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공부하자" (2020. 4. 12.)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642759 에 이어서...



  막연히 일본도 유교문화권이라 그 영향을 크게 받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가 보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일본에는 '이상주의'라 할 만한 이념이 없다(전자책으로 보고 있는 터라 쪽수를 표시한 인용이 어려우나, 이하는 전자책 191/467에서 시작되는 "일본에 이상주의는 없다"에서 가지고 온 내용들이다).

  서양에서 『군주론』, 『전쟁론』 같은 현실주의가 가진 도덕적, 윤리적 결함을 '기독교'가 보완하였다면, 『손자병법』을 낳은 중국에서는 '유교'가 그 역할을 하고, 특히 성리학은 조선으로 와서 퇴계와 율곡에 의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그나마 그런 역할을 맡았던 '불교'가 탄압받아 침략주의를 견제할 평화주의 이념이 소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인의 도덕관념을 마비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정작 역대 일왕들은 '국가신도'가 아니라 대부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명분과 이상주의가 앞서는 나라이고, 지금도 현실주의, 실용주의적 사고는 많이 부족하다. 거창한 총론을 뒷받침할 각론에 약하다.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는 완비되지 않은 계획이라도 과감하게 결단하여 우선 실행에 나간 뒤에 세부를 보완해 나가는 전략이 효과적이지만, 요모조모 따지지 않고 일단 지르고 보는 전략이 평시에도 늘 유효하거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반면 일본은 일반적으로 디테일에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면, (가뜩이나 만사 무덤덤한 편인)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세심함을 보이는 일본인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여러 일로, 일본이라고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도 생각하게 되었는데, 특히 '국가통계'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 일본은 자국 안전 등에 관한 겉으로 보이는 대외 이미지를 중시하여 (특히 국제기구에 보고하는) 부정적 지표는 항목을 세분화하는 등의 방식으로 표본 수를 줄여버리고, 긍정적 지표는 과장하는 전략을 취하곤 한다. 『국화와 칼』이 꿰뚫어 본 것처럼, 일본은 행동 관점의 '죄책감(guilt)' 문화가 아니라, 존재 관점의 '수치심(shame)'의 문화이고, 치욕과 치욕회피를 원동력으로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통계 '마사지' 문제는 서구에도 이미 꽤 알려져 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참조. “Simple statistical error puts Japan economic data in doubt”, Financial Times, 2019. 1. 17. https://www.ft.com/content/e3a28958-1a24-11e9-9e64-d150b3105d21; “Osaka polic failed to report 81,000 crimes between 2008 and 2012”, The Japan Times, 2014. 7. 13. https://www.japantimes.co.jp/news/2014/07/31/national/crime-legal/osaka-police-failed-to-report-81000-crimes-between-2008-and-2012-probe/ 등. COVID-19 사태에서도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탑승자를 통계에서 빼는 등 유사한 모습을 보였는바, 이는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과유불급이라고, 국가통계에 관하여 이런 평판이 쌓이는 것은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일본은 세부까지 계획이 서지 않으면 선뜻 움직이지 않는(못하는) 사회이고, '전례'가 없는 이번 사태에 관해서도, 미리 작성된 '매뉴얼'이 없다 보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다시 윤리문제로 돌아와서,


  일본의 도덕관념은 확립된 하나의 확고한 사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불교, 유교, 기독교, 황국사상, 병학, 무사도 등으로부터 일본인들의 생활에 맞게 취사선택된 혼합된 이념이다. 그러다 보니 시대와 사회가 바뀌면 쉽게 변한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규범도 실은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편하게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집단따돌림 문화를 보면 그 규범이 어떤 윤리로부터 도출된 규범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시국에, 최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들에게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보내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의료진들을 바이러스 취급하며 이지메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일본 외에는 찾기 어렵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서이다. 일본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 깊이 관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침략사상을 내걸고 나서서 강력하게 끌기라도 하면, 알면서 모르면서 거기에 충분히 끌려갈 소지가 있다고 한다.


  "세균 취급당하는 의료진, '코로나 이지메' 퍼지는 일본", 서울신문, 2020. 4. 13. 자 기사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414017005

  "코로나19 불안 커지는 일본… '현장대응 의료진 세균 취급'", 연합뉴스, 2020. 2. 23. 자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223026500073


  우리를 끝없이 연구하는 일본을 역이용해 우리가 일본에 포장해 발송할 선물로 나는,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를 꼽고 싶다["일본을 공부하자" (2020. 4. 12.) https://blog.aladin.co.kr/SilentPaul/11642759 참조].


