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허남린 외 지음, 국립진주박물관 엮음 / 푸른역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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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5

 

정유재란은 분명 우리의 치욕적인 역사의 여러 줄기 중 그 의미가 남다른 한 줄기라는

점에 있어서는 틀림없는 사실이나 우리에게 있어 외침에 의한 능멸과 수치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평범한 전쟁

정도로만 인식되어 다각적인 연구나 깊이 있는 반성 없이 단순한 왜구들의 침탈수준

으로 이해되고, 전해져 내려오는 아픈 역사라는 것이 정유재란을 바라보는 현실적 시각

이 아닌가 생각하며 심지어는 개인적 생각으로 폄하되어 평가될 수 있지만 -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연장선상 위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세세히 알아도 좋고, 몰라도 그만

이라는 식으로 취급되고 있는 정유재란의 현주소이며 해당 전쟁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선 작품 제목만 보아도 나의 이런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께서 작품 제목을 처음 읽는 정유재란으로 제목을 선정하였는데,

이는 국민 대다수 혹은 역사를 연구하고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이 정유재란에 대해

기본적으로 어떤 시각을 갖고 있고, 평가해 왔는지를 작품 제목이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저자께서 자신의 작품 제목을 선정할 때 불특정 독자들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각과 수준을 염두에 두고 제목을 붙였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가 붙인 작품 제목처럼

처음 읽는 정유재란이 내포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

어떤 수준으로 정유재란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나만의

생각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부정의 답변이 나왔으면 좋겠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분로쿠(文祿), 게이초(慶長)의 전쟁()’으로칭한다고 하는데 왜구들이 왜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있는지는 나중에 더 알아 보도록 하고,

나는 작품인 정유재란의 내막에 집중해 보고 나름의 느낌을 여기에 기록해 보고자 한다.

 

정유재란을 들여다보면 역사학자나 학도는 아니지만 약간의 관심은 있다면 왜구들은 군웅이 할거하던 혼란스런 자국 정치상황으로 인해 막부 세력들간 대치 국면의

돌파구로서 조선과의 전쟁을 획책하게 되고, 이 전쟁을 통해 막부들의 힘을 다른 방향과 모습으로 전환시키려는 암중모색이 심도 있게 논의되는데, 전쟁을 통해 당초 자신들이 얻으려던 목표 외에도 조선으로부터 막부통치에 이용 가치가 있는 반대급부겸 국내 세력간 힘의 대치 국면을 끝낼 수 있는 뭔가를 얻어내 국내 정치에 십분활용하고자 했고 나아가서는 궁지에 몰린 연이은 전쟁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었던 전쟁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이 이 전쟁을 바라보는 정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위와 같은 명분을 충족시키기 위해 왜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그들의 야욕성을 그대로 들어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만인총코베기등으로 상징되는 살육과 신체 훼손, 약탈,

납치 등이 스스럼 없이 악날하게 자행되었던 전쟁으로 이전에 있었던 임진왜란과는 전쟁의 양상이 완전 다른 전쟁이었는데 당시 조선인들은 이유도 없이 수많은 양민들이 무참히 도륙되고 희생된 전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를 반증하는 또다른 증거가 바로 조선인 포로 숫자로서 임진왜란당시에 비해 10

정도 많았다는 점만 놓고 보아도 당시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본인의 잔인/잔혹성은 별다른 설명이 없더라도 옛날부터 그들 민족의 잠재적 DNA

  자리잡고 있어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가장 확실한 예로 2차 세계

  대전 당시 인간을 실험의 도구로 사용한 ‘731부대 운영난징 대학살등으로 표현

  되는 그들의 잔혹상은 나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다 -

 

전쟁 말기에 조선으로부터 철군의 명분을 찾던 일본은 조선에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 항복의 증거로 왕자의 일본 방문을 요구했고

전라도를 비롯한 남부지방 4개성을 일본에 할애하면 조선의 왕자를 현지 통치자로

    보내 다스리도록 하겠으며 

위 사실이 어렵다면 위의 조건에 상응하는 공물을 보내 일본에 사죄할 것

등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웃긴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전쟁은 자기들이 일으키고 전쟁에 대한 책임 내지는 배상을 요구하는 작태는 적반하장

극치를 달리고 있는 모양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조선은 일본에 사죄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기에 당시의 우리 위정자들은 일본과의 타협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대국인 명나라의 힘을 빌리면

왜적대한 복수가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한심스런 작태의 연속만 보여주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요구조건이 번번이 거절되고 계속 무응답으로 조선이

일관하자, 자신들이 제시한 화평조건에 조선이 굴복할 때까지 응징하라는 공격 지침을 시달, 한반도 이남 특히, 전라도 지역을 망신창이로 만드나 이에 맞선 조선은 정규군은 물론 임진년과 달리 의병의 존재가 미미해 상당히 곤욕을 치룰 수 밖에 없는 속수무책이었다.

