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 100세 철학자의 대표산문선
김형석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 권유도 5

 

뭐가 바쁜지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갑자기...우연히 발견된 암에 맞서서 굳건히 항암 치료를 잘 받고 있었고 몸 상태가 좋은

날은 친한 친구들과 등산도 함께 다니던 친구가, 항암 치료가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조만간

예전처럼 등산을 하자며 즐겁게 웃던 친구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어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친구가 가는 마지막 길도 배웅하지 못한 채 나는 또 다른 나의 바쁜 일상과

마주하면서 살뜰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런 친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나도 이제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에 다다른 나이가 되었나하는

생각 속에 떠나간 친구를 생각하며 살아 있을 때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또 갑자기

찾아 올 수 있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살아 있는 내가 지금 당장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예전에 읽었던 적이 있는 작품이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뒤적이게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저자인 노 교수님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인생관을 통해 누구나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한 번은 가야 할 길 앞에 놓인 각자의 남은 시간의 활용에 대해 깊은 연륜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경험을 토대로 인생 선배로서 담담히 전해주고 계실 것으로 생각하고 작품을

펼치기는 했으나 읽는 동안 저자의 삶에 대한 관점보다는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죽음, 사랑,

이별 그리고 남은 시간 등과 같은 그리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아 굉장히

당황스럽기도 하였고, 씁쓸하기도 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누구나 가야 할 길이라면 산 자는 살아 있는 존재로, 떠난

사람은 과거 속의 단순한 존재로서 그 유, 무형적 존재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는 게 나의 평소

삶과 죽음을 바라보고, 대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난 죽은 사람에 대해 크게 애통해하고 슬퍼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거나 환생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상황이다 - 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면, 살아 있는

사람만이라도 떠나 버리신 분의 뜻을 받들어 현재를 중시하며 자신의 삶에 더욱 집중하여

후회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 노력하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하며,

이승을 떠나신 분들도 역시 그런 자세를 더욱 원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승을 떠나 버린 분을 추억한다는 미명하에 주지육림의 제단을 쌓고 그 어떤 애곡을 불러 준다

한들 그의 죽음이 번복될 것이며, 떠나가신 분이 환생할 것인가?

일정한 도를 넘은 요식 행위는 아무 쓸모없는 행동이요, 남을 의식한 의전행위로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차라리 그 분들이 살아계실 때 한 번 찾아가 인사와 위로를 하고 마음과 마음을 교통하는 것이

더욱 뜻깊은 행동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조상을 모시는 행사나 고인을

모시는 과도한 전통적 관습에 그리 찬성을 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 모든 행위는 살아 있는 자들의 보여주기 위한 행위일 뿐 더도 덜도 아니라 생각한다.

이는 내가 기독교적 종교에 몸을 담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에 모여 그 분의 살아 생전의 추억을 반추하며 후손으로서, 친구로서

아니면 기타의 관계로서 돌어가신 분을 추모하는 형식이 되어야지 지금은 많이들 개선이

되었지만 아직도 구태의연한 보여주기식 행위가 너무 많아 나는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

어찌 되었던 살아 있는 자들은 산 자들대로 그 현실적 소임을 다 하는 것이 떠나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 역시 언젠가 친구가 떠난 길을 갈 것이고, 나의 주변인들 역시 나의 죽음을 애달파하고 슬퍼할

것이지만 그런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현실적인 삶의 무게로 인해 언젠가는 나의 대한 생각과 추억을 잊을

것이고 또 그들도 자신의 삶을 분주히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나로 인해 무조건 슬퍼하거나 무한정 애통해 할 수는 없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자들은 살아 갈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남아 있는 시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언젠가 자신도 마주하게 될 그런 이별에 대해 또 남은 자로서,

떠날 수 밖에 없는 자로서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점에 대해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작품이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작품이 이야기하고, 저자가 말씀하시는 대목 중 가슴에 와 닿은 이야기만 추려보았다.

-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 남아 있다는 증거다.(P 40)

- 외로움을 잊는 길은 자신을 망각하는 일이다.(P 41)

- 외로움은 밖에서 찾아드는 것이 아닌 마음속으로부터 차오르는 것(P 42)

- 정신생활이 풍부한 사람은 언제든지 고독을 느끼지 않는다. 항상 자신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 45)

- 그가 지니고 있는 고독의 척도가 곧 그의 인간의 척도(키에르키고르, P 52)

-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예술이 없고, 사랑이 없는 곳에 아름다움이 없다(P 54)

- 사랑이 있는 고생이 축복이다.(P 66)

-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아의 발견과 완성이라는 일차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P 67)

- 나의 나 됨은 육체적인 자아가 아니다. 정신을 지닌 인격으로서의 자아다. 정신적 자아야말로

  나를 만드는 자아이다(P 68)

- 자아의식은 언제 나타나는가? 가르치고 배우는 동안에 자신의 정신이 자라고 자아의식을  

  지니게 된다. 이때의 교육은 넓은 의미의 체험이다. 교육은 자기를 발견하게 하는 중요 

  요소이다. 교육이 그치면 성장도 그친다. 체험이 멎으면 삶이 끝난다.(P 69)

-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문제로 만족하는 사람은 자아의식도 빈곤하며 그에게는 확실한

  개성이나 뚜렷한 자아성이 없다.(P 70)

- 값있는 일생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P 73)

- 생활의 진리는 참여의 진리이다. 참여가 없는 진리는 언제나 진리가 될 수 없다.(P 75)

- 인간의 완성은 어디서 오는가. 인격의 충분한 성장과 우리의 삶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 속에

  남기는 일이다. , 삶의 의미와 가치를 나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역사 속에 남길 수 있을

  때 참다운 완성이 가능해 진다.(P 77)

- 신체가 늙으면 인생 자체가 늙어버린다는 착각을 버려라.(P 81)

- 나이 들면서 가장 삼가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노욕이다(P 83)

- 노인의 자산은 지혜이다. 젊었을 때는 용기가 필요하고 노년기가 되면 삶의 지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독서를 계속하는 것이다.(P 93)

- 누구나 인생의 등산을 시작하기는 하는데 왜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가?