  비록 노동권, 사회권과 같은 근대적 형태로 온전히 제도화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는 '홍익인간'부터 '인내천'까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윤리규범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사람이 그래서는 안 돼!"와 같은 자연법적 관습규범이 실정법의 빈틈을 채우고 있다. 그 덕분에 아시아에서는 가장 앞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고, 서서히나마 한 걸음 한 걸음, 인권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에 대해서조차도, 전쟁을 일으켜 흡수하자는 식의 주장은 우리사회에서는 어느 때라도 그리 큰 지지를 받지 못한다. 안주하지 않는 연구자, 운동가들이 있고, 커다란 꿈과 이상(理想)을 입에 달고 살고, 내 권리를 찾는 데 적극적이며, 언제라도 분연히 떨쳐 일어날 준비가 되어있는 시민들이 있다. 이제 새로운 단계, 조금 더 똑똑한 형태를 모색하여야 할 시기가 되었지만, 법원과 헌법재판소,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큰 추세에서' 시민의 권리를 늘려오고 있다. 이들이 적어도 일본이나 중국, 아시아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처럼 비판에 무관심하거나 대화조차 안 되는 기관들은 아니다(내부적으로도 개선과 자성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분출되어 왔고, 또 분출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일본의 형사법제는 악명 높다. 올해 초 미국 정부가 자문하는 워싱턴 DC의 아시아법 전문가가, 중국, 일본 전문가들도 모두 앉아 있는 한 비공식 학회 석상에서, "중국에 법의 지배란 없고, 일본도 형사법에 관해서는 중국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라고 대놓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2013년에는 UN 고문방지위원회에서 한 회의 참석자가 “일본 형사사법은 중세시대 수준”이라고 발언하자 일본 대표가 (나름대로 해명하거나 정중하게 사과를 요청하면 되었을 것을) 무례하게 "Shut up! Shut up!"하며 발끈한 바람에 도리어 그 주장이 확증된 것처럼 되어버리고 비웃음만 산 일도 있었다. “‘Shut up!’ U.N. rights envoy quits over tirade in Geneva”, The Japan Times, 2013. 9. 21. https://www.japantimes.co.jp/news/2013/09/21/national/shut-up-u-n-rights-envoy-quits-over-tirade-in-geneva/ 당시 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hkoQjIBA_3U 반면 우리는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수립한 형사절차상 (피고인) 인권보장 조치들이 이제는 일종의 '백래시'를 맞고 있는 형국이고, 그것이 거꾸로 강자나 권력형 비리를 비호하는 데 선별적으로 활용되는 규범혼란 상황에 놓여 있다. 형사절차에서 '피해자' 보호와 참여를 강화하는 등 기존 구조상 간과되었던 측면을 적극적으로 제도에 기입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중국도 국가규모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여 국제사회에서 인심을 잃고 있다. 홍콩문제, 소수민족 탄압, 비판억압과 감시사회도 그렇지만, 최근에는 중국 내 아프리카인 차별로 큰 비판에 직면해 있다. "아프리카 대사들 '코로나19 차별 중단하라'… 중국 '개선하겠다' (종합)", 연합뉴스, 2020. 4. 13. 자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200413076151083?section=search 혁명은 하였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진지하게 사고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보인다.


  물론 우리도 갈 길은 멀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난민 인정률은 OECD 국가 중 일본 등과 함께 가장 낮은 수준에 속하며, UN 사회권규약 등 국제인권규범을 '시기상조'라는 등 이유를 들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포장해서 수출할 정도의 모범이 되려면 우리부터 돌아보고 쇄신해 나가야 한다.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마련한 보편적 규범과 상식을 숙고하여야 한다.


  이번 COVID-19 사태로 맞은 위기이자 기회를 능동적으로 사고하면 좋겠다. 우리가, 대한민국(통일한국)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도 생명과 평화, 인권, 민주주의를 가장 앞장서서 옹호하고 이를 위해 싸우는 존경받는 나라가 되면 좋겠다.


  유럽인권재판소(ECtHR)와 같은 아시아인권재판소를 우리나라에 유치, 설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 광주도 좋고, (아니면 오히려, 전략적으로) 대구에 세워도 좋을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른 지역 시민들께서도 우리사회의 미래를 위해 충분히 양보해주실 수 있을 사안이라 생각한다.

