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복음 - 로마서 김양재 목사의 큐티노트 로마서 1
김양재 지음 / 두란노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5

 

지난 2012년 저자의 복 있는 사람’(두란노 출판사)이라는 작품을 읽고 아래와 같이 기록한

사실이 있다.

 

기독교 서적을 읽다 보면 불신자들을 주님 곁으로 인도하기 위한 말씀을 전해주는 데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는 자는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거의 협박 수준의 말씀을 강조하는 내용이 있는 반면,

과거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르나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실천하면 복된 영생을

얻을 것이리라는 충고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전자의 경우와도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비 신자들

에게 자칫 위화감 내지는 공포감을 조성해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

나는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한 번쯤 경험했을 '고난'

혹은 '역경'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던져서 '원죄'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인간들이어서 회개하고

주님의 품 안으로 빨리 들어오기를 간곡히 권유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나뿐만이 아니라 웬만한

교인이라면 선호하는 전도 방식으로 아주 거부감 없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유의 말씀이 아닌가 생각한다.”

 

본 작품을 읽으면 저자의 이야기 패턴은 거의 비슷하다.

다시 이야기해 저자의 관점 내지는 주장하시는 내용은 거의 내가 위에서 언급한 사항 중 전자에

가깝다. 기독교 신자인 내가 읽어도 거북하고 신경에 거슬리는데 비신자 혹은 가뜩이나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세태를 반추해 봐도 그리 환영할 만한 전도의 방식 혹은 아름다운 사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나만의 생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비신자들과 육욕에 찌든 남자들 저자의 관점 을 바라보고 인도

했으면 한다.

특히 짧게 끝난 저자의 결혼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작품을 통해 잘 알고 있기는 하나 비신자들

특히 남성들을 거의 동물 수준으로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솔직히 짜증에 짜증이 더

뿐이다.

앞으로 이미 구매한 본 작품인 절대 순종을 포함해 그 어떤 작품이라도 이 분 작품은 읽지

않기로 굳게 마음 먹었다. 나도 남자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고 느끼고 나를 더욱 생각하게 한 문구만 정리해 보았다.

      

- ‘바울이라는 이름은 헬라어 파울로스(paulos, 작은자)에서 온 말로, 어원인 paulos어근인

  파우어에는 포기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사울의 뜻은 희망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라는 뜻이 있다.

  바울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첫째 근거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이다.

- ‘사도아포리톨로스라고 하는데, 부름심을 받은 자, 보냄 받은 자를 의미한다.

- ‘유앙겔리온(기쁜 소식)이 복음의 어원이다.

- 올바른 가치관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성공을 해도 자기 상처로 다른 사람을 상처 주게

  되어 있다.

-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죄를 알아야 한다. 내 죄를 깨닫고

  나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때문에 무엇을 하든 영혼 구원이 목적이 된다.

- 내 삶에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던 것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확실해지는 게 복음이다.

- 하나님이 나에게 힘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나를 통해 이루실 역사가 크기 때문이다.

- 밉지만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나의 상한 마음을 바뀌 주신다.

  미운 너보다 너를 미워하는 나의 죄를 회개하게 하신다.

-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곧 자신이 복을 받는 비결이다.

- 복음의 능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능력이다.

-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고 방법이다.

- 하나님은 의롭고 옳으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세력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이 택하신

  나를 지키신다.

-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백이 있다. 이것은 어떤 피조물로도 채워질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채워질 수 있다.(파스칼)

- ’가득한죄를 짓느라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마음을 온통 빼앗기는 것이 상실이고, 실성이다.

  ’불의는 하나님은 틀렸고 내가 옳다고 하는 것이며, ’추악은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고,

  ’탐욕은 필요 이상의 욕망이며 악의는 악한 마음이다. 사기는 하나님 없는 지혜로 간교

  하다는 뜻이다.

- 진노의 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을 통해 내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이 최고의 축복이다.

-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담당하신 우리의 죄가 얼마나 참혹한지

  를 보여주는 것이다.

-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판단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다.

-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그럴 때 죄를

  분별하는 지혜가 생긴다.

- 역할에 의한 책임은 상대적이고, 지위로 인한 특권은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죄인인

  인간의 특징이다.

-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모든 사회의 관계 속에서 만족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역할과 지위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 신앙의 기준은 열심히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보는가 못 보는 가에 달렸다.

- 악의 본질은 자신의 죄와 불완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고난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다.