전쟁발발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장수들에게 주인장(朱印狀)’이라는 명령서를 직접 하달하면서 일본의 전쟁에 관한 전략 방침을 내리고 있는데, 이 명령서에 전라도 전역에 대해서는 강력한 공격을, 충청도 등 전라도 외 지역에 대해선 가능한 한 공격하는 제한전을 명령하는데 이는 짧은 기간 동안 남부 지역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마친 후 뒤로 물러나 남해안 몇 곳에 왜구들의 성을 축성해 왜구의 일부 병력을 주둔시키고

나머지 군사는 일본으로 철군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도요토미가 죽고 전쟁의 명분을 잃으면서 철수와 동시에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에 반해 우리 조선은 당시 국제 정세 판단에 어두워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명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명나라의 정세 역시 날로 팽창하고 있던 청나라의 영향으로

일본의 침공에 대한 조선에 대한 안전망 구실을 조선의 의도대로 제공할 수 없는 상황

이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조선에서의 전쟁 지원이 곧 명나라 군비 증가로 연계돼 가득이나 어려운 국가 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듦과 동시에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 놓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부를 빠른 속도로 소모시키는 결과를 초래해 국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만다.

 

정유재란전반을 검토해 보면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치욕적인 임진왜란을

바로 몇 해 전 겪었으면서도 우리 선조들은 정말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적군을 앞에 두고 뭐가 진정한 적이지도 모른채 우리끼리 싸움만

하다 - 작금의 우리 정치 분위기와 사뭇 유사하다 -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있다가

정유재란터지고 나서야 외세(명나라)에만 매달리고 있는 처량한 존재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욱 암담함을 부채질한 것은 소위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는 놈들은 능력이 얼마나 부족하고, 우매했었는지를 그러면 다행인데 거기다 성질까지 지랄같았으며 전략적 부재 역시 심각해 초기 전투에서 얼마나 지리멸렬했는지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그나마 조선의 몇몇 장수가 아니었다면 왜구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가던 백척간

두의 조선이 그나마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유재란을 지금부터라도 단순히 커다란 전쟁의 연장선상으로 묶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폄하역사를 가벼이 보지 않도록 노력해야 우리의 조선은 선조들이 행했던 전철을 답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작금 우리의 정세는 어떠한가?

간단하게 요약해 이야기한다면 싸드국면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화웨이의 5G

문제와 '미중 무역마찰로 이어지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져나가려고 하는 위기에

봉착해 있는데 그 중간에서 여기도 붙지 못하고 저기로도 붙지 못하는 아주아주 애매

모호 하기가 그지 없는 포지셔닝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럴때 일수록 창의적 혜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이지만 꼭 어렵지만은 않은

그런 시기로 해답은 의외로 쉬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 답은

바로 우리 역사에서 얻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서애 유성룡 선생의 징비록과 과거 선조들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며 기록한 여러

문건들을 접하다 보면 또 중국에 연행사로 다녀온 선조들이 기록한 내용을 들추어

보면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는 사항은 우리의 살 길 내지는 우리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하던지 간에 북쪽의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남쪽의 인간들하고 소통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게 가장 좋은 길이라는 이야기를 연신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나는 아직도 이 점이 가장 궁금하며

본 작품을 손에서 놓는 그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내 뇌리에 남아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분석하고 썼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선조들은 그 옛날 후손들이 겪을 어려움을 헤아려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 주시고

계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우리의 위정자들은 하루 빨리 심사

숙고하여 선조들의 혜안에서 그 답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작품은 여러 학자들의 발표 논문을 엮은 관계로 단순한 정유재란과 관련된 정치사적

  이야기 중심이 아닌 주변 상황 즉 경제적, 국제적인 환경 등을 비롯한 정유재란

  당시 국내에 축조된 일본 왜성이야기 및 몇몇 전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나

  내가 작품을 선택한 목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내용으로 판단하여 여기서 논하는

  것은 제외하였고, 산업과 무역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다루고 있으나 전쟁의 본질과

  영향에 대해 공부하려는 나의 목표와는 다른 시각이기 때문에 여기서 제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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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이주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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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 7

 

작품을 잘 못 골라 괜히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지만 작품을 다 읽은 지금은 절대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그냥 역사를 즐겨 읽는 애사가(愛史家)’일 뿐이다. 하지만 해당 작품을 읽다 보니

그냥 역사를 좋아해서만 될 일이 아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고 좀 힘들더라도 역사를

자주 접하려는 노력을 기우림과 동시에 이왕이면 좀 더 시간을 할애해 내가 그동안

알고 있고 배웠던 내용과 상반되는 내용이 존재하는지를 확인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역사를 바르게 보려는 노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품은 조선의 왕세자로서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과정을 기록한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진정으로 당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해 어떤 개인적

감정에 치우침 없이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였느냐 하는 것과 율곡 이이 선생께서 주창

