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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9
조선시대의 정치적 사상과 크나큰 역사적 사건 주변에 송시열은 항상 있어 왔다.
그가 행했던 일에 대해 그린 작품이다.
[송시열의 등장과 성리학의 발전 기반]
송시열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장생의 문인이라는 점과 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유학자라는 점을 인정받아 과거도 거치지 않고 '대군사부'가 되어 조정에 진출하는데
여기서 그가 조정에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는 이유는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
(장자 소현세자는 급서한다)의 스승이 되는데, 이 봉림대군이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이
되면서이다. 졸지에 왕의 스승이 되어버린 송시열은 그의 문하생들을 중요보직에 앉히게
된다.
[효종의 북벌의지와 송시열에 대하여]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줄기차게 송시열에게 북벌을 요구하나 송시열은
의도적으로 이를 외면하였다고 한다. 효종은 북벌을 가시화시키기 위하여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송시열과 송준길을 각각 '이조판서'와 '대사헌'에 올려 '인사권과 탄핵권'을
주어가면서까지 또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절대 금기시하던 왕과의 독대까지 하면서 북벌을
종용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를 외면한다. 그러던 중 갑자기 효종이 서거한다.
[1차 예송논쟁 혹은 기해예송]
자식인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喪服)의 기간이 문제되었다.
엄밀히 따지면 효종은 장자인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엄밀한 의미에서의 차자
즉, 둘째 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의미를 갖는데 만약 차자의 상복을 입을 경우 선왕인 인조, 효종, 현종이
모두 정통성을 부여 받지 못하는 왕이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의 장자 직계들만이 왕권을 계승하였다는 점이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따라서 상복의 문제는 입는 기간의 문제 이전에 왕권의 정통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은 '부모가 3년복을
입지 못하는 이유 4가지' 즉, 사종지설(四種之說)을 올리게 된다.
[송시열(서인)과 윤휴(남인)의 대결]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제1차 예송논쟁 당시부터 불거진다.
예송논쟁으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학문적, 정치적 적대자로
변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사문난적 논쟁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제2차 예송논쟁과 경신환국]
현종의 어머니가 죽으며 복제 문제가 또 다시 문제로 떠 오른다. 숙종은 등극하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송시열일파로 인해 곤란을 겪는 것을 목격하고는 서인인 송시열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입지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과감한 인사 조치를 취하며 송시열을
유배시키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서인 송시열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던 청남파(소론)와는 달리
허적은 송시열의 문제를 온건하게 처리하자는 탁남파(노론)였는데, 허적이 사사받으므로
해서 온건파가 조선 정치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서로 물고 물리는 당파싸움과
공작 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난정의 등장과 송시열의 몰락]
장옥정이라는 여인이 숙종의 총애를 받다 왕자를 낳는다.
장옥정이 어린 왕자를 후계자로 삼는 과정에서 남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83세를 일기로
사사를 받고 죽는다. 송시열의 죽음은 남인의 재집권이라는 의미와 함께 조선 정치사에서
'화해의 정치'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結言]
송시열 그는 분명 뛰어난 학자였기는 하였으나, 그 학문이 갖는 특색인 '스스로를 정학
(正學)이라 부르고 여타의 학문은 사학(邪學)이라고 규정'한 편협된 사고로 인해 조선
개국의 정치적 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우리의 국가를 정체와 후퇴 속으로 몰고가게
만든 역할을 하였으며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는 사상과 이념이 변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정치적 기득권층의 기반 유지를 위한 사상의 정체로 인해 우리의 모든 면은 후퇴를
하게 된다. 송시열 그는 분명 훌륭한 성리학자였는지는 모르나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학자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