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 여불위 2
정 시앙밍 지음, 김하림 옮김 / 솔출판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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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최근 우리의 독서계에 돌풍을 몰고 온 작품 '商道'(최인호)라는 작품이 있다.

商人의 진정한 자세와 길에 대해 1800년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실존했던 인물,

임상옥(林尙沃)이라는 사람을 통해 그리고 있다.

작품 商道의 주인공 임상옥은 '商人'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최선을 다한 -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여불위'라는 작품의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이라면,

중국의 巨商 '여불위'는 단순한 보석상으로 출발해 '왕권이라는 상품'을 거래한 글자

그대로 희대의 '巨商'이었다.

 

여불위, 그는 상인이었으면서도 물품에 대한 혜안과 함께 사람에 대한 혜안을 두루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국(조나라, 효성왕)에 볼모로 잡혀 간 세손(이인, 후에 이름을 '子楚'로 바꿈)의 행동

면면을 보고 그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으며, 국가 간

및 국가 내 권력 상층부의 상관관계를 냉철히 분석하고, 파악하여 줄대기를 잘 했으며

확실한 줄을 확인하고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는데 상인이기 이전에 그는 전략가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작품을 읽으며 - 작품 자체는 우리의 작품 '商道'가 갖는 주제성, 극적 전개 등 과는 비교도

안 되는 3류 수준의 작품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 치열한 경쟁사회를 살고 있는 샐러리맨

들이 배워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보면

 

첫째, 商人 이상의 현실 인식력이 뛰어났다는 점이다.

여불위는 우연한 기회에 적국인 조나라(효성왕)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소양왕)의 세손

(이인)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 세손에게 접근하고 있다.

 

둘째, 목표 접근력과 달성방법에 대한 전략이 우수했다는 점이다.

여불위는 베팅 목표가 설정되자 자신이 자지고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한다. 단순한 투자가

아닌 투자자로서 투자의 대상에게 '자산 가치 상승 방법'에 대해서도 지도하고 있다.

 

셋째 어떤 형태이든 '리더'는 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불위가 세손에게 비록 치졸한 방법이기는 하나 돈으로서 - 당시 사회 구조상 왕손인데

다른 무엇으로 할 수 있는 방법보다 돈으로서 부하를 이끄는 방법 외에는 더 이상의

최고의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 인근 마을사람들과 수하에 선비를 이끌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상기의 3가지 점이 바로 내가 '거상 여불위'라는 작품을 통해 어떻게 현상을 분석하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해 얻은 지혜이다.

거상 여불위는 한 나라의 왕권에 대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베팅을 했고, 성공했다.

여불위를 일부 사학자나 작품 속에서 간악하고, 모사를 잘 꾸미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나의 견해로는 그는 한 시대를 풍미 했고,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진정한 商人이었다고 평하고 싶다.

 

'사람이 셋이서 걸어가면 그 중에 선생이 반드시 한 명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 부정적인 면만을 보지 말고 그런 역사적 사건의 뒤에 숨겨져 있는 참 모습 혹은

그 의미를 오늘의 관점으로 재분석하여 나름대로의 지침으로 활용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여불위'를 바라보고, 삼국지에서 간악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조조

생각하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가 읽고 있고, 들어서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승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서를 기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은

올바른 시각은 아니라 여겨진다. 여불위와 같은 사람이 요새 우리나라의 정치권을 흔들고

있기는 하나 여불위의 상인 정신 정도는 배워 볼 만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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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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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8

  

조선시대를 통 털어 왕이면서 사후에 후손들로부터 ''혹은''라는 명칭으로 추존되지

못한 분이 두 분 계시는데 '연산군(10)''광해군(15)'이다.

작품은 그 중, 광해군이 어째서 존호를 부여받지 못하고 ''으로 격하되었는지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국제 정세 등에 대한 분석서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의 부족한 역사관에 부끄러움을 한

없이 느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그 어느 왕보다 외유를 많이 하여 민생의 처참함을 직접

목도한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안정화시키고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각종 역사서는 증거하고 있으나 나는 여기서 광해군의 실책 몇 가지

확인해 보았다.

 

첫째, 정책의 중심으로서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비록 정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들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해서 왕권이 제대로 발휘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왕으로서 중요한 것은 참모들의 진언을 듣는 것도 중요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왕으로서, 권력의 핵심으로서 추진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이

섰을 때 이를 밀어 붙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한 결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광해군은 당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했다고는 하나 너무도 대소

신료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역사는 후세에 전해지는 치적에 의해 당시의 왕을 평가할 뿐이지 왕을 보위

하는 신하를 통해 당시의 왕을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민중과 긴 시간을 함께 호흡했음에도 민심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임란 당시 북진해 오는 왜군을 피해 왕과 왕자들은 제각각 도피생활을 한다.

이때 함경도 쪽으로 피난 간 왕자들을 현지 백성들이 잡아서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과 임란 당시 다른 집보다 궁궐이 제일먼저 불이 났다는 사실을 광해군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확립하고 자신과 선대 왕의 꿈인 북벌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겠으나

왜란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궁궐을 중수하고, 신축하고 거기다가 국방을 튼튼히

한다는 이유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몸뚱아리는 하나인 백성들이 이를 모두 몸으로 때우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획이나 연차적인 시행이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夷夷制夷'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북파에 의해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인물들을 왕 자신의 뜻을 세우고자 아무런 후속

대책도 없이 정권의 핵심으로 불러 들여서, 종내는 이들에게 배척 당하는 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 하나 아무리 화급하다 할지라도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인 명나라군을

들인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명나라군은 끝내 조선에 대해 각종 행학이 지나쳐

나중에 광해군 자신의 족쇄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이제이전법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로 심사숙고한 뒤에 추진했어야 할 것이나

광해군은 비록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가 추진했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방비가 미약했다

할 것이다.

