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상식 - 좌파 자유주의자 변정수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2
변정수 지음 / 모티브북 / 2005년 3월
절판


물론 '자치'는 그 본래적 의미에서부터 '국민'이라는 이념적 절대 권력이 현실적으로 결코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수는 없다는 전제를 함의하고 있다. 요컨대 '국민' 자신으로부터 또는 좀더 정확히 말하면 '국민' 상호 간에 통제되거나 견제될 수밖에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민'이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가진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가 현실에서 의미를 가질 때에만 실현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이유로 마치 '국민'이 단일한 정치적 의사를 가진 통합적 주체이기라도 한 양 들먹여지는 '국민의 총의'따위는 존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존재해서도 안 된다. 또는 만일 혹시라도 그러한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도 틀림없이 누군가에 의해 적절한 절차에 따라 견제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권력'일 수 없는 것이다. 이 자명한 이치를 무시하는 것은 '주권재민'이라는 원리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며 심지어 도발적인 모욕이다.-18-19쪽

그러니 지금 이 시대에 정작 '민주주의'를 위협하며 '헌정 질서'를 유린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헌법재판소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기능을 부인하며 '국민'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쿠데타적 발상'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며, 심지어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 반대'의 슬로건을 전유함으로써 대통령의 탄핵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1/5 가량의 '국민'들을 졸지에 '비국민'으로 내모는 것이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물며 다양한 정치적 의사의 표현은커녕 그 존재마저도 말살하려는 제도적 장치의 핵심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국민'들이 어떻게 감히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절대 주권자'를 자임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강조하거니와 국민이 절대적 주권의 담지자일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그 '국민'이 다양한 정치적 의사를 가진 주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사이에 상호 견제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19쪽

내가 느끼기에 '정규직'이라는 것, 특정한 기업에 정규적으로 고용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다. 따라서 설령 (대개는 화이트칼라에 속하는 업종에서) 어느 '계약직'노동자가 실제로 같은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 노동자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거나, 또는 성과에 따라서는 더 좋은 조건으로 '재계약'을 맺을 수도 있다고 해도, '비정규직 차별'의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그것은 차라리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못한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근거한 사회적 '차별'의 측면이 더 강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오해 없기를 바라지만)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조차조 그러한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33-34쪽

다만 그 이유(대기업 선호)를 조금이라도 제거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직업에 떳떳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보장되는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신분'을 이유로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거나(가장 극명한 예르 들자면 결혼 시장 따위) 제도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또는 그런 차별에 직면한 개인에게 적절한 사회적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국가가 보장한다면 도대체 누가 '무한경쟁'에 자신의 삶을 매몰시키는 어리석은 길로 뛰어들겠는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정규직 채용'을 기피하고 '비정규직' 채용을 확대하려는 개별 기업의 '악덕'을 성토하고, 그것을 법제도적으로 규제하려는 노력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차별'은 어쩌면, 생목숨을 자살로 몰아간 저 극악한 기업들 이전에, 사회 보장으로 해결해야 할 영역을 개별 기업에 떠넘겨 노사가 투쟁하고 협상해야 할 문제로 교묘하게 은폐해 버린 국가가, 그리고 '정규직'을 일종의 '신분'으로 간주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저지르고 있는 죄악인지도 모른다.-34-35쪽

국가보안법은 국민이 자발적 의사에 따라 정치 결사에 가담하는 것을 가로막고 처벌하는 법이며, 자신이 가진 특정한 그 정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이며, 특정한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 의사를 언론이나 집회를 통해 밝히는 것을 가로막는 법이다. 이것은 법을 빙자한 폭력이다. (중략)

국가의 안보가 위협을 받는 상황이란 가령 이런 것이다. 무장 세력이 군사적인 공격을 가해 오거나, 경제적 이해 집단이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박탈하려는 압력을 가해 오거나, 강제로 오래된 생활 습관이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의 내용을 바꾸도록 강박을 가해 온다거나 할 때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군사적 공격을 막아 주는가 아니면 경제적 압력을 막아 주는가. 하물며 국가보안법이 지켜 준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내용을 핵심적으로 구성하는 양심의 자유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한 위협을 막아 주기는커녕 앞장서서 위협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것이 '국보법 사수'를 외치는 자들의 적나라한 고백이 아닌가. -60-61쪽

사실 관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막연한 인상만으로 욕설을 퍼부어대는 '무책임'을 '비판'이라고 착각하곤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일부 네티즌'들의 예외적인 일탈 행위가 아니지만, 그보다 더욱 확당한 일은 그러한 '비판'(?)이 애당초 결여하고 있는 사실 관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도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더욱 격렬한 비난이 되돌아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왈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비판도 못하냐."는 데는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이쯤 되면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하는 것이 과연 '의견'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따질 계제조차도 아니다. 아예 그런 '무책임'이 표현의 자유를 가진 '네티즌'의 당연하 ㄴ권리라는 것이다. (중략) '책임'을 동반하지 않은 '비판'은 비판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무책임'을 당연한 권리로 전제한 '참여'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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