하시고 강조하셨던 십만 양병설이 실제 존재한 말씀이냐는 것에 대한 진위 여부

따지고 있는 논쟁을 기반으로 우리 역사학계의 문제점과 각종 학설을 좌지우지하는

단체와 개인의 편향된 역사관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아래 언급하겠지만 나만의 경우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그런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역사 작품을 읽다보면 조선 역사 속에 주자학’, ‘북벌’,‘송시열’, ‘식민사관’, ‘노론

사관을 뜻하는 단어가 태평성대한 시절이나 나라가 혼미한 상태나 부지불식간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정말 짜증스러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어 역사를 사랑하고 역사서를

조금 읽은 사람이라면 그런 단어로 인해 답답한 심정을 이루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을

것인데 작품을 통해 그 이유가 되는 단초를 확인할 수 있어 그동안 그런 단어들로 인해

책을 읽을 당시 나의 갑갑한 심정을 치료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노론 사관이니 식민 사관이라는 해당 단어를 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해 왔던 게 사실이었지만 작품을 통해 이제는 그런 단어가 다르게 다가왔음은

물론이고 앞으로는 좀 더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고, 느끼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그런 귀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 이성무 선생의 주장에 절대 동의하는 바이며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개인적 시간 투자에 의한 역사 공부도 하지 않고 학교에서 배운 설익은 역사 지식으로

우리 역사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내뱉는 설익은 지식으로 인해 자칫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낮은 수준의 인간들로 인해 폄하되어 자학적 역사관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또

누구든지 역사와 관련된 기본적인 학습 없이, 피상적인 역사 지식으로 친구따라 강남 가듯 우리의 역사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 속에 나와 있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여러 주장 중 가장 내 생각과 일치

하는 몇가지 주장내지는 설()을 추려보면

 

1) 신영복 선생은 역사는 다시 쓰는 현대사라는 관점이 중요하며 지엽말단의 사실을

   아는 것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위한 부부일 뿐이다.

   무엇이든 본질, 핵심이 중요하다.(P 134)

 

2) 비주류의 시각을 통해 주류의 해석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검증하면 새로운 차원의

   감동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주류 역사학자들의 연구가 얼마나 왜곡되고

   피상적인드러내고 과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현재에 대한 통찰을 추구해야

   한다.

   조선시대 주변 문화에 대한 관심은 지금 현실의 소외된 계층, 민초의 삶과 가치를

   밝히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과거에 이러저러했다는 사실의 나열

   과 왜곡된 역사관은 대중의 엄격한 검증에 의해 걸러질 것이다.

   지배층의 관점을 넘어 시대적 맥락을 백성의 시각에서 꿰뚫어야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이야기는 사물과 사건의 핵심을 부각한다.(P 150)

3) 주자학(朱子學)을 유일사상으로 보는 닫힌 세계관 때문에 나는 노론을 비판적으로

   본다. 지식인은 공동체가 처한 삶의 고통과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해 대중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P 156)

 

4) 일제는 19108월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그해 1076명의 한국인에게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내준다. 76명의 수혜자를 분석해 보면,

   하나는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등 모두 왕실 인사이고 윤택영은 순종 비

   윤씨의 친정 아버지,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다.

   둘째는 노론 일색이라는 것이다.

   76명 중 당파색을 알 수 있는 65명의 당적을 분석해 보면 남인은 없고, 북인이 2,

   소론이 6, 나머지 57명 모두가 노론이다.(P 157)

      

5) 일제는 식민 지배를 위해 조선의 붕당정치를 당쟁으로 격하라고 나라가 망한

   원인을 거기서 찾았다.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것이다.(P 268)

 

6) 조선 후기 200년간의 당쟁을 한국사 전체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실상 나라가

   망할 때는 당쟁이 아니라 몇몇 노론 척신 가문의 일당 독재가 시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당쟁의 배경이 되는 사림 정치의 틀이 살아 있어서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

   졌다라면 난국 타개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세도정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 곧 조선시대의

   정치 형태인 양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만약 그렇다면 조선왕조는 벌써 망했어야

   했다. 조선왕조가 500년 이나 지속된 까닭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200722- (P 300)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저자께서 작품에서 반박하고 있는 대상 인물되시는 분들이

그렇게 형편 없고, 역사학자가 아닌 이야기꾼도 못 되는 인물이 지어낸 소설같은

이야기라고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이덕일 선생이 집필하신 작품

누가 왕을 죽였는가?’, 사도세자의 고백’, 거칠 것이 없어라’, 조선의 왕을

말하다1,2’, 조선 왕 독살 사건’, 윤휴와 침묵의 제국’,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세상을 바꾼 여인들’, 왕과 나이덕일의 역사 평설 근대를 말하다’, 조선

이 버린 천재들을 모두 읽은 역사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작품을 모두 읽어보니 이덕일 선생의 반대론자들이 외치고 있는 나는 이덕일 선생과

전혀 일면식도, 피붙이도, 그 분 밑에서 공부를 배우지도 않은 엄연한 제3자다

어줍짢은 실력과 허술한 조사로 만든 작품이라고 강변하시는 점에 대해 저는 적극적으

로 동의할 수 없음을 우선 이야기드립니다.

