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3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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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관심갖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인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논쟁은 대한민국 사상지도에서는 자유주의자로 분류되는, 복거일이라는 소설가의 신문 칼럼을 통해 촉발되었다. 98년이었던가. 복거일은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라는 책을 통해 그간의 논쟁에서의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2003년에 삼성경제연구소 문고판으로 나온 작은 책자로서 굳이 왜 복거일이 다시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책으로 내야했는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지만 - 복거일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리고 있지 않다 -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신문에서의 논쟁에 대한 결과물로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냈듯, 이 책 이후의 다른 영어공용어화 반대에 관한 많은 책들이 나오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하고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연히 이 글은 '이미 설득된 사람들을  설득하는' 셈이다. 반어적으로, 이미 설득된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은 보기보다는 훨씬 중요하다. 오랫동안 소수 의견들을 내놓는 사람들은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안다. 그 동안 '영어 공용' 논쟁과 관련하여 격려해준 분들께 고마움의 말씀을 드린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은 이제는 사그라들었다. 한참 논쟁에 불씨를 당겼을 때에는 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혹은 대학 1학년이었을  그 때의 나는, 사회문제에 크게 관심을 쏟는 위인이 아니었다. 수능의 좌절과 대학에 왜 가야하는가의 고민, 그리고 맘에 들지 않는 대학 생활로 공부에 소홀했고, 오로지 나를 숨쉬게 하는 것은 밴드 생활뿐이었다. 그러니 자연 거기에 푹 빠져지냈다. 아주 오랫동안.

  뒤늦게 불씨가 다 죽고 난뒤에야 이렇게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간 몇권의 관련된 책들을 사모았다. 아직 읽어야 할 책이 까마득하지만, 또 먼저 논쟁의 순서상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를 봤어야했지만, 이 책도 그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하고, 이것을 시작으로 영어 공용어화 논쟁에 대해 생각해본다.

  영어공용어화 논쟁에 있어서 만큼은 복거일은 소수자다. 복거일과 그의 제자를 자청하는 뛰어난 우리말 실력을 자랑하는 고종석이 이쪽에 있을 뿐이다. 복거일이 영어공용어화를 찬성하는 논리는 한 마디로 '망' 이론이다. 캐럴 이스트먼의 언어에 대한 정의를 빌어 언어는 "합의된 뜻을 지닌, 자의적인 말해지거나 쓰여진 상징들의 사용으로 특징 지워진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이라 한다. 즉 언어는 망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전자통신체계, 컴퓨터 체계, 수도관, 송유관 처럼 일종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망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더 쉬운 말로 언어는 도구라고 말해질 수도  있겠다.

  복거일은 이러한 망 이론을 가지고 자신의 영어공용어화에 대한 논리를 펼쳐나간다. 우리나라는 영어를 배우는데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는 국가 중 하나이면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투자한 만큼의 결과물이 안나온다는 말인데, 그러니 영어교육은 점점 더 확산되고, 투자가 아직 부족한가 싶어 이제는 경기도에서 서울에서 이곳저곳에 영어마을을 만들고, 대학에서는 국문학까지 영어로 강의하라고 하고, 영어사용구역을 설정하는가 하면,  초등학생까지 토익토플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젠장 나는 중학교 때 성문기본영어도 처음 들어봤다. 중학교 3학년 끝나고. 이렇게 해도 우리는 영어가 안된다. 우리가 기를 쓰고 영어를 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잘 살라고. 영어가 되야 잘 살 수 있다. 이 때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경제적으로풍요롭게'를 의미한다. 왜냐면 기업에서 원하고, 기업에서 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역을 통해 장사해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이며, 장사를 하자면 돈 되는 곳에서 해야하는데 돈 되는 국가는 영어를 사용한다. 그러니 영어를 할 수 밖에 없다. 이건 공감한다. 그런데 영어를 열심히 배우자는 것과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것은 분명 다르다.