  가장 불행한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 마음 자세이다.(P110)

- 99의 고생 끝에 100의 만족과 영광이 오는 것이 아니라, 1에서 100까지 지속적인 기쁨과

  행복을 차지하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1)

- 인생의 등산은 제각기의 선택과 목표에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즐겁게 일하면서 영광스런

  성공에 이르는 것이 인생의 등산인 것이다.(P112)

- 내가 있다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의 출발이며, 이로부터 세계와 우주는 그 자리와 의의가 있게

  된다.(P123)

- 예수에게서 배우고 따라야 할 미덕 중 첫째가 온유와 겸손이다.(P136)

- 내가 믿는 종교적 신앙이 최고라고 해서 이웃 사람이나 국민들의 문화와 전통을 경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것은 스스로의 무지와 인간적 범악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P137)

- 종교적 신앙이 필요한 것은 종교가 선한 질서를 창출하고 육성해가며 그 선한 질서의 바른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종교와 신앙을 위해 바치는

  시간, 노력, 재정을 과학과 도덕을 위해 제공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게 살 수 있다면

  종교계는 많은 것을 과학과 도덕에 양보해도 좋을 것이다.(P138)

-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의 조건이다.(P143)

- 기독교의 기업이나 경제 윤리는 간단하다. 열심히 일하고 부진런히 노력해서 경제적 부를

  쌓으라. 그러나 그것은 너와 네 가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과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론이다.(P144)

- 기독교는 직접 사회경제 문제를 해결 짓기 위해 뛰어들지는 않아도 그 선한 해결과 성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과 이상을 제시해주어야 한다.(P1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이긴다 -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랍 벨 지음, 양혜원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10

 

내가 존경하는 분 중에서 종교 이론이 강한 분이 계시다면 본 제목과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내용이었고 작품을 통해 깨달음을 확인한 그런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붙잡고 물을 수도 없었다. 본 작품을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

 만 초심자들도 약간의 고뇌만 한다면 쉽게 이해할만한 그런 내용이었지만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겉모습만 자칭 기독교 신자인 나와는 달리 나의 와이프는 뼛속까지 착실한 크리스찬이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미안하게도 수시로 아내에게 던져서 괴롭혔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1. 태어나자마자 죽거나, 깊은 산골에서 살다 주님이나 예수님을 알지도 못하고 죽어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2,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예수님은 정말 인간을 사랑하신다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무조건

   유황불과 지옥불로 벌을 주실까?

3.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들어 보면 대체적으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가는 준비만

   하는 사람들 같다. 그럴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 땅에 우리 인간을 태어나게 하셨는가 바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시지?

4. 다 사랑한다고 하시면서 이 땅에 정말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왜 구원하지 않으시고 착한사람을

  등치는 사기꾼들을 왜 활개치고 돌아다니게 세상을 만드셨나?

등 이었다.

이 질문을 놓고 마누라와 싸우다가는 화해하고 또 싸우기를 수 없이 했었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항상 그 답을 스스로 찾고자 노력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본 작품이 그런 답을 줄 수 있는 것 같아 접하게 되었다.

작품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 답을 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질문을 던져 주고

있었는데, 나와 같은 덜 열렬한 신자뿐만이 아니라 비신자들도 가질 수 있는 기독교와 주님에

대한 의문들이기에 나는 가슴으로 읽으려 노력했다.

과거 한 때 우리 사회에서 한 편의 CF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CF 내용은 산골 소녀 영자네 집에 모회사 이동통신이 설치된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CF

소녀는 일약 대 스타가 되었고 아마도 얼마간의 출연료도 받았던 모양인데, 이를 노린 불한당

같은 놈들이 출연료를 강탈하기 위해 소녀의 집에 들어갔다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했으며 그

소녀는 충격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산골에 살면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다 돌아가신

그 아버지와 영자라는 소녀가 죽게 된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없을까?'

나와 토론을 벌이던 와이프의 결론은 '갈 수 없다'였고, 나는 '간다고 보장은 못 하지만 만약에

못 간다면 소녀와 소녀의 아버지는 너무 억울하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작품도 이런 내용을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느 소녀가 자동차 사고로 15세에 죽었는데, 그 소녀가 12살 이전에 죽으면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는 데 그 소녀는 12세를 넘겼으니 하나님이 거두시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굳이 12세를 넘어서 살 필요가 있을까?

대충 살다 12살만 되면 죽던지 죽임을 당하는 게 맞지 않을까?

또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추 수용소에서 히틀러의 만행으로 아무 이유 없이 독가스 실에서

죽어간 자매가 있었는데 한 소녀는 11, 언니는 15살이었는데 죽어서 보니 동생은 천국에

언니는 12살이 넘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잣대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은 바로 이런 점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무심하게도 어떤 답도 주지 않고 있지만,

작품의 서두를 보면 작품을 추천하고 있는 여러 분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었지 않나 생각한다.

작품의 내용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각종 추천사들을 읽어보면

추천사 1.

저자는 인간을 협박하고 종교적 신념을 배타적으로 갖도록 만들기 위해 천국과 지옥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 세상에서 진실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우리가 눈뜨기를

호소하고 있다. 결국 사랑만이 이 모든 절망과 패배의 시간을 영원한 감격으로 전환시킬 힘의

근본임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추천사 2.

그의 관심을 지옥 자체가 아니라, 지옥에 대한 집착 속에 숨은 좁은 우리. '당신들의 지옥

말함으로써 '우리들의 천국'을 확보하려는 바리새인 같은 우리의 실상이다.

 

추천사 3.

내세에서의 지옥에 대해서는 두려워 떨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 지옥의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다. 저자는 현세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은 거듭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혹은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 대개가 '누가 구원받지 못할까?를 즐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저런 추천사 보다 가장 가슴에 닿은 내용은 '임어당 선생'이 말씀으로

 

"내가 가 본 교회에서는 항상 분노한 목사가 분노한 목소리로 분노한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다"

 

였다.(나도 그런 기억 밖에는 없다)

 

내가 과거 교회 그러면 생각나는 모든 내용을 두 줄로 요약하신 아주 정곡을 찌르는 임어당

선생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날벼락처럼 나를

'죄인'이라 부르고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 사사건건 '지옥'에 간다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이,

전도사가, 교역자들이 정말 싫었고 그런 주장을 하셨다는 주님과 예수님은 더욱 싫었다.

