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 나남신서 502
조동일 지음 / 나남출판 / 2001년 9월
품절


그런데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오더니, 정부 일각에서도 제주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하겠다는 계획을 발설했다. 여론을 알아보고 실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찬반론이 다 있는데, 반대론자만 목청을 높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사태는 커다란 불행의 시초이다.
정차 어떻게 될 것인지 추측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은 실행되지도 않고, 정책으로 채택되지도 않고, 막연하게 논의되기만 하는 단계에서도 커다란 페?를 낳는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막연한 논의가 영어 공부의 이상증후를 더욱 부채질해서 심각한 혼란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시급히 증상을 진단하고 치료해야 한다. -30쪽

세계에 있는 수많은 언어 가운데 오직 영어만 우상 노릇을 하면서 인류를 괴롭히는 것은 영미가 주도한 언어제국주의가 깊이 침투해서 만들어낸 질병이다. 그 해결책이 영어를 몰아내는 것은 아니다. 영어가 우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기 분수를 지켜 적절한 기능을 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필요한 영어를 함께 가꾸는 일에 국어가 확립되어 있는 한국이 적극 기여하는 것이 마땅하다. -32쪽

거듭 말하지만 영어가 국제사회의 공용어는 아니다. 교통어에 머무르지 않고 공용어의 영역에까지 들어서는 추세가 일부 보이기는 해도, 공용어는 아니고 그럴 수 없다. 미국에서도 공용어가 법제적인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영어를 국어가 있는 나라에서 공용어로 받아들이고, 세계의 공용어로 삼자는 것은 무리이다. 자기 나라 안의 언어와 문화는 획일화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영어패권주의를 확산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미국이 그렇게 요구할 체면이 없어 공개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는데, 다른 나라가 자진해서 영어패권주의를 신봉하고 그 전도사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43쪽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 공용어는 실현 불가능하다. 한국 사람들끼리 한국어로도 말하고 영어로도 말할 수 있으면 누가 영어로 말하겠는가? 영어로 말하게 하려면 한국어는 배우지 못하게 해야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영어만 가르치고 한국어는 가르치지 못하게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법은 만들어도 실행되지 않아 무효가 된다.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영어는 공용어가 아니고 외국어이다. 영어는 외국어로 배워 써야 한다. 영어를 외국어로 배워 활용하는 데 더욱 힘쓰자. 한층 효과적인 방법을 찾자. 이렇게 주장하는데 동의한다. 그 말을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바꾸어 하지는 말아야 한다. 국제화시대에는 외국어를 공용어로 해서 장차 모국어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잘못된 발상이다. 어느 시대든지 외국어는 외국어이다. -108쪽

언어의 단일화는 문화의 단일화를 초래한다. 인류가 이룩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버리는 결과에 이른다. 각기 자기 언어로 이룩한 구두 또는 기록의 창조물은 삶의 경험과 소망을 알뜰하게 담은 소중한 창조물인데, 그 일부는 영어로 번역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쓰레기통에 넣으면 정신적인 빈곤이 심각해진다. 생물의 종이 대폭 멸종하는 것 같은 재난이 인류의 정신세계에서 벌어진다. 자연에서도 문화에서도 다양성은 생명이 보존되고 진화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다. 다양성을 없애면 근친교배가 멸종을 초래하는 것과 같은 사태가 문화에서도 벌어진다. 다언어와 다문화의 조건을 상실한다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다. -165-166쪽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의 공동문어가 민족어와 공존했듯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가 민족어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중세에는 공동문어를 통해 바람직한 창조를 했지만, 지금은 그 임무를 민족어가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는 교통어여야 한다. -169쪽

민족어를 지키기 위해서 영어를 배격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서로 교류하려면 공동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영어를 공동의 언어로 삼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공동의 언어는 교통어여야 한다. 각기 자기 언어를 국어나 공용어로 하는 사람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를 가지면서 널리 교류하기 위해서 함께 사용하는 언어가 교통어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을 타파하고 영어가 교통어 노릇을 충실하게 하도록 하는 데 우리가 적극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민족문화끼리의 쟁패에서 유일한 승리자가 되겠다고 하는 패권주의 발상의 그릇된 세계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민족문화가 서로 대등한 자격을 가지고 각기 다르게 발전하면서 모두 함께 행복을 누려야 세계가 하나가 되는 진정한 세계주의를 이룩해야 한다. 통일후의 조국인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는 데 모범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게 하는 데 방해가 되는 그릇된 사고를 청산하고, 필요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 지금 힘써 해야 할 일이다.
민족문화의 정수를 이어받아 세계사의 진로를 새롭게 설정하고 인류 전체를 행복하게 하는 사상을 만드는 데 힘쓰는 것이 구체적인 목표이다. 상생이 상극이고, 상극이 상생이라고 하는 생극의 원리를 구현한 철학의 전통과 문학의 유산, 그것이 발상의 원천이고, 작업의 소재이다. 문화활동은 물론 기술개발의 역군들까지 생극의 창조를 신명나게 해서 널리 혜택을 주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의 길이다.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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