 

그 이유는 각 작품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이 덕일 선생이 어줍잖은 실력으로 그런 여러

권의 작품을 썼을리도 만무하겠지만 만약 그렇게 했더라도 그 많은 작품 속에 나오는 각종 사실과 여러 이야기를 부실한 조사로 지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

입니다.

따라서 저자께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던지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신

이덕일 선생에게 자신들의 관점만이 올바르다고 외치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 대해

거품을 물어 가면서까지 장황한 이야기로 몰아붙이지 않아도 역사를 사랑하는 독자

이고 국민들이라면 저자의 주장에 크게 공감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뭐라 떠들던 간에 그냥 냅두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조만간 자신만의 시각이 맞다고 외치는 그런 학계나 단체도 전부 물갈이가 되면 자연

새로운 시각이 또 등장하면 저자의 주장과 작품이 새롭게 조명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좀 불편하더라도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소 잡는데 쓸 도구를 닭 잡는데 써야 되겠습니까?

 

참고로 책방과 인터넷에서 역사와 관련된 읽을거리를 찾다가 저자께서 저급하다고

크게 일갈하신 여러분의 작품이 눈에 들어오길래 얼른 내려놓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음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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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평전 - 시대를 거역한 격정과 파란의 생애
허경진 지음 / 돌베개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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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을 읽고 내가 당초에 작품으로부터 얻으려고 의도했던 결론내지는 의미에 접근

하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많이 남아 결말 부분만 세 번 다시 완독했다.

나도 허균 선생이 역적이 아니고 시대의 희생양(?)이자 당파 싸움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열심히 작품을 뒤적여 보았지만 솔직히 뭐라 딱히 역적이다,

아니다라고 선뜻 말하기가 뭐해서 추후 시간을 갖고 더 공부를 해 볼까하는 생각을

굳히는 선에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게 되었다.

 

작품은 허균 선생의 작품과 또 그분의 행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품을 전개

하고 있는데, 인간 허균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증거보다는 저자의 주관점 관점이 강하

게 전개 내가 느끼기기에 그렇다는 이야기다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정확한 사실

만을 알고자 했던 나의 기대를 살짝 벗어난 느낌이 든 작품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허균 선생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분과 관련된 작품 내지는 그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여러 증거들이 함께 폐기된 관계로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일부 작품과 다른 역사

기록물에 언급된 내용을 근거로 작가의 창의적인 전개가 일반작품보다는 상당히 많은

분량 과거에 읽었던 작품 황진이에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 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자의 주장에 선뜻 동의를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허균 선생은 홍길동전을 통해 잘못된 사회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기우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부분과 허균 선생의 스승과 관련된 이야기와 그분이 저술했다는 호민론

(豪民論)‘, ’유재론(遺才論)‘ 등을 거명하며 서얼 차별철폐를 주장하고 민중봉기를 경고

했다고 하는데 나의 상식으로는 그런 행동이나 글을 함부로 세상을 향해 함부로 밝혔을

경우 당시 사회 구조상 큰 파급력을 줄 수 있어 자칫 극형에 가까운 형벌을 받을 것이

확실함에도 저자의 주장은 소설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 그분은 자유주의자였고 민초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꿔온 이상주의자였다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참고로 허균 선생이 그렇게 타파하고 싶어했던 서얼제도는 태종 때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라는 인물이 서자에게는 벼슬길을 막자고 아뢰어 서얼금고(庶孽禁錮)

제도화된 뒤부터 서얼의 벼슬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허균은 성리학이 지배하던 유교 사회의 가치관과 맞지 않는 자신만

독특한 행동으로 자주 벼슬에서 쫒겨났으나 그때마다 이조판서까지 지낸 큰형(허성)

뒷배경과 아버지 초당과 허균 삼형제의 능력을 인정한 선조를 비롯한 어린시절부터

돈독한 우정을 나눈 친구들의 도움으로 벼슬자리를 쉽게 되찾았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 직후에 허균은 암행어사 장계에 의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었고 천추사로

임명되었다가 사퇴 후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했고, 과거 시험의 채점관이 되었다가 시험부정 채점의 책임을 지고 귀향가기도 했으며 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큰형

허성이 세상을 떠나고 임금도 자신을 더 이상 신임하지 않음을 알게 되자 그는 정권의

핵심에 의도적으로 접근, 명분이 약했던 대북파 정권에서 자기 같은 문장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간파하고 당시 정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이이첨에게 접근한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위리안치되고, 부원군 김제남이 처형당하자 광해군과

이이첨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는 쪽으로 여론을 몰아가는데,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법적인 어머니였으므로 를 가장 큰 덕목으로 내세우던

당시 상황에서 임금이 앞장서 조선 근간의 윤리원칙에 반하는 여론을 이끌 수 없었기에

이이첨이 후원하는 유생들이 동원하여 집단적으로 폐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도록

조장하나 광해군은 외견상으로는 그들을 무마하는 척한다.