  대구가 지금은 '보수의 성지'처럼 되어 있지만, 이는 (고작) 제3공화국 이후의 일이다.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곳은 영남지역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문천회맹'이 그 시작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처음 의병을 일으켰고("달성출신 ‘韓末 최초 의병장’ 문석봉…집터엔 그 흔한 표지판 하나도 없어", 영남일보, 2019. 6. 1. 자 기사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90601.010010715190001), 을사늑약 후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전개하였으며(김광제, 서상돈 등), 1915년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곳이고(대구 달성공원),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한 학생운동(태극단 등 "1920년대 후반~1945년 대구 항일 학생운동", 영남일보, 2013. 12. 13. 기사 및 연결기사 참조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31213.010340757380001), 노동운동(1938년 12월 대구 직조공장 노동자 파업 등), 무장투쟁("'의열단 최초단원 10명 중 3명이 대구경북人' 의열단 100주년기념식 열려", 영남일보, 2019. 11. 11. 자 기사)이 활발하게 일어났다("대구서 교육자·작가 역사대담 '대구는 독립운동의 성지'", 연합뉴스, 2019. 8. 22. 기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0822078700053). 독립 후에는 미군정하에서 '10월 민중항쟁'이 일어났고(https://ko.wikipedia.org/wiki/10%EC%9B%94_%ED%95%AD%EC%9F%81),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무려 72%의 대구시민들이 진보당 조봉암에게 표를 던졌다("조봉암이 대선에서 70% 득표한 지역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19. 10. 21. 자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74404).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여 '2. 28. 학생의거'를 일으켰고, 이는 '3. 15. 마산의거'와 '4. 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태일조영래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시아인권재판소의 대구 설립'은, 섬처럼 고립되어 그 나름으로 상처받고 소외되었다 여기는 대구시민들의 정서를 위로, 재전유하여 우리 사회에서 보다 합리적인 토론 기반을 열어 나가는 좋은 단초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예산을 들여 신공항을 짓는 등 지역개발사업을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 있다. 앞에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 대당을 언급하였지만, 대구는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남 유림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고, 그 학풍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데 특징이 있었다[조선 초 김종직을 영수로 한 영학파, 경주 손중돈에 이은 이언적 등 동방 사현(그중 조광조의 갈래가 성혼 등 기호지방으로 전해진다), 중기 조식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가 이어지다가 결국 퇴계학파로 대부분 흡수, 정리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영남학파" 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7276].

  물론 남북의 평화적 통일 후 비무장지대 인근이나 북한 지역에 아시아인권재판소를 설치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고, 장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 후 전범재판 등 어떤 국제재판이 제기될지 장담할 수 없고, 인프라나 지역정서 차원에서 대구와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아시아 국제재판소가 서려면 누구보다도 일본의 동의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이는 남북통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대구는 우선 일본과 가깝다는 큰 장점이 있다(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직항노선이 있고, 상하이, 홍콩, 타이베이, 방콕, 하노이로도 연결된다). 국제재판소가 잘 운영되려면 해당 지역 주민의 전폭적 이해와 지지도 필수적이다. 대구는 현 대구고등법원의 전신이 된 '대구공소원'이 1908년 경성공소원, 평양공소원과 함께 가장 먼저 설치된 곳으로(대구 등 '지방'재판소는 1895년 고종이 반포한 법률 제1호인 '재판소구성법'으로 처음 설치되었다), 새로운 재판소를 흔쾌히 맞이할 경험과 준비가 되어 있다. 비무장지대에는 '전쟁 자체'를 기억하고 되돌아보는 평화공원, 생태공원이, 평양 등에는 통일 전 북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보다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세계가 우리의 민주주의와 투명성, 시민의식에 주목하는 이 시기에,

  우리 자신의 인권의식, 감수성, 타자에 대한 열린 마음과 공감·연대의식을 점검하고 키워나가는 한편, '인권 옹호자로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한 국민적 대화를 열어 나갔으면 좋겠다.


  아울러, 다수의 일본 시민들과도 허심탄회하게 대화함으로써, 일본 극우세력의 침략주의를 자연도태시키고, 평화주의의 상징이자 동반자, 둘도 없는 벗이 되자고 설득해 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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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20-04-1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일본 뿐인 줄 알았는데 인도도 있었다;;;

˝‘코로나 옮긴다‘며 돌 던졌다···의료진이 되레 구타당하는 인도˝, 중앙일보, 2020. 4. 14. 자 기사
https://mnews.joins.com/article/23754117
 



  이것도 작년 7월쯤 읽고 정리하지 못한 책... 이 책보다는 아래 『미국 헌법을 읽다』가 신선하고, 수작(秀作)이다. 다만, 지식소매업에 오래 종사하셔서 그런지, 그럴 듯하게(이야기가 되게) 썰을 풀다가 사실관계를 틀리는 경우가 보인다(번역과정의 오류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는 일이다. 자료를 꼼꼼히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검증하여 읽고 쓰는 훈련을 하지 않은 분들은, 대중서를 많이 내거나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을 좋은 학자, 심지어 그 분야 최고 권위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학문적 역량과 대중적 글쓰기 재주는 같이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매단계에서 양질의 지식이 유통될 수 있으려면, 도매업의 튼튼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대중들이 소매단계 유사학자를 업고(책 한두 권 읽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 분야를 10년 이상 연구한) 도매업자들을 물어뜯고 공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슬픈 일이다. 성숙한 토론이 되려면 다른 영역에 대한 존중을 깔아야 한다.


