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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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피해자의 위치에서만 발화가 가능해지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회에서 이해받을 만한 서사로 구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고통을 자원으로 삼게 된다.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피해 사실을 반복적으로 공표하는 일도 자주 발생하는데, 이것만으로도 피해자의 정신 건강에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25
피해자가 직접 나와 말해야만 하는 상황은 그 자체로 비상사태이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변하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피해자의 직접 행동주의는 매우 힘이 세지만, 그만큼 당사자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준다.

27-28
순결 신화와 강간 문화가 강력하게 결합해 있는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강간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피해자가 술을 마셨거나, 밤늦게 다녔거나, 가해자와 아는 사이였거나, 사적 공간에 드나드는 것을 허용했다면 말이다.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내가 거기를 왜 갔을까. 왜 즉각 거부하지 않았을까. 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상대의 말을 믿었을까.) 성폭력 피해를 고소하지 않는다.

33
2차 피해란 1차 피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성차별주의와 잘못된 성 통념으로 인해 피해자가 마주하게 되는 부당한 일을 총칭한다.

38
피해자는 시간과 건강, 평판과 인간관계까지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법정에 선다. 법정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법정에서는 유죄 판단을 할 때 가장 보수적이고 엄격한 기준을 채택한다. 첫째,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만 기소한다. 둘째,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이 이루어져야만 유죄이다. 셋째, 피해와 가해 당사자는 반드시 특정되어야 한다. 즉, 법정에서는 강간 ‘범죄’를 다루지, 강간 ‘문화’를 처벌할 수 없다. 강간이라는 범죄를 없애려면 반드시 강간 문화를 변화시켜야 하지만, 법정에서 문화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이 공동체 차원의 해결이 여전히 우리의 선택지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48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입장은 아니고,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고 해서 약자의 편인 것도 아니다. 여성은 분명 가부장제에서 남성에 비해 주변적인 위치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변적인 위치 자체가 인식론적 특권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소수자와 약자라는 여성의 위치에 대한 집단적인 정치적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상황에서 유사하게 피해/가해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와 직급, 그리고 문화적 배경과 가족 문화 등에 따라 여성들 사이의 의견 차이는 점점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53
"이미 그 전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데, 매번 물어봐야 하나요? 싫다고 입으로는 말했지만 몸은 피하지 않았으면 그건 동의 아닌가요? 분명이 그쪽에서 먼저 좋다고 해서 시작된 일인데요." 등등. 이런 말들은 모두 ‘동의한 줄 알았다’는 말, 즉 ‘동의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설명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가해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54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건 너무 어려운 문제가 된다. 남성의 성적 욕구는 너무나 강력해서 어떤 경우에도 멈출 수 없다는 식으로 묘사된다.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만약에 정말 한번 불붙은 성 충동을 제어할 수 없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건 질병이니, 반드시 병원에 가기를 권한다.

56
섹스는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일이 아니라,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다. 섹스를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섹스와 ‘배설’, 섹스와 폭력을 구분하지 못한다.

70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물론 여전히 많은 피해자는 말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말을 의무로 생각하자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한 이들에게 부담을 주자는 게 아니다. 말하는 것이 더는 무엇인가를 각오해야만 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피해자가 피해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가해자에게 법정 피의자로서의 ‘권리’가 있다고 인식하는 사회. 나는 이런 사회가 피해자 비난이 없고 강간 문화가 사라진 ‘정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한다.

209-210
나를 포함하여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는다. 신고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경험을 부정하고 여성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겪는 젠더 피해처럼 가벼움과 무거움을 다루기 어려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젠더는 그 자체로 여자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남성 가해자는 가해 사실조차 모르며, 여성도 자신이나 다른 엿어이 입은 피해에 대해 ‘경중’을 판단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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