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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8
조선시대를 통 털어 왕이면서 사후에 후손들로부터 '宗'혹은'祖'라는 명칭으로 추존되지
못한 분이 두 분 계시는데 '연산군(10대)'과 '광해군(15대)'이다.
작품은 그 중, 광해군이 어째서 존호를 부여받지 못하고 '君'으로 격하되었는지 역사적
배경과 당시의 국제 정세 등에 대한 분석서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의 부족한 역사관에 부끄러움을 한
없이 느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그 어느 왕보다 외유를 많이 하여 민생의 처참함을 직접
목도한 광해군은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안정화시키고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각종 역사서는 증거하고 있으나 나는 여기서 광해군의 실책 몇 가지
확인해 보았다.
첫째, 정책의 중심으로서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비록 정권을 잡고 있는 ‘대북파’들의 입김이 거세게 작용해서 왕권이 제대로 발휘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왕으로서 중요한 것은 참모들의 진언을 듣는 것도 중요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왕으로서, 권력의 핵심으로서 추진하고자 하는 일에 확신이
섰을 때 이를 밀어 붙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한 결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광해군은 당시, 정치적인 입지가 부족했다고는 하나 너무도 대소
신료들에게 크게 의존하였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말해 역사는 후세에 전해지는 치적에 의해 당시의 왕을 평가할 뿐이지 왕을 보위
하는 신하를 통해 당시의 왕을 평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민중과 긴 시간을 함께 호흡했음에도 민심을 너무 몰랐다는 점이다.
임란 당시 북진해 오는 왜군을 피해 왕과 왕자들은 제각각 도피생활을 한다.
이때 함경도 쪽으로 피난 간 왕자들을 현지 백성들이 잡아서 일본인들에게 넘겨주었다는
점과 임란 당시 다른 집보다 궁궐이 제일먼저 불이 났다는 사실을 광해군은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확립하고 자신과 선대 왕의 꿈인 북벌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할 수 있겠으나
왜란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궁궐을 중수하고, 신축하고 거기다가 국방을 튼튼히
한다는 이유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한 것은 큰 잘못이라는 것이다.
몸뚱아리는 하나인 백성들이 이를 모두 몸으로 때우기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계획이나 연차적인 시행이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것인데 '夷夷制夷'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북파에 의해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난 인물들을 왕 자신의 뜻을 세우고자 아무런 후속
대책도 없이 정권의 핵심으로 불러 들여서, 종내는 이들에게 배척 당하는 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 하나 아무리 화급하다 할지라도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또 다른 '毒'인 명나라군을
들인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명나라군은 끝내 조선에 대해 각종 행학이 지나쳐
나중에 광해군 자신의 족쇄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이이제이’ 전법을 쓰기 위해서는 정말로 심사숙고한 뒤에 추진했어야 할 것이나
광해군은 비록 자신의 아버지인 '선조'가 추진했다고는 하나, 이에 대한 방비가 미약했다
할 것이다.
광해군이 당시 처한 정치적 국제적 상황 속에서 행한 각종 정책이나 외교술은 당시의
시대적 안목을 꿰뚫고 행하였다는 점에서는 반론은 없으나 너무도 소심하게 추진한 것이
오히려 그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작금의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임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이기는 하나,
민생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하는 ‘국회’라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와 날로
쌓여만 가는 민생 법안들을 보면서 또 다른 광해군의 시대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