  이는 토크빌이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첨단학문과 문화, 예술적 성취, 순수(= 비실용) 지식을 귀족주의 사회만큼 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평균적 지혜'라는 관점에서는 민주주의 사회가 귀족주의 사회보다 수준이 높다(p. 130). 토크빌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차이를 별로 따지지 않고, 세부를 꼼꼼하게 파고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p. 228). 미국에서 발달한 '실용'학문, 즉 응용과학과 기술은 과거 유럽 귀족사회가 만들어낸 기초과학의 순수지식에 터 잡고 있(었)다. 순수한 기초지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기초가 무너지면 응용과 기술은 금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다. 토크빌은 이것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 보았다(p. 225).


  지금처럼 경제가 상당히 성장, 발전한 상황에서 토크빌과 같이 일도양단의 결론을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열린 공론장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자유롭게 오류를 검증, 수정하는 분위기에서라면, 첨단의 순수학문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다양한 경로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 순수과학은 막대한 투자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 분(양자오)의 책들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어, 유유출판사에서 낸 다른 고전강의 시리즈에도 흥미가 간다. 어디에 중점 두고, 어떻게 지식을 체계화하는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나 방식과 달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읽은 지가 오래된 탓에, 갈무리해 둔 대목을 주로 '밑줄긋기' 식으로만 정리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비참한 생활도 사라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프랑스 사회에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공존한다." (...) 민주주의 사회와 민주주의의 효과는 즐거움을 줄이고 편안을 늘리는 것이[다]. - P128

혁명의 충동, 집단적 열정이 격앙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유, 특히 고도의 개인적 자유와 유능한 정부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먼저 공공질서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행위를 구속함으로써 개인 행위가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치되도록 요구합니다.

(인용자 주: 읽을 당시에는 선뜻 수긍하지 못했던 대목인데, COVID-19에 대한 각국의 관리방식, 특히 우리의 성공방식을 보며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149

"인류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 이토록 사형이 많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 P158

토크빌이 프랑스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토록 두려운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프랑스에 시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토록 오래도록 대혁명이라는 동란을 겪었음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시민의 기초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인용자 주: 유보적으로 읽었던 부분이나, 시민을 ‘형성‘하는 운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곱씹어 생각할 대목이다.) - P169

느슨한 정부라야 분산되고 세세한 행정이 가능[하다]. - P173

따라서 사법권의 상대적 위계는 입법권과 행정권보다 높습니다. (...) 토크빌의 책에서는 행정권의 위계가 삼권 가운데 가장 낮아서 사법권이나 입법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 행정권은 입법권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지 입법권에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 P187

토크빌은 프랑스에서 흔히 유행하던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온다‘는 관점을 철저하게 뒤집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가 된 것은 미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0

"모든 세대의 미국인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운 종이다. 그들은 옛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전범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구속력을 가진 정전(正典, canon)이란 것은 사라졌다. 정전이 없으니 내면화되고 일치된 언어 규율이 없어지고, 언어와 문자를 운용하기 위한 연구도 없어지며, 과거 유럽의 정확하고 연구된 언어, 문자와 문학도 없다." (...) "미국은 문학이 없는 곳이다. 적어도 유럽인이 인정할 만한 문학은 없다. 미국에 문학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정치 구조 아래에서 만들어진 사회의 필연이다."

(인용자 주: 오늘에 와서는 언어의 이런 유연성이야말로 미국 팽창의 큰 비결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은 영어를 쓰지 않고, 그것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아래 기독교에 관해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 P232

토크빌은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서 넓게 분포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이슬람교가 너무나 많은 일과 사소한 것까지 관여해서 신자가 지켜야 할 규약이 너무 많아졌고, 이것이 현대 생활과 강하게 충돌하여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선택하고 이슬람교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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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교향악 펭귄클래식 39
앙드레 지드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책도 아래 리뷰도, 베토벤이나 전원교향곡과는 무관한 이야기)


  집을 책장으로 두르고 책을 겹겹이 꽂았는데도 집이 책으로 가득 차 보관할 공간이 없다. 산 책을 또 사는 일이 자주 생기고,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도 힘들다. 박스 안에 들어가 잊힌 책들이 많다. 한동안 서재를 떠나 있었던 터라 틈틈이 책장을 정리하며 어디에 뭐가 있었는지 상기하고 있던 중...