그렇지만 와이프를 사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그런 설교가 주는 의미를 나름대로의 연구

끝에 정확히 알고는 그리 겁먹지 않게 되었지만 아직도 뭔가 찜찜한 구석은 남아 있다.

기독교가 뭔지, 산골에 사는 영자네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찾아가 그냥 그렇게 살면

지옥에 간다던가, 최후의 날에 유황불로 심판받는다고 하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짧은 시각으로 우리 기독교를 보았을 때, 기독교에 매료되어 믿게 하기보다는 위협당하여 믿게

하려 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 설교자들은 메시아의 복된 말씀 전파가 아닌 위협으로 일관하면서 그 분의 참 뜻을 입만 열면

비신자들에게 '지옥''유황불'을 들먹이며 위협 아닌 위협을 일삼으면서 다가 올 신천지를

준비하라고 강제하고 있는 게 오늘날 우리들의 기독교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 대한 무기력을 유발시키는 발언을 서슴지 않게 하고 있다.

작품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람들을 다른 어딘가로 가게 하는 것이 예수가 하시는 일이라면, 기독교 핵심 메시지와 이생의

 관계는 고작 다음 생에 필요한 것을 손에 쥐어 주는 것 밖에는 안 된다.“

 

는 논리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최선이란 말인가?

제반 여러 이야기를 읽으면서 최종적으로 이야기하는 저자의 이런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가 던지는 중요 질문에 대한 작품의 요약과 거기에 덧붙인 나의

의견을 간단하게 피력해 보면

 

 

질문 1) 인간이 저지른 일순간의 실수를 이유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수천 년의 세월을 보내게

          하는 게 진정한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성경에도 자식이 밥을 달라고 할 때 돌을 줄 부모가 없듯이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매일 놀기만

해 얄미운데 밥 때만 되면 짜증내며 밥 달라고 보챈다고 밥 대신 흙덩이나, 돌덩이를 던져 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육신의 부모보다 더 크나 큰 사랑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빌미로 인간에게 영원한 벌을 주신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저자와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생명을 경시여긴 흉악범이나 전쟁같은 반 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놈들까지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실 지 여부는 좀 뒤에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위에 해당하는 간단한 사항만을 놓고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사소하게 저지른 순간의 실수 - 인간의 긴 일생을 놓고

보았을 때 - 를 이유로 절대 영원한 벌을 내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2) '천국'은 진실로 있는가?

 

나는 '천국'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천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각박한 현세를 사는 인간들에게 최소한의 '희망'도 없다는 이야기로

밖에는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천국'이라는 희망마저도 없다면 그 날이 그 날이고,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니 '절대 꿈도 꾸지 마라 그런 나라는 없다'라는 의미라고 한다면

현세의 고난과 괴로움을 무엇으로 이겨내고 힘든 하루 하루를 무슨 낙으로 견뎌 낼 것이며 그런

고난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는가?

'천국'의 실체는 사람마다 각자 주관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공통적인 것은 아마도 걱정, 근심 없는

세상, 고통과 고난 없고 항상 복과 즐거움이 넘치는 신나는 곳일 것이다

현재가 힘들고, 어려워도 보다 나은 내일, 복되고 아름다운 날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마인드 아니겠는가?

, 미래란 희망의 현실적 표현이고, 천국이란 각박한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의 또 다른 희망의

현실적 증표라고 생각해 볼 때 나는 반드시 '천국'은 있다고 굳게 믿는 바이다.

천국이 반드시 있다고 믿는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이생의

각박한 삶을 살고 돌아온 자녀들에게 편히 쉬게 해 주실 처소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덧붙여서 저자가 '천국'에 대한 단상을 강조한 몇 가지를 첨언해 이야기한다면,

'천국''존재 유무'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생각의 방식에 따라 현재 살고 있는 자신의 '시간''에너지' 사용 방법도

달라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

으로 사는 방법을 자신을 통해 배우게 하고 있다.

, 예수께서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 베푸는 것 그리고 시간을 사용하는 방법을 세상에서

지속되도록 지금 여기서부터 연습할 것을 가르쳐 주면서 '천국'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세상의 고통도 동일한 방법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 '천국'에 가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하시는 것은, 누가 가고

누가 못 가는가에 대해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는 현재의 영원하고, 강렬하고,

실제적인 기쁨과 평화와 사랑의 경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천국'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단순히 '언젠가는' 아니었다. 그건 현제의 실재였다.

그 경계를 흐리시면서 하늘과 땅이 합해지고 미래와 현재가 합해지는 삶을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라고 우리를 초대하셨다.

 

 

질문 3) 그렇다면 '지옥'은 정말 있는가?

 

아주 어려운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데, 아주 수준 낮은 나의 주장일 것으로 비춰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천국이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지옥'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개의 인간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로부터 받는 중압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어서 '지옥'가는

것에 대해서 무척 신경을 쓰고 있지만 지구상의 지옥에 대해서는 그만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게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자의 이 주장에 대해 나는 천 %, % 동감하는 바이다)

'천국'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그 어떤 반대 개념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지 못 할 때 일어나는 거대한 사회

전반적인 붕괴와 혼란에 이르기까지, 악을 지칭할 단어가 필요하다고 보았을 것이며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로 아마도 '지옥'이라는 단어가 제법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중세 유럽 당시에 태동된

작품, 예로서 단테의 '신곡'을 읽어 보더라도,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유는 그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음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태어나 사람답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반

인륜적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 눈물을 흘리게 했던 인간들에 대해 비록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시는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런 인간들에 대해 일정기간 단죄를

반드시 하실 것이라는 개인적인 소신이 있기 때문이며, 그런 인간들을 벌 줄 수 있는 곳으로

'지옥' 만한 장소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께서는 이교도와 이방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도록 설득하려고, '지옥'을 사용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라고 하신 소명과 정체성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하기 위해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대해 '지옥'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하시는 데, 그 단적인

예로 ''히브리 성경'의 경우 '지옥'이라는 단어나 그러한 개념을 묘사하는 단어가 없고, 죽음과

무덤을 일컫는 단어들이 몇 개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지옥'이라는 단어가 12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영어로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게헨나'로 불리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따져 보면, '''골짜기'라는 뜻이고, '헨나'

'힌놈'이라는 뜻으로

, '게헨나''라는 뜻은 힌놈의 골짜기로 예루살렘 성의 남쪽에서 서쪽에 걸쳐 있는 실제 장소로

그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다고 한다. 쓰레기 처리장이란 무엇인가?