광해군이 당시 처한 정치적 국제적 상황 속에서 행한 각종 정책이나 외교술은 당시의

시대적 안목을 꿰뚫고 행하였다는 점에서는 반론은 없으나 너무도 소심하게 추진한 것이

오히려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작금의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임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하나,

민생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국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와 날로

쌓여만 가는 민생 법안들을 보면서 또 다른 광해군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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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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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9

 

조선시대의 정치적 사상과 크나큰 역사적 사건 주변에 송시열은 항상 있어 왔다.

그가 행했던 일에 대해 그린 작품이다.

 

[송시열의 등장과 성리학의 발전 기반]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장생의 문인이라는 점과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유학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과거도 거치지 않고 '대군사부'가 되어 조정에 진출하는데

여기서 그가 조정에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는 이유는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

(장자 소현세자는 급서한다)의 스승이 되는데, 이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

되면서이다. 졸지에 왕의 스승이 되어버린 송시열은 그의 문하생들을 중요보직에 앉히게

된다.

 

[효종의 북벌의지와 송시열에 대하여]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줄기차게 송시열에게 북벌을 요구하나 송시열은

의도적으로 이를 외면하였다고 한다. 효종은 북벌을 가시화시키기 위하여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송시열과 송준길을 각각 '이조판서''대사헌'에 올려 '인사권과 탄핵권'

주어가면서까지 또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절대 금기시하던 왕과의 독대까지 하면서 북벌을

종용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를 외면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효종이 서거한다.

 

[1차 예송논쟁 혹은 기해예송]

자식인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喪服)의 기간이 문제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효종은 장자인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엄밀한 의미에서의 차자

, 둘째 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갖는데 만약 차자의 상복을 입을 경우 선왕인 인조, 효종, 현종이

모두 정통성을 부여 받지 못하는 왕이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 직계들만이 왕권을 계승하였다는 점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따라서 상복의 문제는 입는 기간의 문제 이전에 왕권의 정통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은 '부모가 3년복을

입지 못하는 이유 4가지' , 사종지설(四種之說)을 올리게 된다.

 

[송시열(서인)과 윤휴(남인)의 대결]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제1차 예송논쟁 당시부터 불거진다.

예송논쟁으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학문적, 정치적 적대자로

변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문난적 논쟁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차 예송논쟁과 경신환국]

현종의 어머니가 죽으며 복제 문제가 또 다시 문제로 떠 오른다. 숙종은 등극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송시열일파로 인해 곤란을 겪는 것을 목격하고는 서인인 송시열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입지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취하며 송시열을

유배시키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인 송시열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던 청남파(소론)와는 달리

허적은 송시열의 문제를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탁남파(노론)였는데, 허적이 사사받으므로

해서 온건파가 조선 정치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서로 물고 물리는 당파싸움과

공작 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난정의 등장과 송시열의 몰락]

장옥정이라는 여인이 숙종의 총애를 받다 왕자를 낳는다.

장옥정이 어린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 과정에서 남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83세를 일기로

사사를 받고 죽는다. 송시열의 죽음은 남인의 재집권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선 정치사에서

'화해의 정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結言]

송시열 그는 분명 뛰어난 학자였기는 하였으나, 그 학문이 갖는 특색인 '스스로를 정학

(正學)이라 부르고 여타의 학문은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한 편협된 사고로 인해 조선

개국의 정치적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의 국가를 정체와 후퇴 속으로 몰고가게

만든 역할을 하였으며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는 사상과 이념이 변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정치적 기득권층의 기반 유지를 위한 사상의 정체로 인해 우리의 모든 면은 후퇴를

하게 된다. 송시열 그는 분명 훌륭한 성리학자였는지는 모르나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학자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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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이는 유대인의 모든것
김욱 지음 / 지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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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권유도 7

 

유대인은 유대교라는 종교적 합일성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 단일정신의 군락이다.

국경과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진 현대 사회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상에 근거한 구시대적 명제이기는 하나 수 천 년을 떠돌이적 삶을 살아오면서 또 그 어떤

민족보다도 더 가혹한 냉대와 멸시 그리고 탄압을 받았으나 아직도 지구상에서 살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떳떳한 그들, '유대 민족'에 대한 저력을 확인해 보지 않고 위와같은 논리를

덮어 두기에는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작품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다가가는 정도와 느낌은 각양 각색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유대 민족의 고난사'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유대 민족의

'세계 역사 등장기' 정도로 이해하고 싶었으나, 작품 구석구석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네들의

'인내심''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보는 대목에서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한기를 느낀

그런 작품이었다.

 

그들이 5000년을 준비했다는 탈무드의 내용도 그렇고 '사업 = 우물'이라는 논리,

특히 세계의 내노라하는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유대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전쟁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고 있다는 내용에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독한 놈들........' 하면서 말이다.

