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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간신열전
최용범.함규진 지음 / 페이퍼로드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추천 권유도 7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은 학창시절 한번쯤 들었거나 배웠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나 일부
생소한 인물 혹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해당 인물을 재 평가(?) - 나의 기준으로 - 했을 때 해당 인물이 던져주는 의미성이 떨어지거나 역사를 기록한 주류들에 의해 해당 인물의 행적이 심각히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되는 인물에 대해서는 과감히 정리에서 제외하였고, 학창시절 배운 내용을 가볍게 복습한다고 정리에 열중했는데 관련 인물들의 내용을 읽고, 정리하면 할수록 작금 우리의 정치 현실과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유사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어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을 새삼 느껴지는 모골이 송연한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희대의 간웅 ‘윤원형’에 대해 읽을 때에는 그의 분신이 오늘 우리 사회 특히 여의도에 널려 있음을 확인하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아주 힘들었다.
권력은 균형을 잡는 ‘균형추’라 했다.
벼슬과 권력이란 것은 자신에게 확보된 영향력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서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는데 여기에 언급된 여러 사람들 대개가 바로 그 ‘균형추’를 제대로
잡지 못해 후손들이 간신으로 평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저자는 꽤 오래 전에 본 작품을 기술하면서 오늘날 벌어질 이상한 사태를 예견해 그런 글을 써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구석구석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르침과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는데 특히 여의도에 계신(이 단어보다 '쳐 자빠져 있는' 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듯) 양반네들이 보고 좀 느꼈으면 한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자기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우길 인간이 한 둘이 아닐 것이며 또 남 탓 할
것이 뻔해서 내가 강력히 추천하는 방식은 머리가 모자라면 남한테 가르침을 받아서라도 꼭 깨우치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작가는 문제 있는 인물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한 뒤 아래와 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임사홍 편에서는]
작금의 우리 사회는 얼마나 도덕주의에서 자유로운지 공허한 이념의 앞세움, 유치한 흑백논리,
반대를 위한 반대, 실적이 아닌 언행과 태도를 문제 삼는 마녀 사냥, 그런 형태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이첨 편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열과 파괴의 리더십을 피해야 한다. 그것이 설령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결국 강력한 반발을 불러와 조직과 대의를 모두 상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개혁파와 단지 개혁을 명분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가짜’를 구분해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판을 예견한 종합적인 주장에서는]
우리 주변에서는 가끔 별다른 재능도 없이 줄서기를 잘한 덕분에 잘나가는 사람들을, 그들은 대개 윗사람을 위해 상식과 원칙을 적당히 굽혀준 대가로 총애를 받는다. 재능도 비전도 리더십도 없이 오직 언제 고개를 숙이고 누구에게 손을 비벼야 할지 잘 아는 것만으로 출세한다. 그렇게 해서 제 능력에 걸맞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 많을 경우 조직은 안에서부터 썩어간다. 원칙만을
주장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도 문제는 있다. 그러나 때로는 모든 것을 걸고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 공부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상이하게 기술되고 있는 몇몇 분들에 대한 것은 추가적인 학습이 더 필요해 여기 정리에서는 제외를 하고 추후 조사해 별도로 언급하고자 하는데 그
대상을 보면
1. 인종시대의 무신 정권의 단초를 제공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의 행실
2. 고려 개혁군주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공민왕대의 ‘김용’이란 작자의 행실
3. 정조대 ‘세도(世道)정치’의 서막을 연 홍국영
4. 임진왜란 당시의 원균에 대한 행적
5. 희대의 간신인 '이완용'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작품에서 언급된 여러 인물 중 아래 다섯 사람만 선정, 요약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현실과 가장 비슷한 작태를 보이는 인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 명 회(1415~1487)]
-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의 공신이 된다.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공신에 4회, 두 번의
영의정, 두 번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는 훈척의 으뜸. 폐비 윤씨 사건에 관여했다.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 되었으나 중종반정 후 신원된다.
- 그와 관련된 여러 야사가 전해오나 실제적으로 확인된 사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세조 3년, 병조
판서가 된 후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사육신 사건 이후, 사대부들의 지지를 포기한 세조는 자신의 권력기반은 오직 공신들뿐이라고
여기며 한명회를 치켜세우는 표현이 이때부터 실록에 등장한다.
특히, 중앙집권 강화와 북방영토 개척에 많은 공적으로 세조 재위기간 중 북방이 안정되고 왕조
의 뿌리가 든든해 진 것은 한명회의 공로 덕분이다.