  리뷰를 쓰지 않은 이 책을 발견했다. 작년 예비군 훈련장에서 읽었다. 군복 옆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 책을 챙겨가는 편이다. 박태원의 소설을 읽은 해도 있었고 랭보를 읽기도 했다. 대기하는 시간에 틈틈이 읽다 보니 맑게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날 바로 메모하고 정리하지 않았더니 어렴풋한 느낌-약간의 '혐오'와 분노-만 남아있다.

  전자책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책을 조금씩 버려야 하나도 싶다. 누가 버린 책을 줍고 모으긴 했어도 책을 버린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아기가 '도서관'이라 여기는 서재에 드나들다가 책이 와르르 쏟아질까 걱정도 된다. 어떡하나.


  우리말로 옮기면 그 연관이 드러나지 않지만, 목사, 목자 pasteur (pastor), 그러니까 '파스퇴르'는 전원교향곡 La Symphonie pastorale (Pastoral symphony)이라 할 때 전원 pastoral과 같은 라틴어 단어(목동, 풀 먹이다)에서 왔다.


  아래 '밑줄긋기'에서 지드의 사도 바오로(바울)에 대한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교리와 관습이 근원을 떠나 도그마에 빠지는 것을 비판, 경계한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지금도 예수를 팔아 인간적 잇속만 차리며 신도들을 오도(誤導)하는 늑대같은 무리들을 너무 많이 본다.



사흘 전부터 계속해서 눈이 내리더니 길이 막혔다. - P9

‘정신은 자주 마음에 속는다‘ - 라로슈푸코 - P81

"예수의 구원의 복음이 성 바울의 교리적 도덕주의(moralisme doctrinal)를 받아들인 교회들에 의해 왜곡되어 버렸고 심각하게 변조되었다." - 앙드레 지드 (작품해설 중에서) - P115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뜻에 반하는 기독교(le christianisme contre le Christ)‘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예수보다는 성 바울이, 복음서보다는 바울 서(書)가, 자기들이 믿는 그리스도보다는 교회가, 신앙보다는 윤리가, 미래보다는 관습이, 그리고 사고의 자유보다는 교리가 더 중시되고 강조됨으로써 예수의 기독교 정신이 성 바울의 교리에 의해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작품해설 중에서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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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유익했다!


  제1장 경제학과 심리학의 만남 - 행동경제학의 탄생




  제2장 인간은 제한된 합리성으로 행동한다 - 합리적 결정의 어려움




  제3장 휴리스틱과 바이어스 - '직감'의 기능




  제4장 프로스펙트 이론(1) - 리스크 상황 하에서의 판단




  제5장 프로스펙트 이론(2) -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구속됨




  제6장 프레이밍 효과와 선호의 성향 - 선호는 변하기 십상




  제7장 근시안적인 마음 - 시간선호




  제8장 타인을 돌아보는 마음 - 사회적 선호




  제9장 이성과 감정의 댄스 - 행동경제학의 최전선

    1. 감정의 움직임




    2. 신경경제학

    3. 진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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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wjd3835 2025-08-23 23: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마케팅공부중인데 추천해주신 도서로 차근차근 지식을 넓혀가는데 도움됩니다 :)
 


  전쟁 이야기다 보니, (우리 감성에서는) 살짝 삼국지 느낌으로(?) 각색되었는데...

  일단 국내서에서는 (의외로) 잘 접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 비교적 재미있게 읽었다. (미국 서점에서 역사 코너를 가보면, 이른바 Founding Fathers 일대기를 요리 다루고 조리 분석한 책들이, 말 그대로 매달 '쏟아진다'. 하나의 대중 장르로 자리잡은 것이다. 우리도 3.1운동과 임시정부, 제1공화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연구가 진전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병력을 손에 쥐고 있던 조지 워싱턴이, 1783. 11. 25. 영국군이 물러난 뒤 12월 지휘권을 내려놓고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사실이나(위 책은 여기까지만 다룬다. 관련 자료 https://www.mountvernon.org/library/digitalhistory/digital-encyclopedia/article/resignation-of-military-commission/),

  분위기와 여건상 얼마든지 세 번째 임기를 도모할 수 있었음에도 1797년 물러나 낙향함으로써 미국 대통령은 중임만 하도록 하는 '전통'을 확립한 것 등은 생각할수록 놀랍다(어느 정도는 본인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영향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만일 그가 세 번째 임기 중에 사망한다면 미국 대통령직이 종신직이라는 인상을 줄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그는 1799. 12. 14. 버지니아주 마운트 버논에서 사망했다).