 

유대인, 그들은 불특정 다수의 민족들로부터 갖은 압박과 피박을 받았음에도 그들은

웃었으며 또 그들은 존재해 왔다. 작품은 유대 민족의 저변에 흐르는 정신적, 상황적 실태

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는데, 단순히 유대 민족들의 고난사로 이해치 말고 유대 민족의

알려지지 않은 민족 투쟁사라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읽으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정말 '유대인은 대단하다'라는 인식보다는 그들로부터 오늘을 사는

우리 민족이 아니 내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확인해 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작품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알고 있는 잡상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고 책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서 요약해 정리해 보았다.

 

 

   우리의 상식을 넓혀 주는 유대인에 관한 상식 문구들

 

- 유대인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또 자신들을 가르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고 부른다. 

- 1299'영국 정부'는 유대인 성서와 율법 책인 '토라'와 유대교 잠언집으로 불리우는 

   '탈무드'를 소각할 것을 법으로 정한 뒤 유대인에게 다른 곳으로 이주할 것을 명한다.

   당시 영국은 문명국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문맹율이 높았으나 유대인들은 6~7세만 되면

   아이들이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그렇게 했던 것이다.

- '토라'에는 하나님과 유대인과의 계약 관계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한다.

- 고대에는 유대인을 '히브리인(Ivrim)'이라고 불렀는데 '이브리'에서 유래한 말로서 

   '우리와 다른 인종'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유대인 노예들이 건설한 축조물이다.

   '개는 식탁에 앉혀도 히브리 노예는 앉힐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유대인을 피박했다.

- 아브라함은 바로 유대인의 시작인데, '모세''강물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임.

- 모세가 시나이 산 부근에서 유대인을 대표해 하나님과 종교적 계약을 맺는데 이것이 

   '십계명'.

- 유대인 격리 수용지구를 뜻하는 '게토(ghetto)'라는 말은 151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 에스파냐 정부가 유대인을 박해한 이유는 이교도인 그들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 5세기부터 17세기 말까지 자행된 유럽의 유대인 박해는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

   부터 누그러졌다.

- 유대인들의 즐겨 쓰는 '루프트 멘슈(공기)'라는 단어의 의미는 '사물로 고정되는 대신

   기체가 됨으로써 타인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데, 오랜 박해와 인고의

   세월이 그들의 가치와 개념을 여타 민족과 확연히 구분시키는 것으로 박해받던 시절

   유대인을 정신적으로 이끌어 주던 단어라고 한다. 

- 기독교인들이 볼 때 유대인은 예수를 살해한 죄로 민족 전체가 나라를 잃고 떠도는 저주

   받은 백성에 불과했다.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거나 자비를 베푸는 행위는 유대인에게

   벌을 내린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모독으로까지 간주되었다.

- 로마 카톨릭은 유대 사회에 가장 적대적인 세력이었는데, 가톨릭의 선구자 '바올로'는 

   물론 교황의 시초가 된 '베드로' 역시 유대인이라고 한다.

- 메시아는 히브리어로 '마쉬아흐(Maschiach)'라고 하는데,

   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고대 유대인이 왕에게 성스러운 기름을 붓던데서

   유래한 말이다헬라어로 하면 '크리스토스(Christos)'이며 여기서 그리스도가 나왔다.

- 가톨릭이 그리스도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를 첫 번째로 여기는 까닭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문을 관할하는 열쇠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던 뱃사람이었다.

- 이슬람이 유대인과 다른 점은 아브라함과 여종 '하갈' 사이에 태어난 이스마엘 후손임.

   이와 달리 유대인은 아브라함과 본처인 '사라'사이에 태어난 이삭의 후손임을 자처 한다.

-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예루살렘에 아니라 미국의 뉴욕이다.

- 현대 사회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구축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모두 유대인이다.

- 유대인들은 생업을 가르켜 '우물'이라는 은유적으로 표현하길 좋아하는 데, 이들은 일생

   을 통해 우물을 3개 정도는 항상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 유대인에게 '거지(슈노렐)'라는 직업도 있다. 이들은 학식도 높고, 가정도 있다

   전통적으로 이들 거지를 가르켜 '하나님의 배려'라고 부른다. , 누군가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게끔 하나님이 거지들을 예비했다는 뜻이다.

- 인류가 시작된 '아담'은 유대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임.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자긍심이 오랜 박해 속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낸 배경이었으며, 모든 분야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삶의 모태이다.

- 유대인은 고통이 인내를 낳고, 인내가 수고를 낳으며, 수고가 결국 성공을 낳는다고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다.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유월절'400년간 지속된 이집트의 박해에서도 그들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으며,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모든 음식은 삶을수록

   부드러워지지만 달걀은 더욱 단단해지기 때문에 이 날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삶은 달걀

   을 먹는다고 한다

- 유대인은 실패를 기억하지 않는다. 성공을 기념하지도 않는다. 오직 고난과 역경만을

   기억하고 기념한다.

-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미국식 정식 이름은 '대학살 순교와 영웅(미국 친구)

   들의 기념관'으로, 히브리어 정식 명칭은 '야드 바셈'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름을 기억다

   는 뜻이라고 한다.

- 유대인의 속담에 "돈을 벌고 싶다면 혼란을 틈타라"라는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비극이 있을 적마다 유대인들에게는 비극이 아닌 기회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원정,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등)

- 나폴레옹과 영국이 전쟁을 벌이자 각각의 군대에 군자금을 '로트실트 형제' 가 댔는데,

   셋째가 밀은 영국이 승리하자 '붉은 방패'라는 뜻이 담긴 독일어 'Rothschld' 에 귀족

   호칭을 하사하고 영국식 발음인 '로스차일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로스차일드는 철도 회사를 운영했는데 철도가 안고 있는 운송적 가치보다 정보적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다. 그래서 한 량의 객차마다 정보원을 배치해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해

   정치권에 제공했다.