- 중앙집권 정책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간섭을 받는 것을 참지 못한 함경도 토호 ‘이시애’가
절도사 강효문 등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며 거짓 장계를 올려 한명회를 곤경에 빠뜨리나
이내 모함으로 판명되지만 이때부터 세조는 한명회와 거리를 둠.
- 세조가 죽고 예종이 등극하면서 분경(뇌물 청탁)금지 조치, 남이 장군 문제와 권람 손녀의 문제
등으로 한명회가 곤경에 빠지나 20세의 나이로 권좌에 오른 예종이 채 1년도 안 된 상태에서
급서하면서 한명회는 기사회생한다.
--->예종의 죽음에 대한 의구심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다.
-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의 등극에서부터 한명회의 입김 뚜렸했다. 예종의 형으로 일찍 죽은
덕종의 맏아들 월산대군이었고, 둘째가 자을산군이었는데 그가 성종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그는
한명회의 막내 사위였다.
- 성종 7년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려 하자 이를 한명회가 반대했는데, 이를 이유로 탄핵
받게되고, 전에는 문제 되지 않던 분경으로 인한 뇌물 문제로도 탄핵을 받는 등의 문제가 지속적
으로 발생되는데 결정적 사건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왕실 전용의 ‘용봉 차일’을 임의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왕실을 측면 지원하는 사업으로 곤경에서 빠져 나온다.
그는 사후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한명회를 부관참시
되나 중종 이후 신원된다.;
[윤 원 형(????~1565)]
- 세조의 쿠테타 이후 이어진 훈척정치의 대미를 장식한 인물로 윤원형을 꼽는데, 그의 권력
장악력과 철저함 그리고 그가 자행한 부정부패의 모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들조차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지 이전의 간신들을 표현할 때는 '음흉하다',
'간사하다' 정도이던 것이 윤원형에게는 '개만도 못하다', '벌레나 다름없다'식으로 표현.
- 그의 누이(문정왕후)가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간택되면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데,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지만 계비인 장경왕후에게 이미 소생이 있었던 상태로 경원대군을
미는 ‘소윤’과 장경왕후의 후손을 미는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이 대립하게 된다.
- 소윤과 대윤 사이의 싸움이 장기화되자 소윤에 마음이 기울어진 중종은 윤임은 귀양, 윤원형은
파직시킨다.
- 권력에 있어서 언론과 정보의 중요성을 간파한 윤원형은 궁녀와 언론 3사의 젊은 사류들을 포섭
하는데 주력하나 중종이 죽고, 세자인 인종이 즉위하며 대윤과 소윤의 오랜 싸움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하지만 병약했던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승하하자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는데,
실록은 어지간해서 왕의 암살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인종에게만큼은 '윤원형의 음모에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인종의 뒤를 이은 어린 명종을 섭정하기 시작한 문정왕후는 정무를 조정대신에게 일임하였으나
실제는 윤원형의 주도로 대윤과 연루된 인물은 물론 조광조와 연관된 인물에 대해 철저한 정리
작업을 추진. 특히, 국정 운영 초기에는 을사사화의 주역 중 하나였던 우의정 ‘이기’와 공동
정권의 모습을 보였으나 나중에는 이기는 물론 구수담까지 제거하는데, 살아남은 사림들도
'역적을 비호하며 대왕대비를 능멸한다'는 혐의를 무릅쓰며 윤원형을 적대시하기는 힘들었고,
입을 봉하거나 초야에 묻혀 살아야 했다.
- 윤원형은 사림을 분열시켜 지배하려 했다. 그것을 위해 그가 취한 정책의 하나가 '불교의 진흥'
이었는데 ‘승려 보우’를 축으로 불교를 활성화시켰고, 승과를 설치하였으며 대규모 법회를
여는 등 억불숭유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까지 불교를 밀어주었다.
---> 노골적인 불교 진흥은 사림의 속을 뒤집어 놓는 일이었다.
즉. 당시 사림의 영수로 김인후, 이언적, 이황, 조식 등이 있었으나 김인후와 조식은 초야로 숨어
들었고 이언적과 이황은 지조가 없다는 뒷공론을 들어야 했다.
그것은 곧 서인, 남인과 북인의 극한 대립을 가져왔으며 윤원형의 사림 분열책은 사화를 넘어
당쟁까지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 모든 보직은 실세인 윤원형을 통해야만 더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었기에 그에 대한 뇌물은
극에 달했으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경제시스템(방납제도) 및 국가 납입품에까지 손을 대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하였으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서민들의 재산까지 빼앗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윤원형 그는 본처를 학대하다 죽이고 ‘정난정’을 정실 부인으로 승격시켰고 그녀에게서 난 자식
들이 대접받을 수 있도록 ‘서얼’을 허통하는 법을 만들기도 하였고 자신의 형인 윤원로를 정적들
처럼 탄핵해 목숨을 빼앗고 자신이 낳은 혼외자까지도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 명종은 중전의 외삼촌인 '이양'을 윤원형의 대항마로 키우게 되는데 영의정 심연원이 손을 써서
일부 윤원형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낭관들을 움직여 조직적으로 대항하게 하자 명종의
뜻을 간파한 관리들이 '이양'편에 서게 된다.
