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찾는 아이 아이를 찾는 사회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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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때가 있다"면서 아이들이 휴학하거나 대학 가는 것을 미루는 일을 못 견뎌 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에 그때의 '때'란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을 때'가 아닐까? 국가 고시 시대에서 말하는 '머리가 굳기 전의 때'는 아닐 것이다. 졸업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시대는 지났고, 24세에 대학을 졸업해야 하는 때도 지났다. 사실은 평생을 배워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무기력의 시대, 불안과 혼돈의 21세기에 기성 세대가 가장 우려해야 할 것은 '시키는 대로 살고 싶어하는 수동적 인간' 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한 인간'을 양산하게 되는 일일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 시대에 맞는 '배움의 때'란 바로 '무엇인가 하고 싶은 때'이다. 그때를 놓쳐 버리면 아이들은 배움의 재미를 잃게 되고 평생 배움의 즐거움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릴지 모른다. 벌써 통찰력 있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네 꿈을 미루지 마"라며 조언을 주고 받는다. 이때 어른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것이다. -48-49쪽

이인규 교사의 글을 빌리면 학급 붕괴 양상의 원인은 상당히 분명해진다. 1. 교사와 학생 간의 세대차, 기존 학교 체제에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학생들의 감수성 등으로 사제간 의사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2.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유용성을 상실하여 교사들은 가르칠 맛을 잃고 학생들은 배울 의욕이 없다. 3. 여전히 학교에서 교사들이 해야 하는 일이 많지만 그것은 교육적 경험을 풍요롭게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4. 교사와 학생들은 학교에서 벗어나기만을 희망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60쪽

이 두 세대는 정보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판이하게 다르다. 정보와 지식이 과소했던 시대를 산 구세대들에게 책이 있고, 정보가 있는 학교는 ㄱ도 '생명줄'이었으며, 책은 사두기만 해도 뿌듯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정보 홍수 속에 사는 신세대에게 학교는 뒤처진 정보를 가르치는 후진 곳이다. 새로운 지식이면 무엇이든 게걸스럽게 먹으려 했던 구세대에 비해 신세대들은 정보 홍수에 휘말려 들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정보 앞에서 몸을 사리며 취사 선택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 고등 교육만 받으면 대우를 받고 취직이 보장되던 시대를 살았던 구세대가 공교육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갖는 데 비해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하지 않는 시대를 사는 신세대는 학교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86쪽

건강한 문화를 가진 사회란 개인이 구조로부터 소외당하지 않는 체제, 도구적 합리성이 일상성을 지배하지 않는 체제, 구성원들의 감수성과 상상력과 분석력이 현실을 바꾸어 가는 데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체제이다. 한국의 미래 교육은 당장 문화 산업 역군을 배출해야 하는 급박함을 안고 있으면서 동시에 심하게 식민화된 일상성을 회복해낼 문화적 주체들을 배출해야 한다. 갈수록 거대해지는 기술력과 자본력에 지배당하지 않고 그 힘을 관리해낼 수 있는 문화적 주체들을 길러 내야 한다는 것이다. -121쪽

이제 더 이상 학생을 배움의 시기에 있는 '어른 이전의 존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지금 어른이 살던 시절에는 배우는 나이가 정해져있었고, 교육 기회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기 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학교는 학생을 유인하기 위해 광고를 해야 하는 서비스 업종이 되었고,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한 평생 교육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른들이 직장인이면서 학생이듯이, 학생들 역시 학생이면서 소비자이며, 때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노동자이며, 자기 발언의 권리를 가진 문화적 주체로서 확실한 자기 위치를 갖는 것이다. -134쪽

"우리는 인류대 합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선배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절대 정숙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모의 수능 점수 향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학습의 지표로 삼는다. 적당한 학습지와 믿을 만한 과외로 사탐과 과탐을 외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어문계열 지망의 꿈을 계발하고 우리의 방학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밤샘의 힘과 침묵의 정신을 기른다. 자기 반의 이익을 앞세우며 위선과 이유 없는 반항을 묵인하고 불신과 비난이 어색하지 않는 사제 관계의 전통을 이어받아 공감대 없고 타성에 젖은 수업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내신과 수학 능력을 바탕으로 학교가 발전하며 학교의 융성이 곧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육성회비와 등록금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학교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배후로서의 학부모 정신을 드높인다. -149-150쪽

(이어서)

'반A고'(경쟁하는 학교 이름) 정신에 투철한 '愛석차 愛통계'가 우리의 삶의 길이며 대명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배에 물려줄 영광된 고합격률 대명의 앞날을 내다보며, 이기심과 욕심을 지닌 근면한 학생으로서, 전교생의 '죽어지낸 3년을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합격률을 창조하자. (3학년 7반 허은영. '대명'이라는 학교 이름은 가명)

(1996년 고3학생이 국민교육헌장을 풍자해 쓴 글) -150쪽

경제주의 사회에서 부모 자식 관계는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 왔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돈을 버느라 바빴던 부모들은 부모 노릇을 자녀의 학비를 대고 피아노를 사주고 생일 파티를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부모의 능력은 자녀가 원하는 것을 소비할 수 있게 자금을 대는 능력에 비례하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계속 부모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한다. 충분히 돈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적개심과 충분히 돈을 줄 수 있는 경우에는 존경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괴로워한다. 자녀들은 지금까지 "공부만 잘해 달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부모를 위해서 공부를 했는데, 지금 그 공부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속았다고 느끼고 있으며, 마음 깊이 원망과 적개심을 품고 있다. 청소년들은 지금 사회에게도, 학교에게도, 부모에게도 전혀 기대를 하고 있지 않다. 어떤 면에선 그 동안 지속된 경제 성장은 문제가 표현화되는 것을 돈으로 막아 왔다. 살고자 하는 동기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은 아이들은 돈 쓰는 재미로 나름대로 견뎠던 것이다. -156-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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