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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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권유도 5

 

뭐가 바쁜지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갑자기...우연히 발견된 암에 맞서서 굳건히 항암 치료를 잘 받고 있었고 몸 상태가 좋은

날은 친한 친구들과 등산도 함께 다니던 친구가, 항암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조만간

예전처럼 등산을 하자며 즐겁게 웃던 친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친구가 가는 마지막 길도 배웅하지 못한 채 나는 또 다른 나의 바쁜 일상과

마주하면서 살뜰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런 친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나도 이제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에 다다른 나이가 되었나하는

생각 속에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며 살아 있을 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또 갑자기

찾아 올 수 있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살아 있는 내가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예전에 읽었던 적이 있는 작품이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뒤적이게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저자인 노 교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생관을 통해 누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한 번은 가야 할 길 앞에 놓인 각자의 남은 시간의 활용에 대해 깊은 연륜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경험을 토대로 인생 선배로서 담담히 전해주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작품을

펼치기는 했으나 읽는 동안 저자의 삶에 대한 관점보다는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죽음, 사랑,

이별 그리고 남은 시간 등과 같은 그리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아 굉장히

당황스럽기도 하였고, 씁쓸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나 가야 할 길이라면 산 자는 살아 있는 존재로, 떠난

사람은 과거 속의 단순한 존재로서 그 유, 무형적 존재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게 나의 평소

삶과 죽음을 바라보고, 대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난 죽은 사람에 대해 크게 애통해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거나 환생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상황이다 - 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만이라도 떠나 버리신 분의 뜻을 받들어 현재를 중시하며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여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며,

이승을 떠나신 분들도 역시 그런 자세를 더욱 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승을 떠나 버린 분을 추억한다는 미명하에 주지육림의 제단을 쌓고 그 어떤 애곡을 불러 준다

한들 그의 죽음이 번복될 것이며, 떠나가신 분이 환생할 것인가?

일정한 도를 넘은 요식 행위는 아무 쓸모없는 행동이요, 남을 의식한 의전행위로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차라리 그 분들이 살아계실 때 한 번 찾아가 인사와 위로를 하고 마음과 마음을 교통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행동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조상을 모시는 행사나 고인을

모시는 과도한 전통적 관습에 그리 찬성을 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 모든 행위는 살아 있는 자들의 보여주기 위한 행위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기독교적 종교에 몸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 모여 그 분의 살아 생전의 추억을 반추하며 후손으로서, 친구로서

아니면 기타의 관계로서 돌어가신 분을 추모하는 형식이 되어야지 지금은 많이들 개선이

되었지만 아직도 구태의연한 보여주기식 행위가 너무 많아 나는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찌 되었던 살아 있는 자들은 산 자들대로 그 현실적 소임을 다 하는 것이 떠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 역시 언젠가 친구가 떠난 길을 갈 것이고, 나의 주변인들 역시 나의 죽음을 애달파하고 슬퍼할

것이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현실적인 삶의 무게로 인해 언젠가는 나의 대한 생각과 추억을 잊을

것이고 또 그들도 자신의 삶을 분주히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로 인해 무조건 슬퍼하거나 무한정 애통해 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살아 갈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언젠가 자신도 마주하게 될 그런 이별에 대해 또 남은 자로서,

떠날 수 밖에 없는 자로서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점에 대해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저자가 말씀하시는 대목 중 가슴에 와 닿은 이야기만 추려보았다.

-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P 40)

- 외로움을 잊는 길은 자신을 망각하는 일이다.(P 41)

-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드는 것이 아닌 마음속으로부터 차오르는 것(P 42)

-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 45)

-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키에르키고르, P 52)

-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예술이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아름다움이 없다(P 54)

- 사랑이 있는 고생이 축복이다.(P 66)

-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P 67)

- 나의 나 됨은 육체적인 자아가 아니다. 정신을 지닌 인격으로서의 자아다. 정신적 자아야말로

  나를 만드는 자아이다(P 68)

- 자아의식은 언제 나타나는가?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 

  요소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P 69)

-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성이 없다.(P 70)

- 값있는 일생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P 73)

- 생활의 진리는 참여의 진리이다. 참여가 없는 진리는 언제나 진리가 될 수 없다.(P 75)

- 인간의 완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 진다.(P 77)

- 신체가 늙으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린다는 착각을 버려라.(P 81)

- 나이 들면서 가장 삼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노욕이다(P 83)

- 노인의 자산은 지혜이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고 노년기가 되면 삶의 지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독서를 계속하는 것이다.(P 93)

- 누구나 인생의 등산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왜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가?

  가장 불행한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마음 자세이다.(P110)

- 99의 고생 끝에 100의 만족과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라, 1에서 100까지 지속적인 기쁨과

  행복을 차지하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1)

- 인생의 등산은 제각기의 선택과 목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즐겁게 일하면서 영광스런

  성공에 이르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2)

-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는 그 자리와 의의가 있게

  된다.(P123)

- 예수에게서 배우고 따라야 할 미덕 중 첫째가 온유와 겸손이다.(P136)

- 내가 믿는 종교적 신앙이 최고라고 해서 이웃 사람이나 국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경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와 인간적 범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P137)

- 종교적 신앙이 필요한 것은 종교가 선한 질서를 창출하고 육성해가며 그 선한 질서의 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종교와 신앙을 위해 바치는

  시간, 노력, 재정을 과학과 도덕을 위해 제공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종교계는 많은 것을 과학과 도덕에 양보해도 좋을 것이다.(P138)

-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의 조건이다.(P143)

- 기독교의 기업이나 경제 윤리는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고 부진런히 노력해서 경제적 부를

  쌓으라. 그러나 그것은 너와 네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론이다.(P144)

- 기독교는 직접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 뛰어들지는 않아도 그 선한 해결과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어야 한다.(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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