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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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발언 이후 참 많은 글들이 오가고 책이 나왔다. 영어공용화에 반대하는 글과  책은 많지만 지식인 논쟁에 불과하고, 대중들이 좀더 쉽게 알아들어먹을 만한, 전문적인 글에 익숙치 않은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나온 것이 시정곤, 정주리, 장영준, 박영준, 최경봉 다섯 사람이 쓰고 엮어낸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이라는 책이다.

  '티비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었던 바 있는 이 책은, 일종의 가상 르뽀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영어공용화 논쟁에 왜 시작이 되었고, 만약 시행된다면 어떻게 진행이 될 것인가 하는 과정과 미래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영어공용화가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과연 영어공용화란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기 어려운 이들에겐 찬반 논쟁에 관한 다른 책자들보다는 이 책 하나로 충분할 듯 하다.

  복거일은 그의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처음에 영어공용화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인터넷 투표를 했더니 우리 국민들 중 절반 이상이 이에 반대했지만, 몇년이 지나고 다시 한번 투표를 했더니 찬성 의견이 훨씬 많더라. 그런데 의문이 든다. 과연 이 투표에 참가한 사람들은 영어공용어화 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투표를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 중 하나가 영어공용어화의 의미이다. 잘못 이해하는 경우 영어공용어화를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 활용하자는 것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영어를 열심히 배우자 對 그러지 말자' 구도로 논쟁을 이해하는 이들이 있달까. 이는 분명 잘못되었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공서의 온갖 공문들, 그리고 초중고등, 대학교의 모든 교재들, 강의, 수업, 표지판 등등 지금 한국어가 쓰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영어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를 잘못 이해하고 투표를 한 이들도 있지 않을까, 또 많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이런 이들을 위해 영어공용어화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공용어화 실시 이후의 삶의 세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몸으로 간접 체험토록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저자들이 밝히고 있듯 그들의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주관이 개입하는 것은 고려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영어공용어화 반대의 입장에서 쓰여진 가상 르뽀라는 것.

  "필자들은 영어 공용화를 실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영어 공용화가 좋으냐 나쁘냐 라는 가치 판단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대신 영어 공용화가 실시되고 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중략... 그래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필자의 관점이 상당 부분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선에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 

  영어공용어화가 이 땅에 선언된 이후의 모습들을 곳곳에서 발견한다. 먼저 티비와 신문 등 언론을 통해 공용어화가 선언되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재미교포들이 한국으로 대거 들어와 한국의 교단과 정계, 기업계를 주름잡고, 국어시간은 영어시간으로 변한다. 영어로 이름을 짓고,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시위를 하며 한국어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한다. 지폐에 새겨진 세종대왕은 이제 사라지고 달러가 들어와 조지 워싱턴이 한국을 지배한다.

  한국어를 살리자며 만든 한국어 학교가 폐교 위기에 처하고, 아이는 영어로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부모는 아이와 언어갈등이 생긴다. 노인들은 말을 아예 하지 못해 집안에서 속앓이를 하고, 어떤 이는 자살한다. 헬로윈 데이가 우리나라 공식휴일로 지정되고, 영어를 하는 것에서 이제는 고급영어를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을까의 고민으로 옮겨간다. 혀 수술을 하고, 미국 북동부에 유학을 보내 앵글로색슨의 정통 영어를 배우도록 한다. 천박한 흑인영어나 동남아 계열의 영어, 콩글리쉬는 먹히지 않는다. 어떤 발음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운명이 결정된다. 사람들은 이제 미국인과 결혼하기를 원하고,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된 순위는 한국인이 꼴지에서 두번째. 꼴지는 동남아.

  영어공용화 백년 이후 이제는 미국이 쇠퇴하고 중국이 급부상했다. 사람들은 중국어 조기교육을 실시하고 중국어 학교에 보내 어릴때부터 익숙한 환경에 내몬다. 일부 학자들은 이제 중국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을 하고 많은 이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그러나 안다. 얼마 안있어 곧 영어, 한국어 뿐 아니라 중국어가 공용어로 지정될 터이고, 한국어는 이미 사라졌고, 영어는 쇠퇴할 것이며, 중국어가 뜰 것이란 사실을.

  이 책은 매우 꼼꼼하고 자세하게 영어공용화 이후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대강대강의 스케치만 한 것이 아니라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 해 색칠하고 골목골목의 명암까지 세세하게  신경썼다. 아마도 이 책에서 다룬 모습들 말고도 현실에서 우리가 체험하게 되는 사건들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나 이 정도로 충분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우리가 아직 체험하지 못한 영어공용어화 선언 이후의 현실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서문에서 저자들이 말했듯 이 글은 원칙상 반대의 입장에서 그려진 가상 르뽀이나 무시할 수 없는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다섯명이 모여 꽤나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토론을 반복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강력하게 든다.

  또한 이 책은 친절하고 자세한 각주와 일본에 지배당했을 시기의 신문자료들, 문서 등을 보여주고,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영어교육에 대한 기사들, 사진들을 실어 논의가 딱딱해지지 않도록 편집에까지 신경을 썼다. 풍부한 자료와 각주, 그리고 뒷부록에 실린 영어공용어화 논쟁 당시의 지식인들의 글을 차례대로 실어줌으로써 이 한 권으로 충분하게끔 만들었다. 여기에 소개된 수많은 참고문헌들은 이 논쟁에 관해 더 알고프고, 공부하고픈 이들을 위해 충분한 자료가 될 듯 하다. 그중 경상대 인문학연구소가 엮은 <세계화 시대의 국제어>, 김영명의 <나는 고발한다>,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왜 영어가 세계어인가>, 최은경의 <세계 영어들의 정체성 - 그 신화와 실제>, 후나바시 요이치의 <나는 왜 영어공용어론을 주장하는가> 등은 추가로 보고픈 책들이다.

 

  * 영어공용어화 논쟁과 관련하여 많은 책이 나와있지만 먼저 읽어보면 좋을만한 책들을 소개한다.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조동일의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
 한학성의 <영어공용어화, 과연 가능한가>
 시정곤 외 5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김영명 <나는 고발한다>
 고종석 <감염된 언어>

 이 정도만 보더라도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관해선 충분히 생각하고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에 대한 반론이 없고, 언급이 안된 것은 좀 의아하지만, 
 고종석의 <감염된 언어> 안에 수록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는 반드시 읽어봐야 한다. 
 복거일은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책에서 자주 그의 제자를 자청하는 고종석의 글을 인용하고 있으며,
 고종석의 논변은 복거일의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영어공용화를 옹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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