- 이웃은 정죄와 비난의 대상이 아니고 자기를 조라고 하나님이 주신 거울이다.

- 오직 소망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 죄 문제가 심각한 것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남의 죄만 보고 내 죄는 못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욕망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것은 말씀하신

  대로 꼭 이루시는 분입니다.

- 믿는 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평을 누리는 특권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화평은 이루는 것이 아닌 누리는 것이다.

-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 갈 일이 우리의 삶에 쉬지 않고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면 결론은 순종과 충성입니다.

- 죄는 교만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가면을 쓰게 하고,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죄를 것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며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죄를 깨닫기가 어렵다.

-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내가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려는 뜻이다.

- 육신은 죄의 도구이고, 죄는 율법을 통해 드러나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 선함에서 선함을 이끌어 내려 하지 말고 악한 것,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께

  로 돌아오는 선함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 선악과의 용도는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 ’탄식을 원어로 보면 해산의 고통이다. 피조물과 인간과 하나님의 탄식을 들으며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숙제이다.

- 미국인들이 쓰는 험한 용어 중 갓 뎀(God damn)’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성령이 너를

  떠난다라는 뜻이다.

- ‘환난을 원어로 보면 트리볼룸이라고 하는 데 이는 로마 시대에 쓰던 타작기를 뚯하는

  단어이다. 우리말로 하면 도리깨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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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사랑이 이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인 복음에 관하여
마크 갤리 지음, 김명희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5

 

작품은 사랑이 이긴다(랍벨, 포에이마)’라는 작품에서 언급된 내용에 대한 저자의 종교적 반론

내지는 자기만의 관점으로 해석한 의견을 다룬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 혹은 한

개인의 주장론쯤으로 여겨도 무방할 것 같다고 본다.

, ‘사랑이 이긴다보다 하나님이 이긴다는 화두를 놓고 치열한 반박과 성경적 지식의 토대

위에서 형성된 저자의 자기 주장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런 신앙서를 놓고 비평을 한다는 것은

자칫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어 저자가 각 소주제별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정리

하는 것으로 독후감을 대신하고자 한다.

   

 

[도입부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들]

-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보아라.(38: 2~3)(P 10)

- 지옥은 끔찍하지만 악은 아니다. 지옥은 악이 처벌을 받는 곳이다.(P 11)

-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방식이 있다. 우리의 임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호의적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도록 돕는 것이다.(P 14)

- 사랑과 정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이다.(P 14)

-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우실 수 있고 또 메우실 것이다. 우리의 교리

  수정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통해서.(P 14)

  

[정말 중요한 질문]

-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징을 구한다.(16:4) 그것은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다.

- 우리는 질문을 하려 할 때 회개와 겸손에 기초한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처럼(P 33)

- 우리가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쾌락을

  누리는 데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하기 전에바른 마음으로 질문

  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움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현명하다.(P 34)

- 비록 더디더라도 그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2:2~3)

-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자비로움이나 정의를 의심하는 질문들을 받으실 때 거의 대답

  하지 않으려 하신다.(P 42)

- 십자가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우리를 대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그 모든 질문을

  하신.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은? 침묵이다.(P 43)

-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시는 그 순간, 진정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다른 질문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셨다.

  너는 너를 위해 죽을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느냐?”(P 43)

  

 

[이 하나님은 누구신가?]

- 우리는 종종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혹은 예수님을 편안한 마음으로 거부하기 위해 그저

  예수님을 이용한다.(P 47)

-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는, 그토록 죄를 경멸하셔서 그 죄의 악함 때문에 그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다.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다.

  진리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다.(P 49)

-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 결과로 인해 주어진 좋은 소식은, 우리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P 52)

-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과 사랑을 영원토록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셨다.(P 54)

-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이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 혹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으로 생각한다.(P 57)

-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란 삼위일체의 삶 자체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P 63)

-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우리의 허물로 인해 하나님에게 죽은 자여서 더 이상

  하나님과의 사귐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와 화해하시기 위해,

  그럼으로써 우리가 그분과 하나가 되어 영원토록 교제를 누리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P 67)

- 사랑하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창조주이자 주님이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

(P 69)

[다시 하나가 되어]

-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는 에덴동산에서 인류가 하나님의 은혜롭고 생명을 주는 명령을 거부

  함으로써 시작되었다.(P 81)

- 불의를 벌하는 용서가 필요하고, 용서하는 정의가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원래의 마음으로 회복시키는 길이며, 우리를 서로와 화복시키는 길이다.(P 82)

- 우주 전역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속죄다.(P 83)

-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P 85)

- 속죄에 대한 초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P 96)

- 속죄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개념이다.(P 93)

- 구원은 단지 개인의 죄 사함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악의 권세를 물리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P 94)

- 십자가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상징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개별적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또한 우리 중 누구도 받을 자격이 없는 이에게 베푸신 은혜의

  행위이다.(P100)

  

 

[믿음의 경이로움]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간섭으로만 믿음에 이르게 된다.(P113)

-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이신다.

