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복제 무엇이 문제인가 - 인간 복제의 윤리학
스티븐 제이 굴드 외 지음, 그레고리 E. 펜스 엮음, 박찬구 외 옮김 / 울력 / 2002년 2월
품절


우리가 인간 복제의 전망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은, 이러한 일의 생경함과 진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즉각적으로 아무런 논증 없이 알고 느끼는 것으로서, 우리가 정당하고 친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혐오감은, 지나친 인간의 작위에 대한 반감이며, 말할 수 없이 심오한 것들을 범하지 말라는 경고인 것이다. 사실상,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타고난 본성은 더 이상 존경받지 못하고 우리의 몸 또한 우리의 자율적, 이성적 의지의 단순한 도구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혐오감은 우리 인간성의 핵심을 보호하기 위해 외치도록 남겨진 유일한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전율을 잊어버린 영혼은 경박하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47쪽

무성 생식은 자기 보존 활동의 지속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유기체가 두 개로 자라거나 분화되기 시작하면 원래의 것은 (이중으로) 보존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 이에 비해 성은 소멸을 의미하며, 대체에 이바지한다. 하나를 낳기 위해 모인 둘은 곧 죽게 된다. 성적 욕망은 인간에게든 동물에게든 자기 보존적인 개체에게 부분적으로는 감추어져 있고 궁극적으로는 모순이 되는 목적을 위한 것이다. 인식하든 않든 간에 성행위를 하면서 우리는 성기를 우리 자신의 소멸을 위해 사용한다. 알을 낳고 죽기 위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는 보편적인 진리를 이야기해준다. 즉 성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생식에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55쪽

아이의 동의를 상정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에 관한 반대 의견은 복제 인간이 나중에 질문을 받을 때 결국 복제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낼 것이라는 명백하고도 충분한 점을 간과하기까지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익과 손해가 아니라 적절한 (비록 시간적으로 지난 것이라 하여도) 동의를 하는데 필요한 독립성, 즉 단지 선택할 자유만이 아니라 자유롭고 바르게 선택할 성향과 능력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복제 인간이 어느 정도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주체가 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복제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복제 인간을 복제된 자로 키우는 사실 자체에서 복제를 시행한 인간이 복제된 아이의 독립을 박탈한다. 이 독립은 그 아이가 한 인간의 인위적 기획에 의해 고안된 결과물이 아니라 세상에 나온 예상치 못한 놀라움, 하나의 산물이라는 사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57-58쪽

그러나 복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의 '부모'만이 있을 뿐이다. "편부모 가정의 아이"가 처한 일반적인 슬픈 상황이 이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를 가지고 계획된 것이다. 자기 복제의 경우 "후손"은 또한 자신의 쌍둥이다. 그래서 결국 근친상간의 무서운 결과가, 즉 자신의 형제의 부모가 되는 사태가 실제로 전혀 성교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모든 인척 관계 또한 복잡해진다. 아버지, 할아버지, 아줌마, 조카, 누이 등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아버지나 어머니의 한쪽 가계가 필연적으로 배제된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우리 사회에 이미 만연하고 있는 이혼, 재혼, 양자, 미혼모 등등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이로 인해 집단 혈통이 어지럽혀지고 친척 관계와 아이(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혼란스러워지고 있다는 사실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물론 누군가가 이런 현상이 어린아이에게 더 나은 상황을 마련해 준다고 주장하는 경우는 또 다른 문제이기는 하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1-62쪽

낳는 것(출산)은 만드는 것(제조)과 어떻게 다른가? 자연적인 생식에서 인간 존재는 우리와 같은 다른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상호 보완적인 남자와 여자로서 결합한다. 즉 살아가고, 그래서 소멸하고, 그래서 열정적으로 성애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복제를 통한 생식의 경우 그리고 이 복제에서 발전된 좀더 세련된 형태의 생식의 경우에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모든 물건들과 마찬가지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물건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이 주인이 된다. 제작자는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군림하는 자로서 자신의 의지와 창조적 솜씨로 인해 그 제품을 능가한다. 동물을 복제한 과학자는 자신의 도구 제작에 관여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동물은 처음부터 이성적인 인간의 목적에 수단으로 사용되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복제의 경우에는 과학자들과 장래의 "부모들"이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기술 관료적 심리 상태를 인간 아이에게도 적용한다. 인간의 아이들 역시 그들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2-63쪽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점일 것인데, 세포핵 이식을 통한 인간 복제의 관행 - 예상되는 모든 다른 미래 세대의 유전 공학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 은 아이를 가지는 일과 부모 자식 관계의 의미에 대해 심각하고도 해로운 오해를 야기하고 악화시킨다. 부부가 아이를 낳고자 결심하는 것은 새로운 신생아의 출현을 긍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단순히 아이를 가지는 것뿐 아니라 암묵적으로는 그 아이가 어떤 아이든지 받아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대체하는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암암리에 우리의 통제 영역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흔히 통하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즉 생식을 통해 미래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 생명과 인간 종의 불멸에 일정 부분 참여하는 행위를 통해 바로 우리의 통제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3-64쪽

복제의 옹호자들은 복제의 불법적인 사용과 구분되는 합법적인 사용이 있다고 믿고자 한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원칙 때문에 그러한 경계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그런 경계를 강제로 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복제 옹호자들이 이해한 생식의 자유는 (아이에게 육체적 손상을 가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한) 예비 부모들의 주관적 소원에 의해 좌우되는 그런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아이 없는 부부들이 감상적인 호소를 하는 경우와 유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 - 그들이 살았건 죽었건 간에 - 을 복제하고 싶어하는 (혼인여부와 무관한) 개인의 경우는 구분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이들이 내세우는 원칙들은 복제 뿐 아니라 사실상 "완전한" 아기를 창조(제조)하려는 미래의 모든 인위적인 시도들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학자 레온 카스, '혐오감의 지혜' 中)-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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