  지금은 수정헌법 제22조가 명문으로 3선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조지 워싱턴이 확립한 관례와 전통을 후대 대통령들이 따른 것일 뿐이었다. 조지 워싱턴보다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감히 두 번 넘게 대통령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나. 수정헌법 제22조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사상 처음 3선에 나서고 1944년 선거로 4선까지 하였다가 네 번째 임기 시작 석 달도 안 되어 뇌출혈로 사망한 후인, 1947년 의회를 통과하여 1951년에야 각 주 비준절차를 마쳤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장기 재임할 수 있었던 것이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정세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COVID-19는 각국 레짐과 국제정세를 또 어떻게 바꿔 놓을지... 여하간 초대 대통령으로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기준을 세운 것이다.


  사실 당시 미국 대통령이 상대해야 했던 카운터 파트너들은 모조리 유럽 군주들이었기 때문에, 가급적 긴 임기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때 살던 유럽인(미국인)들에게 사망하거나 추방당하지 않은 '퇴직 군왕'이란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요순(堯舜)의 선양(禪讓)처럼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역사서에 따라서는, 요임금은 순임금에 의하여 감금, 축출당했고 '선양'이란 순임금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어 있다.)


  실은 조지 워싱턴이 1774. 6. 15. 만장일치로 총사령관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인품 덕분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장군으로서 능력보다 인격이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다행히 여기에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고 도덕적이며 상냥하고 용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명예를 중히 여기며 상호간에 신뢰를 존중합니다. 그는 공익을 우선하고 분파를 거부하며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권력에 대한 끝없는 탐욕과 군사적 독재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지역적 라이벌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대륙의 통일을 촉진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 그는 바로 조지 워싱턴이라 생각합니다."

  - 존 애덤스(초대 부통령으로 후일 제2대 대통령이 된다)가 대륙회의에서 조지 워싱턴을 천거하면서 한 말 [Ron Chernow, Washington: A Life, New York: Penguin, 2010, p. 186, 번역되어도 좋을 책이라 생각한다. 같은 지은이가 쓴 알렉산더 해밀턴 평전은 번역되어 있고(초대 재무장관으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의 공저자 중 한 명), JP모건, 록펠러의 전기도 나와있다. 그나저나 위 말은, 조지 워싱턴에게 장군으로서 능력이 없다는 말이었다기 보다는, 다른 경쟁자들과 대조되는 그의 인품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었을 것이다.]



  조지 워싱턴은 전쟁 중이던 1782. 5. 22. 부하로부터 미국 최초의 군주가 되어달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이른바 '왕관 편지(Crown Letter)'의 한 대목이다.


  "저는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이러한 문제(인용자 주: 참전군인들의 급여, 연금문제 등)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 저는 지금 이 나라에는 공화국의 지혜보다 군주국의 에너지가 훨씬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유럽의 군주국들이 나름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건재한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합니다. ... 총사령관님이 미국 최초의 군주가 되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 Lewis Nicola 대령이 조지 워싱턴에게 보낸 편지


  조지 워싱턴은 크게 놀라 그날 바로 답장을 보낸다.


  "그동안 군이 이룬 폭넓은 정의는 대단한 것입니다. ... 그 누구라도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이룬 일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 나라에 그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군대 내에 이런 생각이 있다는 귀관의 편지에 놀라움과 비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만약 귀관이 이 나라와 그대 자신 그리고 후손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또는 나에 대한 존경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런 성격의 말은 물론 생각조차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조지 워싱턴의 답장(https://founders.archives.gov/documents/Washington/99-01-02-08501)


  이후에도, 부사령관 중 한 명인 Horatio Gates 등이, 조지 워싱턴의 온건한(어쩌면 수동적인) 리더십에 불만을 품고 주도한 '뉴버그 쿠테타 기도 사건'이 있었지만, 조지 워싱턴은 단호하고도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를 지혜롭게 무마시킨다.


  "나는 여러분의 헌신적 봉사와 희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여러분의 동지이며 여러분의 고통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성명서]는 비군사적이고, 모든 질서와 원칙을 파괴하는 것으로, 그 동기와 목적이 사악하며, ... 이성과 선의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울화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익명의 선동가(인용자 주: 당연히 게이츠 도당이었지만 워싱턴은 이렇게 표현했다)가 여러분에게 배반을 하라고 요구한 그 나라는 다름 아닌 여러분의 나라, 곧 우리 아내와 자식들의 나라이며, 우리의 재산이 있는 곳입니다. 좀 더 인내심을 가지라는 말을 무시하고 선동하는 그 말은 우리에게 이성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군과 시민 사이를 분리하는 주장이 옳단 말입니까? 그런 글을 쓴 자가 진정 군의 친구란 말입니까? 그런 자가 이 나라의 친구란 말입니까? 그는 진정 사악한 적보다도 못한 자입니다. 만약 그 선동가가 말한 대로 된다면 우리는 자유를 잃고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될 것입니다. ... 대부분 심의기구가 그러하듯이 대륙회의는 조치가 늦지만 결국 정당하게 일을 처리하리라 믿습니다(인용자 주: 연금법 개정 등). 여러분! 성장하고 있는 이 나라를 내란의 홍수 속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에게 인류를 위해 무슨 일을 했냐고 물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만약 오늘이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완벽한 단계를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합니다."