각종 폐기물과 불필요한 물건들이 물질로서의 자신의 생을 다한 뒤 소각되고 매몰되는 현장

아닌가. 쓰레기를 소각시키듯이 악인들을 완전 폐기시킨다는 상징성으로 당시 쓰레기

처리장이었던 '게헨나'라는 단어를 차용했을 것이고, '지옥'이라는 곳도 그 '게헨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으로 여겨 '지옥''게헨나'라는 곳을 동격으로 염두에 두고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참고로 '바울''사탄'의 존재는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존재였다고

하는 바, '지옥''사탄'에 대한 사용 의미를 잘 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질문 4)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이 해석해서 들려주시는 우리의 이야기를 믿거나 아니면 우리가 해석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고수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믿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복음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축소된다면 기쁜 소식은 문지기를 지나 클럽안으로

들어가는 티켓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작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지옥에 가지만 자신은 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이 벌이는 잔치는 재미가

없다. 복음을 즐거운 참여가 아니라 천국 입장권으로 이해하면 폭발적이고 해방감 넘치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기타 주요한 문구들

-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정말 포기하지 않으신다. 결코

- 참으로 겸손해지고 상한 마음으로 화해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사과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들어가게 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열쇠 구멍을 통해서 '문이 잠겼구나 미안하다 여기에

  좀 더 일찍 왔더라면 어떻게 든 해 보았겠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씀하실까?

- 결국은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왜냐면 결국 사랑이 이기기 때문이다.

- 성경이나 고대 신앙을 보면 동물을 제단에 바치고 그 피를 뿌리는 모습이 보이는 데 이는 바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는 신이나 세력이나 신적 존재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모든 문화가 신들을 만족시키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더는 그러한 희생이 필요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정말로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신을 철저하게 만족시킨 궁극적

  희생이셨기 때문이다.

- 이생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같은 것이 주어져야 한다.

- '속하지 않은' 그룹을 배제시키고 '속한 그룹'만 계속 인정하고 지지하는 편협한 복음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복음이 아니다.

- 예수는 죽음과 재 탄생의 양식이 우리를 지탱해주고 고취시키는 유일한 삶으로 가는 길임을

  보여 주는 근원이시며, 힘이시며, 모범이시고, 보증이시다.

- 자신의 죄와 증오를 꽉 쥐고 놓지 않으려는 것은 마치 낙엽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나무와

  같다. 가을에 붙잡혀 있으면 봄은 오지 않는다.

- '십자가'는 새 창조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상기시키고 언뜻 보게하고,

  가리키는 아이콘이다.

-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다. 그러나 예수는 어느 한 문화로 차출되거나 그에 소유되지

  않으신다. 예수라는 말을 쓸 때는 어떤 예수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랑 때문에 예수가 오셨고

  사랑 때문에 예수는 계속해서

  해마다 모든 사람에게 오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을 듣는 강물
김진태 / 해냄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3

 

작품은 수월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기독인으로서 불교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나 잘못된 시각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차원

에서 내 것이 중요한만큼 남의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로 작품을 접해 읽었는데 역시 철학적

내용이 많아 솔직히 이해가 너무 어렵다.

과거 어느 고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전에 남기신 말씀 중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들은 적이 있는데 본 작품도 그런 연장 선상에서 이해하려 노력은 해 보았으나 간간이 보여지는 수월스님의 행적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가 이제까지의 삶을 고정된 틀 속에서 바라보았던 나를

바깥으로 인도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였으나 대체적으로 난해하다고 밖에는 할 이야기가

없다. 어찌 되었던 불교와 관련된 여러 기초 상식을 알게 해 준 작품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들

 

- 홀로 있을 때 나는 온전히 나다. 벗과 함께 있을 때 반쪽이 나다. 여럿이 있을 때 나는 없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P 29)

- 인도에서는 절을 상가라마(Sangharama)’라고 한다. 우리는 승가람혹은 가람이라 부른다.

  ‘상가우리, 여러 사람을 뜻하고, ‘아라마행복이 있는 곳’, ‘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한

  뜻으로 해석하면 뭇 사람들의 행복이 있는 곳이 된다.(P 36)

- ‘천수경은 자비가 끝없는 관세음보살게 온몸 던져 욕심, 성냄, 어리석을을 없애고 끝내 깨달음
  을 이루고 말리라고 다짐하는 뜨겁고 간절한 바람이 담겨져 있는 노래로 천수경자비의

  경전이라고도 한다.(P 46)

- ‘지혜란 삶이 비어 있음을 보는 힘이요, ‘자비란 그 비어 있음 가운데 피어나는 눈부신 꽃이다.

(P 47)

- 부처님이 되기 전의 싯다르타는 우루벨라숲 속에서 여섯 해 동안의 긴고행을 끝내고 자신의

  수행 생활을 냉철하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P 50)

- 예비승을 의미하는 사미승에서 사미란 인도말 사마네라(Samanera)’에서 온 말로 악을 그치고

  자비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P 54)

-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하늘 천 따 지를 하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P 61)

- 깨달음의 순간이 끊어짐이 없이 이어가 욕심과 어리석음의 옛 삶이 다시는 끼어들 수 없게

  하는 노력 아닌 이 노력을 보림(保任)이라고 한다.(P 76)

- 조실(祖室)이란 대중들을 지도할 수 있는 높은 수행력을 지닌 스승에게 올리는 자리이다.(P 85)

- 우리 선조들은 상투가 없는 사람을 반팽이(半便)이라고 불렀다.(P 97)

-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보살이다.

