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사라진다면 - 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
시정곤·정주리·장영준·박영준·최경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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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들은 영어 공용화를 실시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영어 공용화가 좋으냐 나쁘냐 라는 가치 판단은 일단 접어 두기로 했다. 대신 영어 공용화가 실시되고 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야기 서술의 주체를 필자가 아닌 미래의 어떤 사람으로 설정함으로써, 미래 사람들의 눈으로 미래에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서술 방법을 통해 필자들의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자 했다.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살펴보면서 영어 공용화의 문제점을 독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선정하는 과정에는 필자의 관점이 상당 부분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선에서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10쪽

외국 학자들 중에는 한국어의 급격한 쇠퇴와 영어의 급성자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이대로 한국어를 방치한다면 얼마 안 가서 한국어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멸 언어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 사회학자는 언어 멸종은 한 문화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체적으로 문화 생태계, 철학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한국 사회 내에서 반향은 거의 없다. 영어 공용화 이후 전 국민의 영어 능력이 평균적으로 신장했으며 이로써 국가의 경제력이나 위상이 한층 나아졌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90쪽

영어는 사회학적으로 뚜렷한 역할을 떠맡고 있다. 다시 말해, 존과 같은 사람을 하류층에, 그리고 미국 북동부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상류층에 자리매김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 공용화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회의 상류층을 형성하는 것은 서울 영어가 아니라 미국 북동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거나,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았거나, 아니면 고액 과외비를 들여 가면서 북동부 방언투를 배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방송과 신문, 정치, 경제, 문화의 최상류층을 형성하면서 사투리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대척점에 두고 있다. 사투리 영어를 구사하는 존과 같은 사람들이 하루의 빵을 걱정하면서 동물과 사람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는 사이, 미국 북동부 영어를 매끈하게 구사하는 이 사람들은 연일 상한가를 치는 주식값을 계산하며 다음 바캉스를 어디로 갈까를 고민하느라 머리가 다 하얗게 셀 지경이다. 부익부 빈익빈은 한때 그랬을 것으로 추측되는 교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영어에서 오게 되었다. '고급 영어 = 상류층' '사투리 영어 = 하류층' 이란 공식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13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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