  (P119)

-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사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P122)

-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사 우리가 그분을 믿도록 이끌어주신다(P122)

- 성경에 따르면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필사적으로 붙잡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그분을 붙잡는 자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물이다.(P127)

- 우리가 할 일은(P129)

   1) 믿어야 할 것을 믿는 것

   2) 사람들에게 알리라는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3) 복음을 말할 때 성령이 마음과 생각을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

   4) 그분이 뜻을 이루실라 신뢰하는 것

- 자유란 계시된 바를 받아들이고 신뢰하는 순종으로 살아가는 것(P130)

  

  

[천국에서 중요한 것]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천국에 합당한 자로 준비된다. 이는 우리가

  행하거나 성취한 무엇이 아니라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다.(P140)

- 성령의 은혜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처소를 예비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다.(P140)

- 복음의 핵심에는 믿음을 통해 얻는 은혜가 있다. 이 믿음에서 순종이 나온다.(P141)

- 예수는 현재의 영원하고, 강렬하고,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천국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예수께 천국은 단순히 언젠가는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실재였다.(P149)

- 예수님에게 천국은, 자신이 아버지와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은 것처럼 우리가 그분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국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우리

  존재의 실재에 대한 것이다.(P150)

- 시편 기자는 사랑이란, 인격적이고 친밀한 것, 영혼이 갈망하고 몸이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152)

  

 

[지옥과 심판]

-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심판을 증거하고 신약은 은혜를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맞지만 사실 신약은 구약의 시판 개념을 강화한 것이다.(P161)

- 하나님이 지옥에 대해 계시해주신 바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을 통해

  전해주신 진리들을 굳게 붙드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9P163)

- 지옥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공정하고 선한 분 이상이시라고, 완벽하게

  정의롭고 사랑 많으신 분이라고 우리는 올바르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질문들과 염려들을 그분께 맡겨놓을수 있다.(P165)

- 우리의 선택으로 야기된 고통은 우리에게 지옥을 만들어냈다.(P169)

- 많은 악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지옥을 만들어주면서도 이생에서 그 결과를 겪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므로 그러한 행동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반드시 미래의 심판 때가 되어서야 겪는 것은 아니다.(P171)

-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지옥이라면 그것도 주신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 그러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P176)

- 성경에서는 단지 사랑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정의 역시 이긴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기신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도 더 낫다.(P180)

 

[나쁜 소식 : 보편 구원론]

- ‘보편구원론이란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P185)

  이 이론은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견지했을 뿐 교회가 줄곧 거부한 입장이다(P194)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P187)

- 자유란 여러 대안들 중에서 선택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분이 부르신 삶을

  사는 기적적인 능력이다.(P211) 

 

[인격적인 하나님의 승리]

- 예수님은 단지 의로운 예언자가 아니라 바로 메시아시다.(P215)

-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으로 이끄실 분은 우리 중 누구도 아닌 성령이시다.(P215)

- 복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의 영원한 사귐으로 시작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사귐으로 끝난다.(P220)

- 성령의 사역 없이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우리를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초청하신

  일을 알 수조차 없다.(P228)

- 하나님과 나를 화해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며, 나와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것은

  성령이 주신 믿음이다.(P229)

- 복음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의심을, 우리의 죄를, 우리의 선택을 바라보지 말라고 한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말한다.(P230)

- 성경은 우리가 알게 된 복음을 믿고 나누라고 말할 뿐이다. 그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으며, 자신과 화해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이다.(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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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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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뭐가 바쁜지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갑자기...우연히 발견된 암에 맞서서 굳건히 항암 치료를 잘 받고 있었고 몸 상태가 좋은

날은 친한 친구들과 등산도 함께 다니던 친구가, 항암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조만간

예전처럼 등산을 하자며 즐겁게 웃던 친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친구가 가는 마지막 길도 배웅하지 못한 채 나는 또 다른 나의 바쁜 일상과