  곧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는 두 개의 만다라이며, 부처님은 문수와 보현이 서로

  만나서 피워낸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인 것이다. 문수가 존재의 참모습응 밝게 보는 눈이라면,

  보현은 그 밝은 눈이 끝없이 토해 내는 손이요, 발이요, 입이다.(P131)

- 불교의 진수는 화엄이고, 화엄의 결론은 보현이다.(P132)

- 188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을 때 이들을 목숨으로 막아낸 이들이 강계출신

  포수단 오백 명이었다.(P137)

- 삶과 세계를 해석하는 힘을 불가에서는 욕망으로 본다욕망이란 덧없음에 대한 무지(無知)이며

  비어 있음에 대한 눈가림이다.

- 참된 사랑과 자비심은 나 없음’, 곧 무아의 진실에 눈 떳을 때만 생긴다.(P156)

- ‘신발은 사람의 영혼을 망친다’(P170)

- ‘샛섬(간도)’의 유래?

  여진족의 자손인 청나라 사람들이 북경으로 터를 옮기자 그들이 살던 곳은 빈터가 된다.

  청나라 황제가 청나라 사람이든 조선 사람이든 들어가 살 수 없는 지역으로 선포하여 조선

  청나라사이에 갈 수 없는 섬이란 샛섬 혹은 '간도'라 칭하였다.(P190)

- 연해주란 프리(Pri, 연안), 모르스키(Morskii, 바다)라는 러시아말을 풀어 놓은 것으로

  블라디보스톡 지방을 말한다.(p192)

- ‘진실은 갈라설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삶을 떠난 진실은 한갓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진실하지 못한 삶 또한 삶이 아니다.(P194)

- 승려들의 법복(法服)은 다른 말로 자비의 옷이라 부른다.(P195)

- 중국 도문애서는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부른다. ‘도문이란 골짜기또는 원나라 때의 벼슬

  이름인 만호(萬戶)’를 뜻하는 여진족 말인 두맨을 중국글로 나타낸 말(P196)

  1931년 만주를 침략한 일제는 이 곳에 크게 번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과 그들의 무장 투쟁을

  막아 없애려는 한 방법으로 흩어져 있던 여러 마을을 어거지로 한 곳으로 모아 지금의

  도문시를 만들었다.(P197)

- ‘성냄이란 본디는 없는 거짓 나를 절대라고 생각하고 참으로 있다고 보는 데서 오는 삶의

  질병인 셈이다.(P223)

- 삶에서 바라봄의 중요함은 아무리 힘주어 거듭 말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바라봄의 자리,

  이것은 모든 삶이 스스로의 삶의 길을 열어가는 갈림길이며 모든 종교와 철학이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되는 갈림점이기 때문이다.(P237)

- ‘관음이란 완성된 삶의 다른 이름이니, 나 아닌 나를 보는 밝은 지혜의 바다이며 너 아닌 나를

  노래하는 따뜻한 자비의 고향인 것이다.(P251)

- 죽음은 당하는 일이 아니라 이루는 일이다.(P273)

- ‘열반이란 모둔 맞섬이 사라져 버린 큰 평온이란 뜻이다.(P274)

- ‘깨달음이란 삶과 죽음이 본디 없는 것을 밝게 보는 일이며 사무치게 맛보는 일(P2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추천 권유도 5 

 

런던의 어느 화실, 화가 배질 홀워드는 참으로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젊은이

도리언 그레이라는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려지고 있는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청년

모델의 모습에 빠져 시종일관 감탄의 표정을 짓는 헨리 워튼.

그는 (),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지적인 표정이 시작될 때 끝나 버리는 것이지.

지성이란 그 자체가 과장의 한 형식이기 때문에 어떠한 얼굴의 상태이든 그것을 망가뜨리거든.

이 사람은 절대로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을 거야.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이 사람은 머리가

없는 아름다운 생물이니까

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의 이 말은 본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구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헨리 경의 이런 말에 동의라도 하듯 주인공은 악마적인 유미주의(唯美主義) 사상에 사로잡혀

자기가 어떻게 되든, 또는 무엇을 하든 언제까지나 젊고 아름답게 남고, 대신에 자신의 초상화가

늙고 추하게 변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주인공 도리언은 소극장의 여배우 시빌 베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여배우의

저급한 수준(여배우로서의 자질, 목소리 등)을 확인하고는 여배우와 결별하게 되는데, 이에

충격받은 그녀는 한껏 부풀었던 자신의 미래가 파탄난 것에 대한 실망감으로 자살로 생을 맞이

하고 만다.

그 직후 도리언을 탐욕의 세계로 이끄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헨리 경으로부터 전해받은

문제의 노란책’ - 나는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을 갖고 저자가 작품의 주제라고

생각되는 여러 이야기를 토해내고 있는데, 솔직히 작품을 접할 때는 이해가 되었더라도 돌아서면

무슨 내용이었는지 잊어버려 상당히 어려움을 겪으며 작품을 접할 수 밖에 없었다 을 받고

난 뒤의 도리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추악하게 변해가고 있음을 보았다.

이 내용은 도리언이 화가를 살인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해당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부분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 나는 3번 연속해서 읽고 또 읽었으나 아직도 부분적인 이해만 가능해 한스럽다 -

도리언은 자신과 관계된 추문을 전해주고 삶의 방식을 바꾸기를 원하는 화가를 살해한다.

- 위에서 언급한 노란책을 통해 얻은 추문에 대처하는 방식을 도리언의 방식으로 실행한 것이

- 그 이후 그의 삶은 더욱 피폐해져 가고 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그 저주스러운 초상화를 찢어버리려고 그림에 칼을 꽂지만 그것은 그

자신을 죽이는 칼이 된다. 늙고 초라하고 주름투성이의 얼굴로 변해 버린 그는 바닥에 쓰러진다.

그 앞에 더할 나위 없는 아름다움과 젊음으로 빛나는 그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었다.

주인공 도리언은 영원한 젊음과 미모를 꿈꾸었지만 끝내는 추악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

것이었다.

도리언 그레이, 그는 자신의 외모가 아니 자신의 싱싱한 청춘이 언제까지 유지되기를 원했고

청춘에 대한 변화는 초상화에만 나타나기를 원하여 그가 원했던 외형적인 자신의 바램은

이루어졌으나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진실한 내면의 모습(초상화)이 시간이 갈수록 늙고 추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그런 초상화에 기대어 살게 만든 화가를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만다.