   공용어는 우리가 한국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있듯 영어 또한 공식어로 채택하여 모든 일상과 공문서 작성 등등의 온갖 것들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함께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함께 사용한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것이 언제까니 '함께'가 될까 하는 것도 새로운 문제거리다. '함께'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는다. 다만 영어만을 공식언어로 채택하는 길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가 공용어의 단계일 뿐.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는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한국어와 영어를 둘다 공식언어로 채택한다면 누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러니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언어들 중의 하나로 귀속되고, 영어는 홀로 살아남는다.

  복거일은 망 이론을 통해 이 책에서 자신의 주장을 꽤나 일관성있게 설득한다. 그간의 그에 대한 비판론도 소개를 하며 왜 그러한 비판이 먹히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미국이 쇠퇴할 가능성, 모국어 인구에서 우세한 중국어와 스페인어가 영어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는 주장, 영어 침투에 대한 민족 국가들의 저항, 영어의 방언이 많아져 끝내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로 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 등등. 결정적으로 복거일은 한국어는 '박물관 언어'가 됨으로써 전문가들에 의해 보존될 것이라 하지만, 글쎄 이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무슨 의미를 가질까 싶다.

 "영어 공용은 정부가 시민들에게 영어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어의 독점적 지위를 허물어서, 시민들이 영어를 쓰고 자식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고를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따라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영어의 습득과 사용에 관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자연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언어 시장의 자유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말이 언어 시장의 자유화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이들은 막강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자유화는 아무데나 들먹이는 것이 아니다. '자유화'라는 말은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를 품고, 마치 그것이라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자유화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시민들은 물론 영어의 습득과 사용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돈 있는 자는 미국 북동부의 고급언어를 배우고, 그렇지 못한 자는 영어학원 갈 돈도 없어 영어를 못하면 신분상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앉아서 당하고 있어야 한다.

  "국제어인 영어를 제대로 못 쓰면, 남들에게 뒤쳐져 점점 큰 서러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는 것이다. 얼마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우리 역사학자들의 기자 회견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학자는 "미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이 한국사에 관해 제대로 쓰고 싶어도 한국에서 펴낸 한국사에 관한 영어 자료가 없어서 부득히 일본 역사책을 참고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영어를 잘 써야 한다."  

  그래 복거일은 알고 있다. 영어를 제대로 못 쓰면 남들에게 뒤쳐져 점점 큰 서러움을 겪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리 말한다. 말이 공용어화지 자 우리 이제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 라고 정부가 선언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이 유창하게 영어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가 미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국제회의석상에서나 협상 때 어려움을 겪는 것을 영어공용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돌려서는 안된다. 그건 그 전문가들의 협상력과 의사소통능력, 그리고 마음가짐의 문제이지 영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우리는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이고 비약이다. 문제의 본질이 다른 곳에 있음을 설정하고서 이를 비판하는 것과 같다. 허수아비의 오류라고 하지.

   복거일의 주장은 꽤 신선하고 새롭기는 했지만 또 꽤나 일관성있는 논리를 통해 설득력을 갖는 듯 하지만, 정작 현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대로 읽지 못한 채 논두렁에 허수아비 세워놓고 싸우는 것과 같다. 문제의 원인은 영어가 공용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들이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온갖 문제에는 많은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매우 부차적이고 작은 문제에 불과하다. 지금 분명 우리나라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영어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대학에서 강의를 영어로 하라고 하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는 원어민 강사들이 하나씩 배정되어 있고, 영어마을이며 영어사용구역을 따로 설정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그리고 '영어를 못함=퇴출'로 정식화되기도 한다.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영어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토익 점수 800점 정도는 이제 왠만한 취업지원자라면 획득하고 있는 기본점수에 불과하며, 한국어능력시험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영어가 대세인 현실에 위기감을 느낀 반대의 결과물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우리말로 하는 것과 영어를 열심히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지(의지와 무관하게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에 더 가깝지만)와는 분명 다른 문제임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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