마주하면서 살뜰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런 친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나도 이제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에 다다른 나이가 되었나하는

생각 속에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며 살아 있을 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또 갑자기

찾아 올 수 있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살아 있는 내가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예전에 읽었던 적이 있는 작품이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뒤적이게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저자인 노 교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생관을 통해 누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한 번은 가야 할 길 앞에 놓인 각자의 남은 시간의 활용에 대해 깊은 연륜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경험을 토대로 인생 선배로서 담담히 전해주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작품을

펼치기는 했으나 읽는 동안 저자의 삶에 대한 관점보다는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죽음, 사랑,

이별 그리고 남은 시간 등과 같은 그리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아 굉장히

당황스럽기도 하였고, 씁쓸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나 가야 할 길이라면 산 자는 살아 있는 존재로, 떠난

사람은 과거 속의 단순한 존재로서 그 유, 무형적 존재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게 나의 평소

삶과 죽음을 바라보고, 대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난 죽은 사람에 대해 크게 애통해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거나 환생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상황이다 - 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만이라도 떠나 버리신 분의 뜻을 받들어 현재를 중시하며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여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며,

이승을 떠나신 분들도 역시 그런 자세를 더욱 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승을 떠나 버린 분을 추억한다는 미명하에 주지육림의 제단을 쌓고 그 어떤 애곡을 불러 준다

한들 그의 죽음이 번복될 것이며, 떠나가신 분이 환생할 것인가?

일정한 도를 넘은 요식 행위는 아무 쓸모없는 행동이요, 남을 의식한 의전행위로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차라리 그 분들이 살아계실 때 한 번 찾아가 인사와 위로를 하고 마음과 마음을 교통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행동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조상을 모시는 행사나 고인을

모시는 과도한 전통적 관습에 그리 찬성을 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 모든 행위는 살아 있는 자들의 보여주기 위한 행위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기독교적 종교에 몸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 모여 그 분의 살아 생전의 추억을 반추하며 후손으로서, 친구로서

아니면 기타의 관계로서 돌어가신 분을 추모하는 형식이 되어야지 지금은 많이들 개선이

되었지만 아직도 구태의연한 보여주기식 행위가 너무 많아 나는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찌 되었던 살아 있는 자들은 산 자들대로 그 현실적 소임을 다 하는 것이 떠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 역시 언젠가 친구가 떠난 길을 갈 것이고, 나의 주변인들 역시 나의 죽음을 애달파하고 슬퍼할

것이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현실적인 삶의 무게로 인해 언젠가는 나의 대한 생각과 추억을 잊을

것이고 또 그들도 자신의 삶을 분주히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로 인해 무조건 슬퍼하거나 무한정 애통해 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살아 갈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언젠가 자신도 마주하게 될 그런 이별에 대해 또 남은 자로서,

떠날 수 밖에 없는 자로서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점에 대해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저자가 말씀하시는 대목 중 가슴에 와 닿은 이야기만 추려보았다.

-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P 40)

- 외로움을 잊는 길은 자신을 망각하는 일이다.(P 41)

-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드는 것이 아닌 마음속으로부터 차오르는 것(P 42)

-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 45)

-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키에르키고르, P 52)

-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예술이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아름다움이 없다(P 54)

- 사랑이 있는 고생이 축복이다.(P 66)

-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P 67)

- 나의 나 됨은 육체적인 자아가 아니다. 정신을 지닌 인격으로서의 자아다. 정신적 자아야말로

  나를 만드는 자아이다(P 68)

- 자아의식은 언제 나타나는가?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 

  요소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P 69)

-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성이 없다.(P 70)

- 값있는 일생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P 73)

- 생활의 진리는 참여의 진리이다. 참여가 없는 진리는 언제나 진리가 될 수 없다.(P 75)

- 인간의 완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 진다.(P 77)

- 신체가 늙으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린다는 착각을 버려라.(P 81)

- 나이 들면서 가장 삼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노욕이다(P 83)

- 노인의 자산은 지혜이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고 노년기가 되면 삶의 지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독서를 계속하는 것이다.(P 93)

- 누구나 인생의 등산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왜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가?