 - 1783. 3. 15. 조지 워싱턴이 쿠데타를 잠재울 수 있게 한 '덕의 사원' 연설(https://www.mountvernon.org/education/primary-sources-2/article/newburgh-address-george-washington-to-officers-of-the-army-march-15-1783/https://constitutioncenter.org/blog/george-washington-calms-down-the-newburgh-conspiracy)


  통치형태라고는 군주제밖에 없던 시절의 사고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나아가 인류 미래까지 내다 본, 초대 대통령이 가져 마땅한 너무나 바람직한 '정답'같은 생각 아닌가?


  그러면서 조지 워싱턴은 "여러분! 내가 안경 쓰는 것을 허락해주기 바랍니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동안 머리도 희어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라고 주뼛거리며 자신이 받은 편지를 읽기 위해 더듬더듬 안경을 꺼내 썼다는데, 존경받는 총사령관의 이 꾸밈없고 인간적인 모습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던 장교들을 단념시켰다는 것이다.


  아무튼 조지 워싱턴은 총사령관으로 선출될 때 기대되었던 바로 그 이유 그대로, 휘하에 있던 군사력을 자신의 권력 추구에 사유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와 관련하여 토머스 제퍼슨(초대 국무장관이자 제2대 부통령이자 제3대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혁명들이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였던 자유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과 달리, 단 한 사람의 자제와 덕성이 우리 혁명이 그런 식으로 막 내리는 것을 막았다." https://founders.archives.gov/documents/Jefferson/01-07-02-0102),


  조지 워싱턴의 결단은 미국 입장에서는 큰 복이었다. 덕분에 세계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조지 워싱턴은 1787. 5. 25.부터 9. 27.까지 열린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도 의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켰고, 그 덕분에 세계 최초 헌법으로 철저한 권력분립 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미국 헌법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있기도 했다(참고로, 조지워싱턴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미국 독립 직후가 아니라 미국 헌법이 제정, 발효된 1789. 4. 30.부터다. 군 통수권을 의회에 반납하고도 5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인 것이다).


  조지 워싱턴 외에는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의 공저자인 제임스 매디슨이 회의에 매일 참석하였다. 그는 미국 헌법의 초안이 된 Virginia Plan을 만들었고, 제헌회의 경과를 속기하였다. 매디슨은 미국의 제4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조지 워싱턴도 제임스 매디슨도 버지니아주 대표였다(건국 초 제10대 대통령까지 무려 여섯 명이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고, 현재까지도 가장 많은 여덟 명 대통령이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단, 남북전쟁 후에는 제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유일하다. 1620년 미국에서 처음 주조된 위스키 때문이긴 하지만 버지니아주는 'the Birthplace of the American Spirits'라고도 불린다. 아래에서 보듯 서부 출신은 단 한 명뿐인데, 그마저 최악의 대통령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닉슨이다. '정치적 기반'으로 따지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뉴욕주가 오하이오주와 더불어 각 7명씩으로 가장 많은 대통령을 배출한 주가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하와이주에서 태어났지만,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출신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presidents_of_the_United_States_by_home_state).



  헌법을 만든 이들이 이렇게 연달아 대통령이 된 덕분에, 지금까지도 미국 정치논쟁의 중심에는 '무엇이 헌법정신에 부합하는가'가 놓이고, 법원 판결 또한 그렇다(이도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미국 헌법이 세계에서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시에는 '헌법이 모든 법규범의 지도원리가 되는 최고규범'이라는 생각조차 생소한 것이었다. 참고로,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의 세 저자 중 남은 한 사람인 존 제이가 미국 초대 연방대법원장이다.).

  트럼프 대통령 탄핵절차의 릴레이 발언에서, 민주당 의원들도 공화당 의원들도 모두 '헌법'을 근거삼아 상대가 '위헌적'이라며 공격했다. 따져 보진 않았지만, 당시 받은 인상으로는 헌법을 언급하지 않은 의원이 단 한명도 없지 않았나 싶다.