이를 무리없이 진척시키기 위해 설득력 있는 폐비 상소문이 필요했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허균이 선조와 이이첨에게는 필요했지만 끝내는 이이첨의 모략과 선조의

신임이 끝나면서 역모로 몰려 죽음에 이르게 된다

 

역모로 인한 죽음의 과정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면

이이첨은 권모술수에 능해 대북파 정권의 배후 실력자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손녀딸이

세자빈이 되어 광해군 이후까지도 정권이 보장되는 실권자이기는 했지만 사림의 존경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그가 인목대비곁에 있는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눈에 가시처럼 여겨 온갖

계책으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획책할 무렵, 허균에 대한 상소가 기준격에 의해 제기

되자 폐비를 주창하던 허균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동안 준비해 왔던 폐비론까지 물거품이 될 것을 우려한 선조는 허균을 치죄하기를 주저하게 되는데,

한 때 같은 배를 탓던 이이첨은 허균의 역적 행실이 자신에게까지 미칠 것을 우려해 또

허균의 딸이 자신의 손녀가 동궁빈임에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이 간택되어 세자의 후궁으로 간택되자 성균관의 후배이자 정치적 동맹인 허균의 위상이 높아짐에 위협을 느껴 허균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심복들을 움직이지만 뚜렷한 계기를 찾지 못한다. 그러던 중 허균의 측근 박응서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이첨이 주도해

허균가담한 역모로 판을 키우려 하나 제대로 허균을 엮지는 못한다.(계축옥사)

다급함을 느낀 허균이 기획하고 의식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실행에 옮긴 별도의 모사사건(경운궁 투서사건, 남대문 벽서사건)의 심복 허인준이 잡혀 들어가 취조를 당하며

허균이 연루된 사건임이 밝혀지게 된다.

 

추국청에서는 주변인들의 진술만 갖고 대질 심문 없이 허균을 처리하자고 하나 광해

군은 역적의 괴수인 허균은 심문하지도 않고 서둘러 죽이려는 이이첨 일당에 대해 불신을 하게 되고 역적 모의 관련자까지 캐보고 싶었으나 이이첨은 허균이 혹시라도 자기를 끌고 들어갈까봐 그런 기회를 원천 봉쇄하는 한편, 감옥에 있던 허균을 찾아가 허균의 입을 막기 위해 조금만 참으면 풀려날 것이다라고 허균을 달래는 등 이중 플레이를 한다.

 

이이첨의 간계로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의 역모와 관련된 이의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처형이 집행된다.

처형된 후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역적이 일어나면 엄히 국문하여 모든 것을 바로 캐어묻고, 하나도 숨김이 없는 뒤에

결안을 작성하여 형을 집행하는 것이 국가 고금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는

그렇지가 못해서 몇몇 적들의 입에서 역모의 자백이 나오긴 했지만 허균 본인에겐

한마디도 묻지 않았으며 매 한 대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남은 무리에게서라도 제대로 역모의 진상을 파악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하고 있다.

 

허균의 동지들은 짧은 기간동안 여러 사람들이 잡혀들어가 심문을 받아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한 자도 있으나 대다수는 끝내 자백하지 않고 매 맞고 죽은 자도 많았다고 하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모두 누명을 벗었지만 허균에게는 당시

주어졌던 역적이라는 이름이 늘 붙어다니고 있다.

여하튼 허균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를 새로운 이념으로 개혁하려고 노력했었던 인물로 지배층에게는 허균이 경박한 패륜아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민중들에게는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새로운 지도자로 보았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계시다. - 나보다 아는 지식이 더 많은 분이 그렇게 외치니 일단은 수긍할 수 밖에 없다

 

[허균의 시대적 환경]

- 성종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을 등용하려던 시기이며

  또한 여러 사화가 난무하던 시기로 각각의 사화 원인은 달랐지만 비판적인 사람진출

  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들의 반발이 있었다.

  , 사림의 관점에서 보면 사화는 부패한 특권 보수층에 대한 진보 세력의 끝없는

  도전이자 실패였고 수난의 시대였다.

 

[허균의 성장환경]

- 156911월에 초당 허엽의 막내로 출생, 아버지 초당은 첫 번째 아내와는 아들 하나

  (허성)와 딸 둘을 두었고, 두 번째 아내에게 아들 둘(, )과 딸 하나(난설헌)를 얻음

- 12살에 부친을 여의고 어린 시절은 형들로부터 교육을 받던 중 천재 시인으로 이름난

  손곡(蓀谷) 이달(李達)을 스승을 만난다. 그는 기생의 서얼로 태어난 신분이었지만

  허씨 집안에서 그를 스승으로 받아주었는데 서자도 아닌 그가 홍길동전을 짓게

  된 것은 스승인 이달이 개인적으로 평생 느꼈던 한을 사회 문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 허균은 어린 나이에 엄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형들의 사랑을 받고 자란 관계로

  버릇이 없었지만 김씨를 아내로 맞으면서부터 마음에 안정을 얻고 글공부에 전념하나

  그 아내를 임진난 통에 잃는다.