인간의 욕심이란 밑도 끝도 없이 확장되어 왔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최초의 인간의 욕심이란 이브의 꾐에 넘어가 금단의 열매를 먹은 아담, 하늘에 닿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 당시만 해도 그러한 개념은 공동체의 주류적 사고였을 것이고 대다수의

인간들은 믿었을 것이지만 상상이었지만 대다수는 기대내지는 바램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바벨탑'을 쌓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게 허무하게 판정되었고 인간들은 이루어지지 않는 원죄에 대한 형벌을 받았다.

도리언 그레이 그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가 어떤 꿈을 꾸었던간에 그것은 그의 것이지만 그 내용이 자연의 순리를 역행할 때는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를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초상화는 단순한 자신의 인물을 이야기하는 단어가 아닌 인간 본연의 야욕을 대변하는 도구

였던 것이며 사티로스의 얼굴을 한 사악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여러 타락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는 것과 쓸데없는 영원한 젊음을 지속시키기 위해 매달렸던 초라하고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작품의 말미에 언급되고 있는 한 문장이 나를 바라보고 웃고 있다.

 

늙은 사람의 비극은 늙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늙었음에도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P356)

      

작품에 등장하는 문구들

 

-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지성의 표정이 시작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P 18)

- 가장 흔해 빠진 것이라도 비밀에 감싸여 있으면 아름답게 변하는 것이다.(P 20)

- 웃음은 우정을 시작하는 썩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절교의 방법으로 최고(P 26)

- 예술가는 아름다운 사물을 창조해야 하지만, 자기 삶에 속하는 그 무엇도 작품 속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술을 마치 일종의 자서전으로 대하는 시대에 살고 있네,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어, 언젠가 나는 세계에서 그 감각이 무엇

  인지 보여 줄 걸세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세상은 결코 내가 그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보지 못할 걸세.(P 32)

- 인생의 목적은 자기 계발에 있어,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한다.

  이것이 우리 각자자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인 거야(P 41)

- 사회가 강제하는 공포, 그것이 도덕의 토대이며, 신이 주는 공포, 그것이 종교의 비밀이야(P 41)

- 변덕과 일생에 걸친 열정이 유일하게 다른 건 변덕 쪽이 더 오래간다.(P 51)

- 세상에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건 청춘 뿐이다.(P 55)

- 고통에는 동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너무 추악하고 너무 끔찍하고 너무 사람을 비통하게

  만드니까요. 현대인들이 고통을 공감하는 방식을 나는 병적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공감해야 할 것은 색채, 아름다움, 삶이 줄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삶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줄일수록 좋은 법이지요.(P 77)

- 인류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대단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이 세상이 지은 원죄다. 동굴에 살았던 최초의 인류가 웃을줄 알았더라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P 78)

- 남자들은 인생에 지쳤기 때문에 결혼하고, 여자들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결혼한다.(P88)

- 삶에서 한 번만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천박한 사람들일세그들이 변함없는 사랑이라고,

  변치 않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 나는 그것을 관습의 권태 또는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부르겠어.(P 92)

- 시작은 언제나 자신을 기만함으로써 시작되고 그 끝은 언제나 다른 이를 기만함으로써

  끝난다.(P 97)

- 이상하게 열정이 갖는 단단한 논리와 지성이 누리는 감정적으로 다채로운 삶을 보는 것,

  그 둘이 어디서 만나며 어디서 갈라서는지 관찰하는 것, 그것들이통합되는 지점을 보는 ,

  그것들이 어디서 불화하는지 보는 것, 이 안에는 큰 즐거움이 있었다.(P105)

- 경험에는 윤리적 가치가 전혀 없었다. 경험은 사람들이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P107)

- 지혜를 가장한 충고는 실은 겁쟁이들을 위한 책, 그 저자가 상식이라는 이름을 무의미하게

  반복할 뿐인 비겁의 책으로부터 인용한 구절 뿐이얶다.(P111)

- 자식은 우선 부모를 사랑한다. 그러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식은 부모를 판단한다.

  그리고 때로 자식은 부모를 용서하는 밥이다.(P120)

- 가난이 문간으로 들어올 때 사랑은 창문으로 날아간다.(P122)

- 여자들은 남자에게 걸작을 쓰겠다는 욕망이 생기도록 영감을 주지만, 언제나 그 욕망의

  실현을 죄절시키지.(P141)

-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은 결코 갖지 안는데 있다.(P149)

- 여자들은 자기들의 감정에 의지해 살아간다. 여자들은 자기 감정만 생각한다. 여자에게 여인이

  생긴다면, 그것은 극적인 장면을 함께 만들어 낼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다.(P161)

- 선의의 결단이란, 과학적 법칙에 개입하려고 하는 무용한 시도일 뿐이다.

  선의의 결단이란 것의 기원은 순전한 허영심이다. 선의의 결단은 호사스러운 불모의 감정을

  우리에게 주지, 그 감정은 약한 사람들에겐 분명 모종의 매력을 자는 감정이다.(P175)

-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쾌락을 발명해 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쉽게 슬픔을 끝낼

  있다. 나는 나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감정들을 이용하고 즐기고, 또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다.(P188)

- 감정을 되풀이해서 느끼는 건 감상주의자들 뿐이다.(P190)

- 관능은 길들이거나 죽여할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섬세한 본능을 지배적인 특징으로

  갖는 새로운 영성의 요소가 되어야 한다.(P221)

- 최소한 문명사회라는 곳은 부유하며 동시에 매력적인 사람들을 향한 추문을 결코 믿지 않으려

  한다.(P238)

-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수많은 감각, 복잡한 여러 개의 형태를 가진 존재, 그 안에 여러 기이한

  생각과 열정의 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육체부터가 죽음이 거느리는 괴물 같은 질병의 오점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P239)

- 여자들은 승산이 있을 때 운을 시험하고 남자들은 승산이 없는데도 모험을 한다.(P294)

- 관능을 수단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영혼을 수단으로 관능을 치유한다.(P303)

- 심리학자들은 죄를 향한, 아니 세상이 죄라 부르는 것을 향한 열정이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장악하여 육체의 모든 신경섬유와 뇌수의 모든 세포가 끔찍한 충동에 지배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순간에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잃는다. 인간은 마치 기계가 그러듯 저절로 무서운

  종말은 향해 움직여 간다. 선택의 자유는 박탈당하고 양심은 살해되거나, 살아있다면 반항에

  매혹을, 불복종에 황홀한 매력을 주기 위해 살아 있을 뿐이다. 신학자들이 지치지도 않고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모든 죄악은 불복종의 죄악이다. 복종하지 않는 도도한 정신, 악의

  아침 별이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 그것은 반항을 위한 추락이었다.(P312)

- 늙은 사람의 비극은 늙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은 늙었음에도 여전히 젊다는 데 있다.