  가장 불행한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마음 자세이다.(P110)

- 99의 고생 끝에 100의 만족과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라, 1에서 100까지 지속적인 기쁨과

  행복을 차지하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1)

- 인생의 등산은 제각기의 선택과 목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즐겁게 일하면서 영광스런

  성공에 이르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2)

-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는 그 자리와 의의가 있게

  된다.(P123)

- 예수에게서 배우고 따라야 할 미덕 중 첫째가 온유와 겸손이다.(P136)

- 내가 믿는 종교적 신앙이 최고라고 해서 이웃 사람이나 국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경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와 인간적 범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P137)

- 종교적 신앙이 필요한 것은 종교가 선한 질서를 창출하고 육성해가며 그 선한 질서의 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종교와 신앙을 위해 바치는

  시간, 노력, 재정을 과학과 도덕을 위해 제공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종교계는 많은 것을 과학과 도덕에 양보해도 좋을 것이다.(P138)

-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의 조건이다.(P143)

- 기독교의 기업이나 경제 윤리는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고 부진런히 노력해서 경제적 부를

  쌓으라. 그러나 그것은 너와 네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론이다.(P144)

- 기독교는 직접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 뛰어들지는 않아도 그 선한 해결과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어야 한다.(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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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10

 

내가 존경하는 분 중에서 종교 이론이 강한 분이 계시다면 본 제목과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내용이었고 작품을 통해 깨달음을 확인한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었다. 본 작품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

 만 초심자들도 약간의 고뇌만 한다면 쉽게 이해할만한 그런 내용이었지만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자칭 기독교 신자인 나와는 달리 나의 와이프는 뼛속까지 착실한 크리스찬이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미안하게도 수시로 아내에게 던져서 괴롭혔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1.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깊은 산골에서 살다 주님이나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2,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은 정말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조건

   유황불과 지옥불로 벌을 주실까?

3.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대체적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준비만

   하는 사람들 같다. 그럴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우리 인간을 태어나게 하셨는가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시지?

4. 다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이 땅에 정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왜 구원하지 않으시고 착한사람을

  등치는 사기꾼들을 왜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세상을 만드셨나?

등 이었다.

이 질문을 놓고 마누라와 싸우다가는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수 없이 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항상 그 답을 스스로 찾고자 노력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본 작품이 그런 답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접하게 되었다.

작품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답을 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져 주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덜 열렬한 신자뿐만이 아니라 비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기독교와 주님에

대한 의문들이기에 나는 가슴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과거 한 때 우리 사회에서 한 편의 CF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CF 내용은 산골 소녀 영자네 집에 모회사 이동통신이 설치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CF

소녀는 일약 대 스타가 되었고 아마도 얼마간의 출연료도 받았던 모양인데, 이를 노린 불한당

같은 놈들이 출연료를 강탈하기 위해 소녀의 집에 들어갔다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그

소녀는 충격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산골에 살면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다 돌아가신

그 아버지와 영자라는 소녀가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나와 토론을 벌이던 와이프의 결론은 '갈 수 없다'였고, 나는 '간다고 보장은 못 하지만 만약에

못 간다면 소녀와 소녀의 아버지는 너무 억울하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작품도 이런 내용을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느 소녀가 자동차 사고로 15세에 죽었는데, 그 소녀가 12살 이전에 죽으면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는 데 그 소녀는 12세를 넘겼으니 하나님이 거두시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굳이 12세를 넘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대충 살다 12살만 되면 죽던지 죽임을 당하는 게 맞지 않을까?

또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추 수용소에서 히틀러의 만행으로 아무 이유 없이 독가스 실에서

죽어간 자매가 있었는데 한 소녀는 11, 언니는 15살이었는데 죽어서 보니 동생은 천국에

언니는 12살이 넘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잣대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무심하게도 어떤 답도 주지 않고 있지만,

작품의 서두를 보면 작품을 추천하고 있는 여러 분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작품의 내용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추천사들을 읽어보면

추천사 1.

저자는 인간을 협박하고 종교적 신념을 배타적으로 갖도록 만들기 위해 천국과 지옥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 세상에서 진실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우리가 눈뜨기를

호소하고 있다. 결국 사랑만이 이 모든 절망과 패배의 시간을 영원한 감격으로 전환시킬 힘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추천사 2.

그의 관심을 지옥 자체가 아니라, 지옥에 대한 집착 속에 숨은 좁은 우리. '당신들의 지옥

말함으로써 '우리들의 천국'을 확보하려는 바리새인 같은 우리의 실상이다.

 

추천사 3.