- 강한 자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 유대인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노년에 자식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고 한다.

- 사업상의 신뢰는 반드시 지키나, 인간적으로는 신뢰하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철학이다.

- '싱크 탱크'를 최초로 생각해 낸 집단이 바로 유태인이다. 싱크 탱크는 한마디로 권위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데 존재의 가장 큰 이유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다.

- 유대인과 몽골족은 성벽을 거부함으로써 성공한 대표적인 민족이다.

- 유대계 인물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찾아냄으로써 성공을 이뤄

   냈으며, 성공한 유대인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람의 특징은 모두 기존의 막강한 권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 탈무드의 맨 마지막 장은 항상 여백이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삶이 계속되는 한 탈무드의

   지혜도 계속될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 구약성서의 아가, 잠언,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 왕으로, 그는 유대인 최초로 그들만의

   성전을 건축한 인물이다. 잠언의 히브리어 제목은 '미실레 셸로모'로 이는 '솔로몬왕이

   가르치는 슬기로운 삶의 지혜'라는 의미로,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코헬렛'으로 이는

   '백성에게 지혜를 전파한다'라는 의미다.

- 유대인의 자식 교육 방식 '나보다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이다.

- 영어의 'jewish mother'라는 단어는 '유대인 어머니'라는 뜻도 있지만 '어머니들의

   극성스런 치맛바람'이라는 뜻도 있다.

- 아파도 눈물이 나오고, 웃어도 눈물이 나오나 웃을 때의 눈물은 눈동자를 빨갛게 만들지 

   않는다.

- 설득은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지 관계를 돈돈히 만드는 데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 현대사회에서 자녀에게 올바른 감수성과 정확한 판단력을 길러 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에 다가 오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는 어른에게만 주어진 책임과

   특권을 아이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이다.

- 인생은 'what'을 찾아 떠나는 인생이다. 'what'을 상실한 인생이 'how'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 묵묵히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는 자만이 훗날 남과 다를 수 있다.(중국, 강엄)

 

[가정 교육에 관한 그들의 지혜]

- 아버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압바(abba)''교사, 선생'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 방관도 교육이며 인간의 가장 오래된 학교는 체험이다

- 지혜는 듣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 하나를 듣고 한 가지를 외우는 것보다, 반마디 말을 듣고 세 마디 말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교육이다.

- 받아 들이고 받아 들이지 않고는 전적으로 아이의 타고난 개성과 능력에 달려 있다.

- 싫다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하고 싶다면 마지막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 자녀를 주의하라, 그 아이들은 온 몸으로 듣고, 기억한다.

 

[책에 언급되어 있는 탈무드의 가르침]

 

유대인이 위기 때마다 다가올 변화를 예측하고 방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태의 핵심인 

    인간의 본직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수를 준비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5000년에 걸쳐

    준비한 '탈무드'이다.

 

노아의 방주 당시 모두가 쌍을 이루어 배에 타라고 했으나 '(')'은 혼자 탈 수 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홀로 남은 '()'에게 같이 가자고 하자 ''은 같이 배에 타는

     조건으로 ''에게 어디든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다.

     그 후로 ''이 있는 곳에는 항시 ''이 따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이 처음 ''을 마셨을 때는 양처럼 순해진다.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분노하고,

     그 보다 더 마시면 '돼지'처럼 지저분해 진다. 더욱 많이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한다. 이는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손을 쥐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죽을 때 손을 펴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악마는 사람을 찾으러 다니기 힘들 때마다 자신을 대신해 ''을 보낸다.

 

가장 강한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남자의 일곱 가지 변화

   1) 한 살은 왕            2) 두 살은 돼지                   3) 열 살은 염소새끼

   4) 열 여덟은 말        5) 결혼 한 후 당나귀      6) 중년은 개         7) 노년은 원숭이

  

탈무드의 동화에 하나님이 인간의 눈을 '검은자위''흰자위'를 주신 이유를 인간은

    어두운 부분을 통해서 만이 참다운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마음이 거만해지려고 할 적마다 조물주가 모든 만물 가운데 가장 맨 마지막에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떠 올려라.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에서 만든 이유는 그녀가 늘 남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존재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 남자는 결혼하면 죄가 늘어난다. 아내를 이유없이 괴롭히지 말라. 하나님이 그녀의

    눈물을 세고 계신다.

 

나를 아는 것이 최고의 지혜다.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지만, 내버려 두면

    남자처럼 강해진다. 죄는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가늘지만, 나중에는 배를 묶을 수 있는

    밧줄처럼 단단해 진다.

 

소문은 살인보다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만 죽일 수 있지만, 소문은 한꺼번에

    세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소문을 퍼트린 사람, 그 소문을 믿는 사람, 그리고 소문의

    주인공이 그들이다. 손가락이 자유로이 움직이는 까닭은 소문을 듣지 않기 위해서다

    소문이 들리면 서둘러 귀를 막아라.