                                                                                                           (P3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 권유도 5

 

나는 본 작품을 두 번에 걸쳐 숙독했음에도 아직도 작가의 저작의도 내지는 작품이 주고자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 작품을 읽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올라온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생고생하며 찾아보았으나 흡족할만한 답을 찾지 못했다 -

 

역자의 후기를 읽어보면

오늘의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위 사랑한다고 함은 자신을 속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으로서 자신의 생각에 대한 배반이거나 아니면 실제에 대한

 배반이라고 본다. 이 같은 비정상적인 특이한 사랑의 이야기를 작가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되도록 형상화했다

소설이란 작가의 자백이 아니라 함정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추구하는 것

작품 속 주인공의 한 사람인 테레사의 코드는 육체‘, ’영혼‘, ’현기증‘, ’나약‘, ’전원시‘, 낙원이며,

 ’토마스의 것은 가벼움‘, ’무거움그리고 프란츠사비나의 것은 여자‘, 성실‘, ’배반‘, ’음악‘,

 ’어두움‘, ’‘, ’행진‘. ’아름다움‘. ’고향‘, ’공동묘지‘, ’강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이 너무 난해하다는 생각 속에 역자의 소회를 먼저 읽고 작품을 접하고 있지만 솔직히 내게

는 너무 벅찬 내용과 주제가 아닌가 생각하며 역자가 기록한 내용도 진정 내 맘에 조금도 들지

않는다.

어찌되었던 간에 두 번에 걸친 작품의 숙독 속에서 특정 부분을 갖고 전체를 아우르듯이 마치

작품 전체를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으나 작품을 통해 내가 분명하게 느낀 것은 작품

속 주인공들이 나누고 있는 사랑의 행태, 사랑을 마주하는 그들의 의식 그리고 그에 수반되어

벌어지는 주인공들의 사랑과 섹스와 관련된 그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또 다른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작품을 쉽게 놓지 못 하였다.

- 나의 이제까지 삶은 섹스에 있어서만큼은 주인공들과 유사하였음을 고백한다 -

 

작품은 인간의 심리적인 측면에서는 주인공 4(토마스, 테레사, 프란츠, 사비나)을 통해 보여

지고 있는 사랑과 부부(연인)관계 그리고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과 무기력감을 이겨보려는

나약하기 이를데없는 인간의 내면적 모습과 함께 러시아의 체코 침공과 전쟁 부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사선을 넘는 의사들, 자신들이 키우는 애완견(카레닌)의 죽음 앞에 한없이 나약할 수 밖애

없는 무기력한 외형적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 작품에서의 애완견은 단순한 반려견 이상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후반부에 나의 의견을 제시해 보았다 -

 

내가 지난 1998년에 본 작품을 접했을 당시 기록해 두었던 독후감을 읽어보니 너무도 작품을

단선적으로만 이해했었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는데, 시간도 흘렀고 삶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사랑과 섹스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도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에 새로운 각도에서

작품을 바라보려 노력하였으나 역시 사고의 폭이 좁고 깊이 있는 사색이 부족한 나로서는 당시

작품을 읽고 느꼈고 받아들였던 당시의 사고 연장선에서 오늘도 본 작품을 해석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어 한계를 크게 느끼고 있다.

 

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품 제목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제목에서 언급되고 있는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생명체들, 여기서는 작품의 주인공들이면서 생명체들인 이들이 자신의 지속적

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조건혹은 환경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우선 물질적인 것만 들어보면

예를 들어 물, 바람, 공기, 소주, , 휴대폰, 생선, , 아이스크림 등등등(예가 너무 치졸함)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 옛날(?) 달 착륙선이 달에 갔을 때, ’달에 토끼가 정말로 살고 있을까?‘를 비롯한 여러 질문들

물이 존재할까?‘, ’공기가 존재할까?‘ 등과 같은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회자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 말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떤 단어든 생명과 연관된 단어를 지칭할 경우에는 대개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생명과 연관성이 떨어지거나,

생명 유지에 큰 연관성이 없을 경우, ’아이스크림같이 있어도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물이나 물건에 대해서는 존재의 의미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단어인 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의미는 생명이 해당 사물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사용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작품 제목에 사용된 단어인 존재는 단순히 ()‘, ’()‘를 이야기하기 위한 단순한

단어가 아닌 생명과 연관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라고 보는 게 올바른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에게 있어 생명은 다른 의미로 해석해 본다면 곧 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인 생명 = 이란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살아있음

염두에 둔 단어로 보는 관점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존재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맞는 것일까?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주범 이 모씨, 희대의 연쇄 살인마 유 모씨

등에게도 생명의 귀중함이 녹아 있는 존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평가를

붙이려는 판단이 맞는 해석일까를 생각해 본다.

그들이 지닌 생명의 가치는 그 누가 뭐라해도 인간이기에 귀중하고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겠지만 그들이 세상을 향해 반인류적 행위를 저지른 이상 그들의 고귀한 존재적 가치는

이제 더 이상 존중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욕심 혹은 야욕을 채우기 위해 타인의 존엄한 가치를 무참히 짓밟은 그들은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데 자신이 어떻게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적 가치가 소중한만큼 타인의 존재적 가치도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받아야 함에도

그들은 그러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적 가치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고 제대로 평가

받을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가혹할지 모르겠지만 심하게 이야기해서 그들은 존재라는 단어를 적용하기가 정말 어려운, 다시 말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무가치한 존재들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존엄적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면,

또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그들을 인간의 존재적 가치가 존재하는 삶이라는 논리로 그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이 자신들의 반인류적 행동 이전까지는 그럴수 있을지는 몰라도, 참혹한 행위를 저지르고 난 뒤에 그들을 이전의 그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평가를 한다면 이세상은 아마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런 인간의 부류로 평가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따라서 생명체이면서 존재라는 단어가 적절히 사용되기 위해서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에

대한 존중과 함께 삶과 생명을 제대로 존중하는 인간이어야만 존재라는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어느 원로 정객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지만 나는 위와 같은 맥락에서

국회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다. ’국회의원이, 국회가 있다라는 말은 자주 쓴다.  