내세에서의 지옥에 대해서는 두려워 떨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현세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대개가 '누가 구원받지 못할까?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저런 추천사 보다 가장 가슴에 닿은 내용은 '임어당 선생'이 말씀으로

 

"내가 가 본 교회에서는 항상 분노한 목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분노한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다"

 

였다.(나도 그런 기억 밖에는 없다)

 

내가 과거 교회 그러면 생각나는 모든 내용을 두 줄로 요약하신 아주 정곡을 찌르는 임어당

선생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날벼락처럼 나를

'죄인'이라 부르고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사사건건 '지옥'에 간다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전도사가, 교역자들이 정말 싫었고 그런 주장을 하셨다는 주님과 예수님은 더욱 싫었다.

그렇지만 와이프를 사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그런 설교가 주는 의미를 나름대로의 연구

끝에 정확히 알고는 그리 겁먹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뭔가 찜찜한 구석은 남아 있다.

기독교가 뭔지, 산골에 사는 영자네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찾아가 그냥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던가, 최후의 날에 유황불로 심판받는다고 하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짧은 시각으로 우리 기독교를 보았을 때, 기독교에 매료되어 믿게 하기보다는 위협당하여 믿게

하려 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 설교자들은 메시아의 복된 말씀 전파가 아닌 위협으로 일관하면서 그 분의 참 뜻을 입만 열면

비신자들에게 '지옥''유황불'을 들먹이며 위협 아닌 위협을 일삼으면서 다가 올 신천지를

준비하라고 강제하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유발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게 하고 있다.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다른 어딘가로 가게 하는 것이 예수가 하시는 일이라면, 기독교 핵심 메시지와 이생의

 관계는 고작 다음 생에 필요한 것을 손에 쥐어 주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는 논리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최선이란 말인가?

제반 여러 이야기를 읽으면서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런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던지는 중요 질문에 대한 작품의 요약과 거기에 덧붙인 나의

의견을 간단하게 피력해 보면

 

 

질문 1) 인간이 저지른 일순간의 실수를 이유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보내게

          하는 게 진정한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도 자식이 밥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놀기만

해 얄미운데 밥 때만 되면 짜증내며 밥 달라고 보챈다고 밥 대신 흙덩이나, 돌덩이를 던져 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크나 큰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빌미로 인간에게 영원한 벌을 주신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저자와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생명을 경시여긴 흉악범이나 전쟁같은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놈들까지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실 지 여부는 좀 뒤에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위에 해당하는 간단한 사항만을 놓고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소하게 저지른 순간의 실수 - 인간의 긴 일생을 놓고

보았을 때 - 를 이유로 절대 영원한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2) '천국'은 진실로 있는가?

 

나는 '천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박한 현세를 사는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천국'이라는 희망마저도 없다면 그 날이 그 날이고,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니 '절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현세의 고난과 괴로움을 무엇으로 이겨내고 힘든 하루 하루를 무슨 낙으로 견뎌 낼 것이며 그런

고난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실체는 사람마다 각자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공통적인 것은 아마도 걱정, 근심 없는

세상, 고통과 고난 없고 항상 복과 즐거움이 넘치는 신나는 곳일 것이다

현재가 힘들고, 어려워도 보다 나은 내일, 복되고 아름다운 날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인드 아니겠는가?

, 미래란 희망의 현실적 표현이고, 천국이란 각박한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의 또 다른 희망의

현실적 증표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반드시 '천국'은 있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천국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생의

각박한 삶을 살고 돌아온 자녀들에게 편히 쉬게 해 주실 처소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덧붙여서 저자가 '천국'에 대한 단상을 강조한 몇 가지를 첨언해 이야기한다면,

'천국''존재 유무'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생각의 방식에 따라 현재 살고 있는 자신의 '시간''에너지' 사용 방법도

달라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

으로 사는 방법을 자신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 베푸는 것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세상에서

지속되도록 지금 여기서부터 연습할 것을 가르쳐 주면서 '천국'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세상의 고통도 동일한 방법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 '천국'에 가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하시는 것은, 누가 가고

누가 못 가는가에 대해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는 현재의 영원하고, 강렬하고,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천국'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단순히 '언젠가는' 아니었다. 그건 현제의 실재였다.

그 경계를 흐리시면서 하늘과 땅이 합해지고 미래와 현재가 합해지는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셨다.

 

 

질문 3) 그렇다면 '지옥'은 정말 있는가?