 

안식일을 가르켜 '3의 눈'이라고 한다. 6일 동안 육신의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다면 안식일의 휴식으로 나를 바라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현인이 되는 7가지 조건

   1)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침묵하라

   2) 남이 이야기할 때 말허리를 자를지 마라

   3) 대답할 때 당황하지 마라

   4) 늘 알아듣기 쉬운 말로 질문하고, 조리 있게 대답하라

   5) 먼저 쉬운 일부터 시작하고, 어려운 일은 뒤로 미루라

   6) 자신이 모를 때는 인정하라

   7) 사실을 인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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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조선의 난세를 넘다 이한우의 군주열전
이한우 지음 / 해냄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조선추천권유도 10

 

선조의 시대는 조선 건국 때부터 이어져 온 '공신 훈구'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사림(士林)정치'의 

시대를 연 조선 역사의 전환점이 된 시대라 한다.

선조 시대를 조명하기 이전에, 중종 14년에 사림에 의해 공격을 받아 사사된 [조광조]대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조광조를 빼고서는 중종, 인종, 명종 및 선조로 이어지는 관련 역사를 

정확히 이야기할 수,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정으로 [연산군]을 내몰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약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신진 세력을 통해 

강화하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때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조정에 진출한 [조광조]를 활용

하고자 한다. 조광조는 도학정치의 양대 목표인 '소격서 철폐''현량과 도입'을 추진하여 

성공을 이루는 등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개혁 사업을 추진해 나가는데, 한 발 더 나아가 기득권의

아킬레스건이나 마찬가지인 '위훈 공신'삭제를 '대사간 이성동'과 함께 추진하게 된다

'위훈 공신'이라 함은 연산군을 몰아 낼 때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벼슬로 당시 시대적 

혼란상을 틈타 아무런 공적도 없는 인물들이 자신의 공적을 포장해 혹은 유력자의 공훈에 끼워

넣기 식으로 국가로부터 벼슬과 훈작을 받은 것으로 당시 '위훈 공신' 문제는 기득권 세력의 

큰 아킬레스건이었다.

이는 연산군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위훈 공신'들을 견제하려는 중종의 구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급속히 진행되게 된다.

 

훈구 세력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곱 차례에 걸친 강력한 주청 끝에 조광조는 자신의 

계획을 관철시킨다. 조광조가 추진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수구 기득권 세력의 강한 반동을 

불러 일으킨다.

위훈 공신의 중 한 명의 자식이 바로 [희빈 홍씨]로 희빈은 당시 중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던 

[경빈 박씨]를 통해 중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을 기획하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조광조가 연루된 '주초위왕(走肖爲王)'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최고 개혁가 조광조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궤(不軌) , 반역을 의미하는 것과 

동일시 되던 시대였다.

 

선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형제간 왕위에 오르는 순서의 문제는 있었지만 왕후의 몸에서 나지 

않은 임금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방계 승통'의 문제는 늘 선조를 따라 

다니는 아킬레스 건이었다.

 

명종 18년 명종의 장자인 [순회세자]1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에 이어 두 번째로 터진 국가적인 비극이었다. 세자를 국본(國本)이라 

하여 중히 여겼기 때문에 [순회 세자]의 죽음은 왕실 뿐 아니라 조선의 장래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비극적인 중대 사안이었다.

공교롭게도 명종에 앞선 '인종'도 후손 없이 죽었기 때문에 [순회세자]의 죽음은 조선 왕실의 

후계 문제를 오리무중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된다. 명종이 죽기 직전 어머니인 인종의 비인 

[문정왕후]는 적장자로 명종의 계비 중에서 자신과 사이가 가장 좋았던 [창빈 안씨]자식 중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후계자로 지목하게 된다. (을축년의 하서)

 

명종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을 점검해 보면 정치 세력들은 당파를 만들어 당쟁의 불씨를 

만들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임꺽정)이 활개를 치던 시기로 선조는 

어린 나이(16)에 왕위에 즉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영민한 행동(유모의 

궁궐 출입 사건, 환관 감축 등)으로 세인들의 관심은 물론 칭송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여기에 덧붙여 집권 초기 [영의정 이준경] 등과 같은 우직하고도 충직한 신하가 선조를 든든하게 

보좌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문정왕후]와 어머니 [인순왕후]의 든든한 후원으로 비록 정통성이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왕권의 연착륙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선조는 즉위 초기, 말수도 없고 너무 내성적이어서 신하들과 왕족의 우려를 자아냈으나 명종의 

'국상 예'가 끝나자 경연에 적극 참여하여 반론하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매우 논리 정연하고 

세밀했다고 한다. 이렇듯 선조는 즉위 당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가지(권한 이양 및 파천 등) 불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은 

국가적 재난 대처에 대한 학습이 전혀 안 되어 일어난 사항이 아닌가 생각한다.

예로서 영국의 왕세자를 비롯한 비록 형식적이지만 왕의 제도가 살아 있는 국가들의 왕위 승계 

예정자들을 보면 대개가 군 출신이거나 해당 국가의 군사학 관련 학교를 졸업한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국가 위기 시에 지도자로서의 그 진가를 발휘하는 연습을 평시에 교육시켜 놓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시에 많은 위기 시 '극복 연습' '대처 방법을 훈련'하는 

곳으로 적당한 분야가 군대 밖에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그런 연습 즉, 국난 위기 시 리더로서 대처하는 연습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아마 당시의 왕위 계승자들 대부분이 그러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 전 

국토가 전쟁터로 변한 당시에는 더 심했을 것이다 -

그러했기 때문에 자신의 왕세자가 적에게 인질로 잡히고, 선조 자신도 야음을 틈타 백성을 

속이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비록 혜안(명나라의 쇠퇴, 왜의 재침 등)을 가진 선조라 할지라도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는 장수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일일이 지시하는 모습과 자신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전투 중인 장수에게 징계를 내리는 모습 또한 전쟁 중인 상태에서 왕위를 

이양하겠다고 난리를 피는 모습은 한 국가의 지도자인 왕이 아닌 옹졸하고, 치졸한 인간의 

전형이었다고 밖에는 달리 평가할 게 없을 정도로 정말 안타까움 그 자체였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자신의 잘못 혹은 오판으로 인한 벌어진 사항까지도 전부 신하들의 

잘못(파천 혹은 몽진)된 보필로 돌리는 모습은 왕으로서 절대 보여 주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을 뒤집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여진 정벌의 영웅 [신립 장군]에 관한 것이다.