 

그렇다면 여기서 '참을 수 없다'라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

순탄하지 못하고 기대했던 것을 이탈한 것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제목 전체적인 의미는,

'일탈된 현실적인 생활의 단조로움을 깨버리려 하는 생활 속의 가치 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작품을 분석하였다.(지랄이고 잘난체 하고 있다)

 

어찌 되었던 나는 제목으로부터 얻은 결론은

이탈된 가치관을 이 세상 '마지막 낙원'이라는 '가정',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인 '부부관계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으나 너무나 존재들이 가벼워 제대로 찾지 못하고 헤매다 삶을 마감한 작품이라 평하고 싶다.

 

무의미한 사랑은 어떠한 가치도 찾을 수 없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좀 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사랑'을 매개로 맺어진 남녀 관계, 특히 부부만이 진실된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고 영위할 수 있다는 주제를 강조한 작품이었다고 여겨진다.

 

내가 위와 같은 결론에 다다른 이유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소개되고 있는 부부 사이의 핵심 매개체로 등장하는 애완견 외국의 경우

애완견이나 애완묘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하지 별도의 객체로 평가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인 점을 감안 했을 때 - 을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의도를 나름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개는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이해해 단순한 애완견이라는 이미지로 국한시켜 이해하지 말고 개가 속한 가정에 던져주는 본질적 특성 즉, 화목한 가정의 상징으로 개로 이해해 본다면 나의

이야기는 쉽게 이해될 것이다.

애완견은 죽어가는 모습을 그린 이유는 작품의 주인공 토마스가 자신의 사랑을 찾아 본부인을 버리고 떠나고 또 다른 주인공인 테레사의 어머니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는 모습에 대비하여 징계적 의미로 사랑과 건전한 가정의 상징인 애완견을 인류의 가장 큰 불안요소 중 하나인 ''에 걸려 죽어가게 함으로써 가정과 사랑의 존재적 가치를 크게 일깨우려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형적 가정의 가벼움, 정도(正道)에서 이탈된 사실과 사랑에 대한 삐뚤어진 사고를 어떤 형식으로든 합리화를 통해 정당화하려는 치졸한 인간들의

저급한 사랑의 가벼움에 대해 경종을 울리려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싶다.

- 나의 이런 판단이 맞는지 모르겠다.....하여간 힘들게 읽은 작품이다...머리가 나빠서 -

 

작품에서 언급된 읽을 가치가 있는 주요 문장들

 

- 가장 무거운 무게는 동시에 가장 집약적인 삶의 충족 이미지다. 무게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더 땅에 가깝다.(P 11)

-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해 우리들 삶의 스케치는

  무()에 대한 스케치로서 그림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P 15)

- 상대의 삶과 자유에 대해 요구를 하지 않는 비감상적 관계에서만 두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P 20)

-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이 미래의 심원에서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P 43)

- 무거움, 필연성, 가치는 서로 긴밀히 연관된 세 개념이다.(P 45)

- 책은 그녀에게 지난 세기의 멋쟁이들의 근사한 지팡이와 같은 것이었다.(P 63)

- 사랑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자면 처음 순간부터 우연들이 사랑 위에 내려앉아 있어야 한다.

                                                                                                             (P 65)

- 대학 공부를 한 사람과 독한한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풍부한 학식이 아니라 생활력과

  자신감의 차이다.(P 71)

- 꿈은 어떤(아마도 암호로 된) 보고 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미학적인 적극성을 뜻하는

  상상의 유희다. 그리고 이 유희는 그 자체 하나의 가치다.

  , 발생하지 아니한 것을 꿈꾸는 것이 인간의 깊은 욕구들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P 75)

- 현기증이란 허약을 통한 도취라고도 말할 수 있다.(P 96)

- ’배반은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반은 대열에서 이탈하여 미지를 향해 출발

  하는 것을 의미한다.(P113)

- 범죄자 정권(공산주의)들은 범죄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천국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P212)

- 정치적인 직업을 갖겠다고 결정하는 사람은 대중을 자발적으로 자신의 법관으로 삼는다.(P220)

- 외과 의술은 의사 직업의 근본적 명령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서로 접하는 극단적

  한계에 이르기까지 수행했다.(P234)

- 여성을 쫒아 다니며 사냥하는 남자들은 언제나 동일한 꿈을 찾는다

  다른 카테고리의 남자들은 객관적인 여자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지배하려는 욕구에 의해

  움직인다.(P242)

- 사랑은 메타포와 더불어 시작한다. 달리 말하면 사랑은 어떤 여자가 그녀의 첫마디로 우리들의

  시적 기억 속에 자신을 아로새기는 순간 싹튼다.(P253)

- 자기가 한 일을 모르는 사람을 벌한다는 것은 야만적 행동이냐?(P265)-오이디푸스

- 역사란 개별적인 인간의 삶과 똑같이 가벼운 존재다. 그것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휘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P271)

-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인간을 창조한 분이 진다.(P298)

- 낙원에는 관능적 쾌락은 존재했으나 흥분은 존재하지 않았다.(P299)

- ’키취란 인간 존재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그것의 시야에서

  제외시킨다.(P301) 키취는 모든 정치가, 모든 정당, 모든 정치운동의 미학적 이상이다.(P305)

- 키취의 정체성은 정치전략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 메타포, 말의 선택을 통해

  규정된다.(P316)

- 사람들이 우리를 망각하기 전에 우리는 키취로 바뀐다. 키취는 존재와 망각 간에 갈아타는

  정거장이다.(P335)

- 참된 인간적 친절이 절대적인 순수성과 자유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떠한

  힘도 갖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뿐이다.(P350)

-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맴돌지 않고 직선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왜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가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반복을 갈구하는 소망이기 때문이다.(P3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