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손톱을 깍으며

                                 정호승

잠든 아기의 손톱을 깍으며

창 밖에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별들도 젖어서 눈송이로 내리고

아기의 손 등위로 내 입술을 포개어

나는 깍여져나간 아기의

눈송이같이 아름다운 손톱이 된다

 

아가야 창 밖에 함박눈이 내리는 날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린다

흘러간 일에는 마음을 묶지 말고

불행을 사랑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했다

날마다 내 작은 불행으로

남을 괴롭히지는 않아야 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고요한 용기로써

사랑하지 못하는 오늘밤에는 아가야

 

숨은 저녁해의 긴 그림자를 이끌고

예수가 눈 내리는 미아리고개를 넘어간다

 

아가야 내 모든 사랑의 마지막 앞에서

너의 자유로운 삶의 손톱을 깍으며

가난한 아버지의 추억을 주지 못하고

아버지가 된 것을 가장 먼저 슬퍼해보지만

나는 지금 너의 맑은 손톱을

사랑으로 깍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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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편지

                         정호승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있다

 

죄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하늘의 몫이므로

 

자유의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나의 별에는

피가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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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정호승

나 돌아갈 수 없어라

너에게로

 

그리운 사람들의

별빛이 되어

 

아리랑을 부르는

저녁별 되어

 

내 굳이 너를 마지막 본 날을

잊어버리자고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울어보아도

 

하늘에는 비 내리고

별들도 길을 잃어

 

나 돌아갈 수 없어라

너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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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들은 따뜻하다

                           정호승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든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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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정호승

축하한다

이가 시리도록

차고 맑게 살다간

너의 일생을

 

축하한다

눈보다 희고

짧고 작게 살다간

너의 영혼을

 

축하한다

그러나

한반도는 쓸쓸하다

 

북한산에

눈이 내리고

또 녹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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