선조는 자식 중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자식으로 [신성군]을 꼽고 있었으며 나중에 신성군을 

[신립의 딸]과 혼인시켜 신립 장군과는 사돈관계였다. 임진왜란 당시 여진 정벌의 영웅이었던 

신립 장군이 강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마는데, 이유는 자신의 판단 실수로 적에게 전략적 요충지

(충주)를 너무 쉽게 내 주어 자책감으로 탄금대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역사는 마치 신립을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그의 딸이 신성군

(인조의 큰 아버지)과 혼인을 했고, 그의 매부 구사맹은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렇게 밖에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언급되고 있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운 [명나라의 원군]에 관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는 쇄국 일변도의 정책을 펼쳐 덩치만 컸지 제국이라 할 것도 없을 정도로 

엉망인 나라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따라서 명나라는 왜군과 싸울 의향도, 전략도 세우지 

않은 채 형제국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출병을 하였으나 왜군과의 싸움보다 협상을 통해 종전

(終戰)을 도모하려 했다고 한다

여기서 '기미론'이 나오는 데, '기미'란 명나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직을 내리고 일본의 

조공을 받아 들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과거 역사 시간에 마치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적극 도와 준 나라로 명나라를 들고 

있으니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이야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오던 가장 큰 사건을 하나 해결한다.

바로 "종계변무(宗系辨誣)" 수정 사건이다. 종계변무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대명회전'에 잘못 기록된 사항을 수정하려는 숙원사업을 

말하는 것으로, 선조 이전부터 수 많은 왕들과 신하들이 중국 측과 접촉하여 그 조항의 변경을 

추진하려고 중국에서 온 사절이나, 중국에 있는 권력층들에게 줄을 대고 틈틈이 로비를 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종계변무 수정에 관여하였던 인물들은 조선의 이런 곤란한 점을 노려 

뇌물만 챙겨 먹고, 수정해 주지도, 할 의사도 없이 속만 끓여 왔다고 한다.

선조는 이 조항에 대한 변경을 무작정 요구하지 말고 중국의 역학구도가 바뀌는 시점에 집중 

로비하여 이를 바로 잡자는 전략을 세워 이를 관철시켰다고 한다.

 

종계변무의 문구 수정 사항은 잘못된 서술에 대한 문구를 수정했다는 단순함을 뛰어 넘어 

조선 건국 이래 가장 골치 아픈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조상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동시에 자신 

역시 '후궁의 손자'라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FK고 굳은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기의 내용은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나름 정리해 놓은 것인데,

나는 작품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선조를, 그 당시의 정치, 경제적 사항에 대해 의미를 두기 위해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정리해 보았다.

 

1. 절대 권력자에게 맞서기 보다는 충성이 최선이다. 

선조(하성군)의 할머니 [창빈 안씨]는 명종비인 [문정왕후]의 절대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 빈의 자격으로 감히 왕의 총애를 독차지 하려 하지 않고 항시 온화한 성품으로 당시의 

실권자인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다시 말해 '알아서 기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반대로 [창빈 안씨]보다 서열상 위인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명종의 후임으로 

앉히고자 모사를 꾸미다 [문정왕후]에게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한다.

하여간 무조건 절대자에게는 맞서기 보다는 멍청스러울 정도로 충성을 다하는 그런 부하로 

인식되게 하는 게 상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2. 좋은 스승이 많았다.

조선 국왕 27명 중에서 가장 스승 복이 많았던 인물이었다.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황, 기대승, 이이, 노수신 등과 같이 성리학의 최고봉을 자랑하는 이들이 

선조에게 학문적 기초를 놓아 주었다. 실록 어디를 보아도 선조가 하성군 시절 누구로부터 어떤 

교육을 체계적으로 개인 교육을 받았는지 언급된 기록은 없다.

전통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는 자칫 권력 투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에 왕과 같은 서열에 있는 

종친들의 학문 연마는 금기시 하는 것을 관례화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명종은 어린 하성군에게 

왕실의 직접적인 후계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파격적으로 '왕손 사부'를 임명하여 교육을 받도록

했다고 한다.

권좌에 오른 직후 '이준경'은 통치자로서의 기본 소양을 함양시키고자 제일 먼저 '이황'선조의 

스승으로 삼도록 천거해 이를 관철시킨다. 이황을 스승으로 천거한 이유는 '현실과 이상이 적절

하게 조화를 이루며 당면한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의 과제를 해결해 가는 국왕의 모습'을 만들려 

했었기 때문으로 생각되어진다.

선조가 개인적으로도 존경하였던 이황은 '소학''땅에 떨어진 ''를 바로 세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책'이라 하여 '소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이후 선조의 스승으로 이황의 

추천을 받은 정지연과 그의 추천을 받은 인물 '이산해''이 이'가 있었다.