 

아주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데, 아주 수준 낮은 나의 주장일 것으로 비춰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이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지옥'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로부터 받는 중압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어서 '지옥'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 신경을 쓰고 있지만 지구상의 지옥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 주장에 대해 나는 천 %, % 동감하는 바이다)

'천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그 어떤 반대 개념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못 할 때 일어나는 거대한 사회

전반적인 붕괴와 혼란에 이르기까지, 악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며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로 아마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세 유럽 당시에 태동된

작품, 예로서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더라도,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그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음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반

인륜적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인간들에 대해 비록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일정기간 단죄를

반드시 하실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신이 있기 때문이며, 그런 인간들을 벌 줄 수 있는 곳으로

'지옥' 만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께서는 이교도와 이방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려고, '지옥'을 사용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라고 하신 소명과 정체성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하기 위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대해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하시는 데, 그 단적인

예로 ''히브리 성경'의 경우 '지옥'이라는 단어나 그러한 개념을 묘사하는 단어가 없고, 죽음과

무덤을 일컫는 단어들이 몇 개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12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영어로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게헨나'로 불리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따져 보면, '''골짜기'라는 뜻이고, '헨나'

'힌놈'이라는 뜻으로

, '게헨나''라는 뜻은 힌놈의 골짜기로 예루살렘 성의 남쪽에서 서쪽에 걸쳐 있는 실제 장소로

그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고 한다. 쓰레기 처리장이란 무엇인가?

각종 폐기물과 불필요한 물건들이 물질로서의 자신의 생을 다한 뒤 소각되고 매몰되는 현장

아닌가. 쓰레기를 소각시키듯이 악인들을 완전 폐기시킨다는 상징성으로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던 '게헨나'라는 단어를 차용했을 것이고, '지옥'이라는 곳도 그 '게헨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으로 여겨 '지옥''게헨나'라는 곳을 동격으로 염두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바울''사탄'의 존재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존재였다고

하는 바, '지옥''사탄'에 대한 사용 의미를 잘 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질문 4)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해석해서 들려주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우리가 해석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고수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복음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축소된다면 기쁜 소식은 문지기를 지나 클럽안으로

들어가는 티켓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지옥에 가지만 자신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잔치는 재미가

없다. 복음을 즐거운 참여가 아니라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면 폭발적이고 해방감 넘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기타 주요한 문구들

-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정말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 참으로 겸손해지고 상한 마음으로 화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사과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열쇠 구멍을 통해서 '문이 잠겼구나 미안하다 여기에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어떻게 든 해 보았겠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까?

- 결국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왜냐면 결국 사랑이 이기기 때문이다.

- 성경이나 고대 신앙을 보면 동물을 제단에 바치고 그 피를 뿌리는 모습이 보이는 데 이는 바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신이나 세력이나 신적 존재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모든 문화가 신들을 만족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더는 그러한 희생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신을 철저하게 만족시킨 궁극적

  희생이셨기 때문이다.

- 이생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같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

- '속하지 않은' 그룹을 배제시키고 '속한 그룹'만 계속 인정하고 지지하는 편협한 복음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다.

- 예수는 죽음과 재 탄생의 양식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고취시키는 유일한 삶으로 가는 길임을

  보여 주는 근원이시며, 힘이시며, 모범이시고, 보증이시다.

- 자신의 죄와 증오를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은 마치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나무와

  같다. 가을에 붙잡혀 있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 '십자가'는 새 창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상기시키고 언뜻 보게하고,

  가리키는 아이콘이다.

-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한 문화로 차출되거나 그에 소유되지

  않으신다. 예수라는 말을 쓸 때는 어떤 예수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때문에 예수가 오셨고

  사랑 때문에 예수는 계속해서

  해마다 모든 사람에게 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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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듣는 강물
김진태 / 해냄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3

 

작품은 수월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기독인으로서 불교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잘못된 시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차원

에서 내 것이 중요한만큼 남의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작품을 접해 읽었는데 역시 철학적

내용이 많아 솔직히 이해가 너무 어렵다.

과거 어느 고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중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들은 적이 있는데 본 작품도 그런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려 노력은 해 보았으나 간간이 보여지는 수월스님의 행적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이제까지의 삶을 고정된 틀 속에서 바라보았던 나를

바깥으로 인도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난해하다고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어찌 되었던 불교와 관련된 여러 기초 상식을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들

 

- 홀로 있을 때 나는 온전히 나다. 벗과 함께 있을 때 반쪽이 나다. 여럿이 있을 때 나는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P 29)

- 인도에서는 절을 상가라마(Sangharama)’라고 한다. 우리는 승가람혹은 가람이라 부른다.

