥먹듯 했고, 군화발과 곤봉세례만 피했지 나머지는 다 당했다. 대선 때 이명박을 찍었는지 이회창을 찍었는지까지는 묻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성은 오래전부터 봐왔지만 보수가 확실하다.
나는 정치성이 상대적으로 희미하거나 없는 이들은 제외하고, C의 행동을 주목한다. 촛불집회가 한창일 때 친박연대 회원들까지 박근혜를 떠나 촛불집회에 참석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나오는지는 모르겠는데 몇주전 신문에서 본 바로는 친박연대는 현장에 나오지 않는다. 미국산 쇠고기를 반대하는 문제가 진보와 보수의 문제로 치환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다른 사안과 연계해 노동계나 진보쪽 인사들이 촛불집회 현장에 많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색깔론은 경계해야 한다. 지금 美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다만 주변인들을 통해 촛불집회에 대한 시각을 대략 가늠해보고 싶을 뿐이다.)
C가 대운하나 영어몰입교육, 공기업 민영화 등에 대해서까지도 반대하는지는 묻지 않았으나 나에게 하는 말로 추정해봤을 때, 그는 다른 모든 사안들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말로만 보수라 하고 실제로는 중도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위인인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그는 보수가 확실하다. 그런 C가 촛불집회에 누구보다 열정적이라는 것이 나는 살짝 신기하다. 사실 신기해 할 것 없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당연히 반대할 만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은게 친이명박계와 뉴라이트가 외치는 구호가 있고,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이 외치는 구호가 있는데, 아무래도 이 양자 대결하에서 보수인사면서 촛불집회에 열정적인게 분명 반갑지만,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기도 한데, 워낙 민감한 부분이라 조심스럽다. C는 나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내 촛불집회 현장에 내가 있는지를 체크하고, 현장에 있다면 얼굴 한번 보자고 말한다. 나는 그의 열정이 신기하면서도 다시 한번 반갑다. 어쩌면 그를 두고 신기해하는 내가 저들의 색깔론에 휘말려버린 비정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현 사안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모두가 분노할 만한 내용이지만, 현실적으로 보수들은 애써 모른 척 하거나 관심을 끊거나 촛불집회를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신기하다. 그들이 비정상이고 C가 정상인게지.
그게 맞다. 진짜 보수라면 美 사대주의에 분노하고, 자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이따위 굴욕협상의 주인공에게 분노하는게 맞다. 나와 같은 시민이 경찰의 곤봉과 군화발에 짓이겨지는 상황을 보고 분노하는 게, 뭐 이따위 경찰이 다 있어 라며 분노하는 게, 진짜 보수의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땅의 보수라 표방하는 이들은 어찌된일인지 상식을 뒤엎는 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으니 이 아이가 이상하게 보일밖에. 부디 C가 몸 상하지않고 끝까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을 보전해 지켜낼(保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