선조의 교육 방향을 놓고 [이준경][이 이]는 언쟁을 벌이게 되는데, 언쟁은 왕의 '경연장'으로

까지 번져 권력 투쟁의 장으로 바뀌고 만다. 또 하나 중대한 사항은 선조의 교과목이었다.

선조의 학습 과목 편성은 주로 '주자학' 일변도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결국 선조로 하여금 

주자학은 물론 중국에 대해 자발적인 굴종으로 나아가게 하는 폐단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3. 이준경과 같은 멸사 봉공의 자세를 견지한 충직한 신하가 있었다.

이준경은 '실록' 등에서 평소 중망(重望)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 하였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이준경은 당시 그의 형 '이윤경'과 함께 '이봉(二鳳)'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 이를 시행하게 하는 등 선조 초기 

정권 안정에 기틀을 다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조 5년 이준경이 세상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통치에 관한 유언을 하는데,

첫째 말하는 것을 준엄하게 하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 포용하고 공손히 대하고

둘째 신하가 진언할 경우 너그러이 포용하고 예우해 주고

셋째 군자와 소인을 분간하고

넷째 사사로운 붕당을 깨트릴 것

등을 강조한다. 이렇듯 그는 죽으면서까지도 선조의 통치 기반이 영속되기를 기원하였다.

 

역사가들은 "선조의 시대를 연 것은 이준경이지만 선조의 치세를 뒷받침해 준 인물들을

길러 낸 것은 이황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 선조는 심성이 유약한 반면, 변덕이 심하였다.

선조의 소심함과 자신감 결여는 두고두고 신하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데 이는 결국 선조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통성을 지니지 못하고 출발한 선조는 당쟁이 극에 달했을 때에 별다른 조치 내지는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항시 미온적이고 수세적이었는데 선조가 그리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대안 부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 권력자들 간의 당파 싸움이 어느 정도 심했는지 전란으로 인한 몽진의 와중에서도 지속

되어 선조의 심신을 끝까지 괴롭혔다고 한다. 이는 정파간의 싸움이 치열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선조의 심성이 유약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 선조의 유약한 심성을 엿볼 수 있는 행동 중의 하나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처우 문제로 

자신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을 추존왕으로 추대하지 않은 것과 [광해군 시대]의 권력 투쟁 

구도가 광해군과 신성군의 대립으로 나타난 일차적 이유가 유약한 심성의 소유자 선조에게 

있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공통된 평가라고 한다.

 

반면에 선조의 변덕을 가늠할 수 있는 사건이 몇 가지 있는데,

선조 24년 자신 스스로 공론화하던 [세자 책봉 문제]를 신하인 '정철'이 정식 공론화시키자

그 이야기를 꺼낸 정철을 심하게 질책을 하였고, 임진왜란 중에 '아홉 번'에 걸친 '양위 파동'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이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속여 가며 '파천'을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단행한 

사람은 바로 '선조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 대신만 갖고 나무라고 있는데 왕으로서 또한 

지도자로서 보여서는 안 되는 행동을 보이고 있는 점은 한편의 희극이었다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할 것이다.

 

선조는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해 섬멸하라'는 자신의 명령대신 방비를 하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를 한 전투 현장의 장수 이순신 역시 극도로 불신하고, 미워한다.

더욱 압권인 것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공신대감'을 선정하여 포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책임을 '비변사''도원수'의 책임으로 하는 돌리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은 변덕과 옹졸함의 

극치를 보여 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5. 국가 존망의 위기에 대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우찬성 최 황]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결정을 내리는 선조에게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친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마냥 소극적인 지시로 일관하고 있다.

 

"모든 것은 비변사에 내리면 비변사가 자세히 살핀다. 내가 친히 보더라도 무슨 일을 하겠는가."

 

선조의 이 답변은 위기에 대처하는 정신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선조는 외세에 대비코자 이이로 하여금 군사를 양병토록 지시하는 등 나름 대비는 

하려고 하였으나 '유성룡' 등에 의한 반대로 이를 관철시키지 못한다. 왕으로서 국가의 위기 

사태가 직면하였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자세가

있었어야 되지 않은가 생각한다.

또한 왜란이 한창일 때 '몽진'을 하면서 보여 준 선조의 행동은 전혀 국가 존망의 위기를 극복해 

보려는 의자가 전혀 없어 보이는 왕으로 비춰지고 있어 못 내 아쉬운 점으로 남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더욱 웃긴 것은 전쟁 중에 있는 상태에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이 

'권력을 세자에게 이양'하겠다고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과 여차하면 명나라 쪽으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점은 정말로 그 분이 조선의 왕이었는지가 의심될 정도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6. 발전적인 논쟁과 함께 언로가 살아 있었다. 

허접하고도 저질스런 당파 싸움말고 고차원적인 논쟁이 선조 시대에 있었다.

그런 논쟁을 한 대표적인 두 축이 바로 '이준경''이 이'.

이준경은 이 이의 급진 개혁을 위험스럽게 보았고, 이 이는 이준경이 낡은 세력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항시 부딪혔었다. 성격적으로도 이 이는 직선적이고, 논리적

이어서 일도양단(一刀兩斷)을 좋아 했다. 조선의 맹자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은 것이다.