  ‘상가우리, 여러 사람을 뜻하고, ‘아라마행복이 있는 곳’, ‘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한

  뜻으로 해석하면 뭇 사람들의 행복이 있는 곳이 된다.(P 36)

- ‘천수경은 자비가 끝없는 관세음보살게 온몸 던져 욕심, 성냄, 어리석을을 없애고 끝내 깨달음
  을 이루고 말리라고 다짐하는 뜨겁고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노래로 천수경자비의

  경전이라고도 한다.(P 46)

- ‘지혜란 삶이 비어 있음을 보는 힘이요, ‘자비란 그 비어 있음 가운데 피어나는 눈부신 꽃이다.

(P 47)

- 부처님이 되기 전의 싯다르타는 우루벨라숲 속에서 여섯 해 동안의 긴고행을 끝내고 자신의

  수행 생활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P 50)

- 예비승을 의미하는 사미승에서 사미란 인도말 사마네라(Samanera)’에서 온 말로 악을 그치고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P 54)

-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하늘 천 따 지를 하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P 61)

- 깨달음의 순간이 끊어짐이 없이 이어가 욕심과 어리석음의 옛 삶이 다시는 끼어들 수 없게

  하는 노력 아닌 이 노력을 보림(保任)이라고 한다.(P 76)

- 조실(祖室)이란 대중들을 지도할 수 있는 높은 수행력을 지닌 스승에게 올리는 자리이다.(P 85)

- 우리 선조들은 상투가 없는 사람을 반팽이(半便)이라고 불렀다.(P 97)

-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보살이다.

  곧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는 두 개의 만다라이며, 부처님은 문수와 보현이 서로

  만나서 피워낸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인 것이다. 문수가 존재의 참모습응 밝게 보는 눈이라면,

  보현은 그 밝은 눈이 끝없이 토해 내는 손이요, 발이요, 입이다.(P131)

- 불교의 진수는 화엄이고, 화엄의 결론은 보현이다.(P132)

- 188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을 때 이들을 목숨으로 막아낸 이들이 강계출신

  포수단 오백 명이었다.(P137)

- 삶과 세계를 해석하는 힘을 불가에서는 욕망으로 본다욕망이란 덧없음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비어 있음에 대한 눈가림이다.

- 참된 사랑과 자비심은 나 없음’, 곧 무아의 진실에 눈 떳을 때만 생긴다.(P156)

- ‘신발은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P170)

- ‘샛섬(간도)’의 유래?

  여진족의 자손인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으로 터를 옮기자 그들이 살던 곳은 빈터가 된다.

  청나라 황제가 청나라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들어가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선포하여 조선

  청나라사이에 갈 수 없는 섬이란 샛섬 혹은 '간도'라 칭하였다.(P190)

- 연해주란 프리(Pri, 연안), 모르스키(Morskii, 바다)라는 러시아말을 풀어 놓은 것으로

  블라디보스톡 지방을 말한다.(p192)

- ‘진실은 갈라설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삶을 떠난 진실은 한갓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하지 못한 삶 또한 삶이 아니다.(P194)

- 승려들의 법복(法服)은 다른 말로 자비의 옷이라 부른다.(P195)

- 중국 도문애서는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부른다. ‘도문이란 골짜기또는 원나라 때의 벼슬

  이름인 만호(萬戶)’를 뜻하는 여진족 말인 두맨을 중국글로 나타낸 말(P196)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 곳에 크게 번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과 그들의 무장 투쟁을

  막아 없애려는 한 방법으로 흩어져 있던 여러 마을을 어거지로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도문시를 만들었다.(P197)

- ‘성냄이란 본디는 없는 거짓 나를 절대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있다고 보는 데서 오는 삶의

  질병인 셈이다.(P223)

- 삶에서 바라봄의 중요함은 아무리 힘주어 거듭 말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바라봄의 자리,

  이것은 모든 삶이 스스로의 삶의 길을 열어가는 갈림길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이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되는 갈림점이기 때문이다.(P237)

- ‘관음이란 완성된 삶의 다른 이름이니, 나 아닌 나를 보는 밝은 지혜의 바다이며 너 아닌 나를

  노래하는 따뜻한 자비의 고향인 것이다.(P251)

- 죽음은 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루는 일이다.(P273)

- ‘열반이란 모둔 맞섬이 사라져 버린 큰 평온이란 뜻이다.(P274)

- ‘깨달음이란 삶과 죽음이 본디 없는 것을 밝게 보는 일이며 사무치게 맛보는 일(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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