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작년 7월쯤 읽고 정리하지 못한 책... 이 책보다는 아래 『미국 헌법을 읽다』가 신선하고, 수작(秀作)이다. 다만, 지식소매업에 오래 종사하셔서 그런지, 그럴 듯하게(이야기가 되게) 썰을 풀다가 사실관계를 틀리는 경우가 보인다(번역과정의 오류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는 일이다. 자료를 꼼꼼히 시시콜콜하다 싶을 정도로 검증하여 읽고 쓰는 훈련을 하지 않은 분들은, 대중서를 많이 내거나 언론에 자주 노출되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들을 좋은 학자, 심지어 그 분야 최고 권위자로 오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학문적 역량과 대중적 글쓰기 재주는 같이 따라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소매단계에서 양질의 지식이 유통될 수 있으려면, 도매업의 튼튼한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최근 들어 대중들이 소매단계 유사학자를 업고(책 한두 권 읽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 분야를 10년 이상 연구한) 도매업자들을 물어뜯고 공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슬픈 일이다. 성숙한 토론이 되려면 다른 영역에 대한 존중을 깔아야 한다.
이는 토크빌이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첨단학문과 문화, 예술적 성취, 순수(= 비실용) 지식을 귀족주의 사회만큼 추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평균적 지혜'라는 관점에서는 민주주의 사회가 귀족주의 사회보다 수준이 높다(p. 130). 토크빌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차이를 별로 따지지 않고, 세부를 꼼꼼하게 파고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p. 228). 미국에서 발달한 '실용'학문, 즉 응용과학과 기술은 과거 유럽 귀족사회가 만들어낸 기초과학의 순수지식에 터 잡고 있(었)다. 순수한 기초지식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기초가 무너지면 응용과 기술은 금세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다. 토크빌은 이것이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라 보았다(p. 225).
지금처럼 경제가 상당히 성장, 발전한 상황에서 토크빌과 같이 일도양단의 결론을 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열린 공론장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자유롭게 오류를 검증, 수정하는 분위기에서라면, 첨단의 순수학문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다양한 경로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최근 순수과학은 막대한 투자가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이 분(양자오)의 책들에는 나름의 미덕이 있어, 유유출판사에서 낸 다른 고전강의 시리즈에도 흥미가 간다. 어디에 중점 두고, 어떻게 지식을 체계화하는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요소나 방식과 달라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읽은 지가 오래된 탓에, 갈무리해 둔 대목을 주로 '밑줄긋기' 식으로만 정리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가 사라지면 그와 함께 비참한 생활도 사라진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지닌 프랑스 사회에는 빅토르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 공존한다." (...) 민주주의 사회와 민주주의의 효과는 즐거움을 줄이고 편안을 늘리는 것이[다]. - P128
혁명의 충동, 집단적 열정이 격앙되는 와중에 사람들은 자유, 특히 고도의 개인적 자유와 유능한 정부라는 이 두 가지 요소가 기본적으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정부는 먼저 공공질서를 만들어내야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 행위를 구속함으로써 개인 행위가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에 합치되도록 요구합니다.
(인용자 주: 읽을 당시에는 선뜻 수긍하지 못했던 대목인데, COVID-19에 대한 각국의 관리방식, 특히 우리의 성공방식을 보며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 P149
"인류가 제정한 법률 가운데 이토록 사형이 많은 경우는 본 적이 없다." - P158
토크빌이 프랑스 독자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그토록 두려운 대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프랑스에 시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토록 오래도록 대혁명이라는 동란을 겪었음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시민의 기초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인용자 주: 유보적으로 읽었던 부분이나, 시민을 ‘형성‘하는 운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곱씹어 생각할 대목이다.) - P169
느슨한 정부라야 분산되고 세세한 행정이 가능[하다]. - P173
따라서 사법권의 상대적 위계는 입법권과 행정권보다 높습니다. (...) 토크빌의 책에서는 행정권의 위계가 삼권 가운데 가장 낮아서 사법권이나 입법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 행정권은 입법권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작동하지 입법권에 도전할 수는 없습니다. - P187
토크빌은 프랑스에서 흔히 유행하던 ‘민주주의는 혁명에서 온다‘는 관점을 철저하게 뒤집었[다]. "미국이 민주주의 사회가 된 것은 미국에서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0
"모든 세대의 미국인은 새로운 사람이고 새운 종이다. 그들은 옛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전범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진정한 구속력을 가진 정전(正典, canon)이란 것은 사라졌다. 정전이 없으니 내면화되고 일치된 언어 규율이 없어지고, 언어와 문자를 운용하기 위한 연구도 없어지며, 과거 유럽의 정확하고 연구된 언어, 문자와 문학도 없다." (...) "미국은 문학이 없는 곳이다. 적어도 유럽인이 인정할 만한 문학은 없다. 미국에 문학이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평등하고 민주적인 정치 구조 아래에서 만들어진 사회의 필연이다."
(인용자 주: 오늘에 와서는 언어의 이런 유연성이야말로 미국 팽창의 큰 비결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똑같은 영어를 쓰지 않고, 그것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 아래 기독교에 관해서도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 P232
토크빌은 기독교가 현대 사회에서 넓게 분포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가 상대적으로 이슬람교가 너무나 많은 일과 사소한 것까지 관여해서 신자가 지켜야 할 규약이 너무 많아졌고, 이것이 현대 생활과 강하게 충돌하여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선택하고 이슬람교를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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