이 이는 이준경이 죽자 그가 선조에게 올린 '유서장'을 논박하는 '논붕당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는 이준경이 유서장에 언급하며 우려한 붕당에 대한 우려를 쓸데 없는 것이라고 반박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었으나 끝내는 이준경이 예언한 대로 붕당이 생성되어 갖은 음모를 펼치게 되자 

'이 이'는 어느 한 쪽에 서기 보다는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서 붕당을 조정, 화해시키려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한다.

 

선조 13년 충북 음죽에 사는 [전욱]이라는 한 진사가 선조에게 조정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는 데 선조는 이를 묵살하지 않고 적극 수용해 진상 규명을 시키게 한 것만 

보아도 언로는 살아 있었다고 보여 진다.

 

영의정 이산해와 좌의장 유성룡 모두 동인이었다.

왜란 발발직전 조정은 이미 동인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동인의 대일 전략은 기본적으로 

'선린 외교'였다. 이 이가 10만 양병설을 외칠 때 유성룡이 이를 적극 반대하고 나선 것은 자신들

가 달랐기 때문에 부정을 위한 부정을 한 것이 아니라 일단 '선린 외교를 통해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 볼 것을 강력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또 당시의 언로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는 위에서도 몇 번 언급되고 있지만 '수렴 첨정' 관한 

사항이다.

 

선조 등극 초기 명종비인 [인순왕후]에게 '수렴첨정'을 권하여 승낙을 받아내 이를 시행하는 

과정과 세월이 흘러 신하 '백인걸'이 인순왕후에게 섭정을 거둬 줄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시키는 

내용은 절대자와 신하간에 언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언로가 살아 있지 

않았다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게 나의 시각이다.

 

위에서 언급한 나의 시각이 '선조'를 전부 평가할 수 없다.

- 누가 인정해 주지도 않겠지만 -

분명한 하나의 사실은 선조는 참 지난한 삶을 살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되지를 않는다.

왕위 계승, 임진란, 당파 싸움 등등등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나, 준비 안 된 

왕권 계승으로 맘 고생이 상당히 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조를 통해 진정한 리더의 표상을 다시 한 번 그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책으로부터 얻는 지식들

- 나라에 큰 공이 있을 때는 조(), 덕이 있는 인물이었을 때는 종()을 붙였다.

 

- 하성군이 즉위하면서 하성군의 아버지 덕흥군은 [대원군]이 된다

   조선 시대의 대원군 제도는 이때 생겨난 것이다. 다른 두 대원군은 철종의 아버지

   '전계 대원군', 고종의 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있다.

 

- 태강릉이라 불리는 태릉과 강릉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능과 그녀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을 일컫는 말이다.,

 

- 선조의 측근 기대승은 전한(典翰)이란 벼슬에 있었는데, 이는 왕의 문서를 작성하는

   지체교의 일을 하면서 경연관도 겸임하는 중요 자리였다.

 

- 어진 이를 알아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알고서 신임하는 것이 더 어렵다.(기대승)

 

- 이이가 선조에게 올린 [동호문답]은 임금의 학문하는 방법과 정치라는 도리를 문답체로

   정리한 것이다. 또 내성외왕을 이루라며 '성학집요'도 올렸다.

 

- '선묘보감'이란 실록 중에서 선조 시대의 통치와 관련된 기록들만 따로 정리한 일종의 

   다이제스트 실록을 말한다.

 

- 홍문관 관리들이 의기투합해서 중종에게 학문과 정치, 민생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하는

   유명한 상소는 '일강구목소'이다.

 

- 중국 명나라에서는 중기부터 양명학이 지식 사회는 물론 정치세계까지 석권하다시피

   했다. 주자학은 이론을 중시했고, 양명학은 실천 중시 학문이다.

 

- 조선에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인물이 남언경이며 실록에 근거해 보면 '주역'

   처음으로 공부한 국왕은 태종 이방원이다.

 

- 오활하다는 말은 '우활(迂闊)하다'에서 온 것으로 세심하지 못하고 부주의하며 덜렁거려

   일을 믿고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 태종이 처남 형제들을 몰살 시킨 이유는 왕권을 농락할 수 있는 붕당을 이루려는 조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때와 유사한 붕당의 조짐이 있었던 것은 성종 때부터이다.

 

- '지제교'란 국왕의 공식 문서를 짓는 일을 하는 직책.

 

-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형서(邢恕)라는 인물은 배신의 대명사이다.

 

- 후궁의 서열

   (1) ---> 귀인(1) ---> 소의(2) ---> 숙의(2) ---> 소용(3

    ---> 숙용(3) ---> 소원(4) ---> 숙원(4)

- 조선 시대에는 5명의 추존된 왕이 있었는데

   1) 성종의 의경세자 -----------> 덕종

   2)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 원종

   3) 영조의 배다른 형제 ---------> 진종과 장조(사도세자)

   4) 헌종의 아버지 -------------> 익종

 

-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완성하자 선조는 관계자에게 포상을 하게 되는데,

   이 중에 동시 통역사안 [홍순언]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명나라 장수 '석성'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 친한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우리는 임진왜란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은 '부로쿠의 역'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는 분로쿠 천왕 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정유재란은 '게이초의 역

   이라고 부른다.

 

- 원균과 그의 아들 원사웅, 원연, 원전은 모두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맞서서 싸우다

   전부 전사했다.

 

- 왜놈의 새끼들이 부산에 첫발을 내디딘 지 67개월 10만에 전쟁이 종료됨.

 * (나의 생각) 일제 36년하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합치고 가끔 노략질까지 합치면 거의

                   반세기를 우리를 못살게 군 놈들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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