-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길에 천주교의 교리와 서적을 들여왔고 성리학이 대세를

  이루던 당시 상황에서 불교를 믿었는데 당시의 기득권들은 그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가는 조선 사회의 근간인 성리학 사상이 무너질 것을 심히 우려했다고 한다.

- 특이한 점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행동을 했는데 기생들과

  대놓고 놀러 다닌다거나 상중에 음주 가무를 하는 등 당시 통념으로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자주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고 한다

 

[허 성, 허 봉 형들과 누이 난설헌]

- 형들의 공통점은 국제정세에 밝았던 인물들로 특히, 허 성은 동인이었지만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파견되어 당파에 휘둘리지 않고 일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해 선조

  에게 보고하는 등 심지가 굳었던 인물이라고 하며,

  작은형 허 봉은 중국통으로 그가 기록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연행(燕行)일기이며, 선조가 자신의 친할머니(명종 후궁 안빈)의 사당을 대궐에 봉안

  하려 하자 첩의 사당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였고, 그가 경기도 순무어사로 재직

  당시 군기가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보고는 관련 부사의 파면과 함께 병조판서 이이를

  탄핵할 것을 상소하는 등 충직한 인물이었지만 이이를 절대 신임하고 있던 선조의

  미움을 받아 관련자들과 유배되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추후 복권은 되지만 선조의 미움으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 한 채 죽음을 맞는다.

  허균 본인 역시 중국통으로 중국에 다녀올 적마다 중국으로부터 여러 문물을 들여와  

  국내에서 사익을 노렸던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선진 서적과 신문물을 들여오는 등

  선진학문 전파와 국민 편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 그의 누이 난설헌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과 혼인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버림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으며 정을 붙이고 살던 아이들과 뱃속의 아이마저 잃는 등

  기구한 인생을 살다 죽는다.

 

[임진왜란 당시 권력 지도부의 상황]

- 왜란을 피해 북으로 피신한 선조는 아들 임해군순화군을 함경도 쪽으로 파견

  하나 성질이 사나웠고 그의 하인들 역시 성질이 사나워 전쟁 중임에도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고을 수령들에게 금품을 강요하는 등의 패악질이 심하여 회령부의

  아전인 국경인이 두 왕자와 여러 원로대신 그리고 고을의 부사와 그의 가속들까지

  묶어서 적에게 넘겼음은 물론이고 왜적이 임명하는 벼슬을 받고 적을 위해 성을 지켜

  주는 반역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 허균이 외친 호민론(豪民論)]

-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 뿐이다. 평소에 위에서 시티는 대로 따르는

  항민(恒民), 불만을 느끼기는 하지만 힘이 없어서 원망이나 하는 원민(怨民), 다른

  마음을 품고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엿보다가 때를 만나면 자기의 소원을 풀어보려는

  호민(豪民)이 중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호민이다 

-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한

  사명을 잊게 되면 나라가 망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경고하였고. 

- 임금이 백성을 기르지 않고 위에 앉아서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

  하며 견휜이나 궁예가 신라를 무너뜨린 호민이었던 것처럼, 조선왕조를 무너뜨릴

  호민으로 홍길동을 내세운 것이다.

  

작품에서 얻은 지식


- 내자시란 :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 간장, 기름, , 채소, 과일 등을 맡아보는 곳

- 예문관 : 임금의 칙령이나 교명을 기록하는 곳

- 중시(重試)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계속 격려하는 뜻에서 특별히 실시하는 시험

- 사예 : 간추려내는 것을 산(, 깍을 산)이라 한다.

- 문장에서 잘못된 글자나 쓸데없는 글자를 깍아내리는 것, 또는 많은 작품 가운데 잘

  된 것만 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 칠비)는 작품의 마감이나 배경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고,

()은 어느 한 구절의 미감을 논하는 것이다.

- 시참(詩讖)이란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는 일

- 광해군의 처남인 문창대감 유희분은 평판이 아주 안좋았다.

- 승무원 : 외교 문서 담당 

- 중국 최초의 세계 지도는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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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들의 책사 - 조선시대 편
신연우.신영란 지음 / 생각하는백성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3

작품은 13분의 왕과 함께 국사를 논했던(?) 충신 혹은 악인들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다.

[태조 : 정도전과 정몽주], [태종 : 하륜과 이숙번], [세종 : 황희와 맹사성], [세조 : 한명회

와 신숙주], [성종 : 김종직], [중종 : 조광조], [명종 : 문정왕후와 정난정], [선조 : 이이],

[인조 : 최명길과 소현세자], [영조 : 박문수], [정조 : 홍국영과 채제공], [순조 : 정순왕후]

[고종 :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작품에서 언급된 개개인에 대한 업적 및 일부 이상한 인간들의 악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정리하게 되면 아마도 개인당 하루 정도의 시간을 주어도 다 정리가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중 세 분과 관련된 잘 몰랐던 사실과 이면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정리하고자 한다.