  미연방대법원 변론기일을 보기 위하여 아침 6시부터 줄을 서서 5시간을 기다려 오전 두 번째 사건을 본 적이 있는데[매년 10월부터 다음해 6월 말 7월 초 시작되는 여름 휴정기까지, 평일 오전 10시, 11시 각 한 건씩 진행된다(가끔 특별기일을 열기 위해 오후 시간을 비워둔다, 이번 회기에는 대통령 탄핵절차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오후에는 의회에 가있어야 했다, COVID-19로 3월 둘째주부터는 변론기일을 아예 열지 못했다). 첫 사건에 안전하게 입장하려면 오전 5시에는 가서 줄을 서야 한다. 이목을 끄는 사건은 전날 가서 줄을 서도 입장하지 못할 수 있다.], 법'학'과 전혀 거리가 먼 필부필부들이 자기와 전혀 무관한 사건 재판을 보겠다고 서서 '헌법'을 놓고 토론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개중에는 단지 대법원 재판을 보고, 의회 회기를 방청하기 위해 워싱턴 DC에 '관광'왔다는 미국 시민도 있었다(내가 만난 분들은 추운 날 그렇게 장시간 줄을 서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들이었다. 일리노이였나 미시건이었나 위스콘신이었나 아무튼 훨씬 추운 중북부 지역에서 오신 그분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고 있다."고 했다). 이 글 직전에 미국 의료보험, 빈부격차 등에 관한 짧은 글을 썼지만, 헌법에 관한 살아있는 관심은 그 글과는 반대로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숨은 저력임이 분명하다(한편 애리조나에서 만난 어떤 우버 기사는 '자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정을 너무 잘 이끄는 것 같다'고 역설했고, 미국인 절반은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COVID-19가 터지기 전까지만 하여도 재선을 의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우리도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민주주의 역사를, 시민의 힘으로 빠르고도 충실하게 쌓아가고 있고, 특히 아시아 여러 나라 중에는 독보적이라 생각한다. 다만, 전직 대통령들의 선택은 조지 워싱턴과는 달랐고, 측근 비리 없었던 대통령이 없었다. 거기다가, 최근 '시민'과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표출되는 민의들은 반드시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아 안타깝고, 때로 위험하게 느껴진다.)




  어느 정도 미화는 있었겠지만 이들 일화 대부분은 미의회 도서관 등에 보관된 '실물' 문서로 직접 뒷받침되는 것들이고, 그렇다면 흥미로운 것은, 우리처럼 유교 같은 윤리 중심 정치이념이 있었던 것도 아닌(것 같은)데, 조지 워싱턴은 어떻게 그런 인품과 덕성을 갖출 수 있었고, 미국 건국의 주역들은 어떻게 그 점을 가장 앞세우게 되었나 하는 점이다. (그렇게 보는 견해도 있지만) 기독교 윤리가 이를 '직접' 이끌어 낼 수 있는 가르침인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리스 7현인의 이상? 영국의 폭정에 비춘 반면교사? 그냥 사람이 원체 훌륭해서?


  미국이 세워질 때, 다른 자질도 아니고 '도덕성'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기준과 덕목이 되었다는 점은 이후에 펼쳐진 미국사를 생각하면 조금 뜻밖인 면도 있다. 그러나 시대가 극단으로 흐를 때마다 돌아갈 '원점', '이상적 지도자상'이 되어준다는 점에서는 미국인들 입장에서 큰 행운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언제나 세종대왕의 재림을 기대하듯이.


[덧붙여,]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역대 대통령 순위를 꼽으면, 링컨 대통령이 보통 가장 앞에 오고, 그 다음으로 조지 워싱턴 또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꼽힌다. 케네디, 오바마 등 인지도(혹은 인기?)가 더 높은 대통령이 많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그 정도였어?' 싶은 분도 있겠지만, 심지어 조지 워싱턴이 가장 앞서는 조사도 있고, 최근 그 순위가 더 올라가는 느낌이다. 한편 아래에서 보듯, 미국이 명실상부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한 뒤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통령들이 대거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다. 어찌 보면 링컨 대통령이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그나마 그런 패권주의적 경향에 균형을 잡아주는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C-Span https://www.c-span.org/presidentsurvey2017/?page=overall



Siena College https://scri.siena.edu/2019/02/13/sienas-6th-presidential-expert-poll-1982-2018/



NY times https://www.nytimes.com/interactive/2018/02/19/opinion/how-does-trump-stack-up-against-the-best-and-worst-presidents.html



US NEWS ('최악 대통령' 조사로, 역순) https://www.usnews.com/news/special-reports/the-worst-presidents/articles/ranking-americas-worst-presid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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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20-04-12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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