 

   1. 두문불출(杜門不出)과 황희정승(黃喜政丞)

 

고려가 무너지고 이씨조선이 건국되는데 고려의 많은 유생들은 이신벌군(以臣伐君,

신하가 임금을 치다)'에 분개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길수는

없다)’정절을 내세우며 고향을 등진다.

이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모여서 일체 외부로 나오지 않고

살았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이성계는 인재를 널리 모집하지만 인재다운 인재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그 연유를 확인해 본 결과, 인재라고 여겨지는 인물들 대개가 전부

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많은 대신

들를 보냈으나 끝내 그들이 두문동에서 나오지 않자 태조는 산에 불을 지르고 두문동을 불태워 버린다고 겁박하지만 그들은 내려오길 거부하고 불에 타 숨지고 만다.

그 때 숨진 유생들이 72명이라 하여 "두문동 72"이란 말이 생겨난다.

당시 많은 선비들은 두문동의 인재들처럼 은거함에 따라 '두문동'이라는 이름은

은거의 상징이 되었고 두문동이라 칭하는 곳이 나라 안 여러 곳에 생겨났으며 이후 집

밖에 나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이성계는 모든 정성을 다해 회유하고 설득하였으나 끝까지 두문불출한 개성 유생들에게 배신감을 느껴 향후 100년간 개성

유생은 과거를 못보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개성 유생들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하게

되었으며 이들이 훗날 그 유명한 "개성상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황희(黃喜)라는 유생도 고려가 멸망하자 처음에는 두문동에 은둔하며 지냈는데

자신들의 이런 행동을 누군가 살아남아서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내부 논의 끝에 두문동

동료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두문동에서 나왔으며 야인생활을 하던 황희는 동료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벼슬길에 올랐는데 태종때부터 세종, 문종까지

3대에 걸쳐 왕들을 보좌하는 명재상이 된다.

그는 좌천 2, 파직 3, 귀양살이 4년이나 되었던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세상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질시 속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태종이 등극한 후 형조, 예조, 병조, 이조 의 정랑을

거쳐 도승지의 전신인 지신사가 된 43세경부터 자기 소신을 펼치기 시작 했고 그 후

공조, 병조, 예조,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태종과 함께한 18년 다시 세종과 함께한

27,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18년이나 하면서 <경세육전>,<국조오례>등을

편찬하여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내치에 힘써 태평성세를 이룩함으로써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등 위업을 달성할수 있게 하였다.

세종 31(1449) 87세에 60여 년간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는데 3년 후 90세로 한양의 석정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세종대왕이 문병왔는데 재상을 20년 넘게 지낸 90세 노인이 초가

삼칸집 멍석자리 위에 누워있어 이를 본 세종대왕이 깜짝 놀라 이럴수가 있느냐고 하자

그는 태연하게

늙은사람 등 긁는 데는 멍석자리가 십상입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정도에게 들려줄 이야기이지만 오늘을 사는 소위 말하는 리더들은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2. 맹사성(孟思誠)

조선 초기의 문신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조선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후세인들은 맹고불이라 하면 검은 소 등에 앉아 피리를 불고 있는 노인을 연상할

정도로 친근한 존재였다.

성격이 소탈했던 그는 외출할 때면 소 타기를 즐겼고 손수 악기를 만들어 연주했다.

집에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다해 맞이했으며, 손님에게는

반드시 상석을 내줄 정도로 겸손했다. 실록에서는 그를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서 조정의 큰일이나 관직에서 일을 처리할 때 과감하게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황희는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이 전해지지만 맹사성은 상대적으로 그 업적이

확실하게 기록되지 않았고, 야사를 통해 청백리로서의 소박한 삶과 진솔한 인품만이

부각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음률에 대한 지식과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강호사시가통한 문학적 재능은 성군 세종이 그를 왜 중용했는지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는 공민왕 9맹희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실렸을 정도의 효자라고 한다.

그는 정몽주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27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쳤지만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고려를 사수하려던 최영의 사돈이었던 그의 집안에 모진 풍파가 몰려왔고 할아버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일원으로 은거하다 불타 죽었고, 함께 두문동에 머물던 아버지(맹희도)는 충청도로 도망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그는 곧 세상의 변화를 인정하고 아산에 있는 최영의 집에 금곡서원을 세워

유학전파에 몰두하는 한편 아들 맹사성에게 출사를 종용한다.              

 

그는 원칙주의자인 허조와 일벌레 황희사이에서 원만하게 사안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수많은 인재들이 등장하여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과학입국의 미래를 다져

나가던 그 시기에 신료들의 개성과 자율 속에서 드러내기 쉬운 아집과 독선을 조율해주는 따뜻한 존재였다.

세종은 즉위 이후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황희와 맹사성, 윤회 등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나누어 담당하게 했다. 성격이 분명하고 강직한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부드럽고 섬세한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사교성이 뛰어난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다.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시켰다.

맹사성은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에 종사했고 평생 임금의 뜻에 따라 조용히 소임을 다했지만 마냥 예스맨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이 말년에 소헌왕후와 영응대군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려 하자 조선이 유교 국가임을 내세우며 신료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지만 세종이

권도를 내세우며 완강하게 내불당 건립을 밀어붙이자 임금의 친위세력이던 집현전

학사들까지 끌어들여 맞섰던 인물이다.

 

세종은 우의정 맹사성에게 예악의 정비를 총괄하게 하여 세종 12년에는 제사 아악보와

조회 아악보를 완성하는 등 각종 악보를 만듦으로써 조선의 공식의례음악을 완성시켰다. 또한 세종은 아악의 정리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정확하게 연주할 우리의 악기 제작을 독려한 결과 1423(세종 5) 정양과 남급의 노력에 힘입어 금, , 대쟁, , 봉소 등의 악기가 만들어졌다.

이듬해에는 화, , 피리, ,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도 완성되었다.

세종대에 여진족으로 인해 국경이 혼란스럽자 맹사성으로 하여금 정벌 작전을 주도적

으로 기획하도록 했다. 최윤덕을 중심으로 한 정벌을 완수한다.

맹사성은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지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격했는데 일찍이 김종서의 자질을 알아본 그는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따져 묻고,

방종을 경계함으로써 북방의 사자로 조련시켰으며 이후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해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정승으로 추천하기까지 했다.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향리 온양에서 노후를 보냈다. 청백리답게

말년은 소박했다. 바깥 출입은 언제나처럼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고, 식량은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람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3. 최명길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병조좌랑으로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 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며 그후 이조

참판,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인조 5) 정묘호란 때, 국력의 나약함에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후금과의 강화를

역설하여 화의를 성립시키나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는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할 즈음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지만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가 높아지는데 그는 당장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면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니 원망을

불러 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한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밖에 없다고 강화론을 계속 펼친다.

이 해 겨울 이조판서가 되어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지만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한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 할 정도로 사리명분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청군이 물러간 뒤,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기우리며 한편 청나라에 사신으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지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곤욕을 치르는 등 책임을 스스로 다하다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지천집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내가 후손들이 오늘도 우러러보는 여러 분의 책사들을 작품이 소개했음에도 굳이 세 분만 여기에

옮겼는지 우리의 위정자들께서는 깊이 숙고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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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사람 공부 - 우리 시대의 언어로 다시 공부하는 삶의 의미, 사람의 도리
이황 지음, 이광호 옮김 / 홍익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추천권유도 : 3.

     

속았다!’라는 말로 작품의 소회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작품을 선정한 보람을 절대 찾을 수 없다는 느낌에 하도 억울해서 두 번씩이나 진짜

숙독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 이 산이 아닌가봐!’였다.

작품을 소개한 출판사의 승리라는 것이다.

퇴계선생이 던져준 무게와 작품 제목이 던져주는 기대감으로 인해 아무 조건없이

작품을 선정해 읽었는데.....아무 것도 건진 게 없다.

 

작품은 시종일과 도연명<거처를 옮기며>, <술을 마시며>라는 시를 읽은 뒤

거기에 화답(?)하거나 그 시를 응용해 퇴계선생이 만든 시를 올려놓고 평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퇴계의 시가 어떠하다느니, 내용이 본받을만 하다느니, 이시는 이런 이유로

만들어졌다느니 사람공부와 전혀 관계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작품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해당 시를 읽어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자괴감을 들게하고 있었고 심지어 <시경>

과 퇴계의 <고경중마방>, <도산잡명>, <우산장> 등과 같은 듣도보도 못한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퇴계의 사상이 어떠하다느니 사람보는 안목이 달랐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어이 상실 그 자체다.

  

또 소제목 진리를 기르는 암자에서라는 단원에서 이야기되는 사항은 거의 퇴계

가족사, 고향, 뜬금없는 고려때 은인 이자현에 대한 이야기로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데

한마디로 이 작품은 출처모를 시 해설서나 기행문에 가까운 작품집이지 퇴계선생의

관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사람 공부에 대한 작품은 아니라고 단언하고 싶다.

긴 이야기해봐야 내 손가락만 아플 것 같다.

 

그래도 뭔가 느낀 게 있을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학교에 대한 이야기와 임금에게 올리

여섯가지 제언정도 외에는 참고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재미난 사실은 퇴계의 애제자 중 한 명으로 임진왜란과 관련된 허위보고(?)를 한

김성일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고매하고 덕망이 높으신 퇴계 선생 밑에서 배운 제자가 허위보고를 하는 인물이

나온 걸 보면 퇴계 선생도 사람보는 안목은 그리 높지 않았던가 아니면 제자를 잘못

길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여하튼 사람공부는 쉽지 않은 분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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