- 윤원형은 혼맥을 보강해 문정왕후는 물론 명종 사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려 세자빈을 자신의
측근 황대임의 딸로 정하는 데 성공하나 그녀가 죽음으로 수포로 돌아가며 세자마저 병사하자
다음 세자로 유력한 '덕흥군'에게 자신과 정난정 사이에 난 딸을 출가시키려 하나 '어딜 감히
첩의 자손을 왕손에게'라는 비난과 함께 무산되고 만다.
-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사헌부와 사간원이 합하여 윤원형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상소문이 빗발친다.
---> 명종에 의해 체직 당하고 삭탈관직 후 고향에 내려가 살다. 정난정의 자살 이후 자신도
뒤를 따른다.
- 윤원형을 통해 명분을 짓밟는 정치를 지긋지긋하게 맛본 끝에, 반대로 명분만을 강조하고 실질
을 돌보지 않는 정치가 로운 흐름이 된다.
[임사홍(1445~1506)]
- 임사홍(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사위)은 유자광과 함께 연산군 대의 '투 톱'으로 온갖 악행
을 일삼은 간신으로 알려져 있다.
- 임사홍은 주변인에 대한 관리 및 처신이 부실하여 탄핵 등을 받아 몰락하게 되는데 실록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아도 그를 탄핵하며 사용된 '소인'이라는 구체적인 증좌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몰아부치고 있는데 임사홍을 탄핵하던 관원들과 성종의 대화를 보면 어떻게 한 사람을 이렇게
까지 집요하게 몰아세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 임사홍의 아들 임승재와 죽이 맞던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자신의 아버지를 복권시키는데 성공,
복권된 임사홍은 이를 반전의 계기로 삼아 연산군 생모 죽음에 관한 것을 이슈로 반전을 꾀한다.
---> 폐비 윤씨가 죽으며 남긴 ‘금삼’을 폐비 윤씨의 모친 신씨가 간직하고 있다가 임사홍에게
넘겼고 임사홍이 이를 연산군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는 임사홀 자신도 별 잘못도
없는데 대간들의 무리한 집중 공격으로 22년 동안 유배되는 불이익을 받았다는 억울함을
폐비 윤씨 사건과 연계시켜 ‘갑자사화’의 단초를 제공함.
- 연산군은 성종 대에 비대해진 언관으로 인해 힘들어하던 차에 좌의정 이극균이 실수로 연산군 옷에 술을 엎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 같으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났을 텐데 언론 3사가
의외로 잠잠하자 '권신에 영합하여 임금을 우습게 여긴다'고 분노하며 관련자를 처벌.
---> 임사홍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명목상 절대적인 왕의 권한에 '효'를 가미한 통치 방안을
제시.
- 임사홍은 연산군의 악행을 비난하는 자신의 아들까지 죽이는 비인간적인 면도 보이고 있다.
[이이첨(1560~1623)]
- 광해군 시대를 대표하는 신하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이첨’으로 그의 발자취는 광해군의
즉위에서 인조 반정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서나 남아 있다.
그에 대해 ‘선조실록’은 ‘바른 사람이고, 단정하고 명민하여 조행과 언어가 분명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사득하고 독살스러움이 천하의 명검 막여도 못 따른다’고 극명
하게 반대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 그는 대역적이자 간신으로 몰려 처형된 후 그가 남긴 글도 전부 사라져 그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내리기 어려운 상태이다.
- 그는 임진왜란 당시 세조의 위패를 잘 관리해 또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하면서 당시 최고의 미덕
이었던 ‘충과 효’로서 선조의 눈에 들면서 권력의 핵심부로 들어간다.
---> 세자 광해군의 교사 역할 및 선조가 세자를 교체하려 할 때 광해군을 보호하려다 귀양을
가게 된 사건과 그의 가족 중에서 광해군의 세자빈이 나오면서 또 정인홍과 허균,
개시 김상궁 등으로 인해 더욱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게 된다.
- 광해군의 세자 교체설이 나오자 정인홍과 합세하여 선조에 대항하였고, 이들을 귀양보내라는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이를 이행치 않고 있다 개시 김상궁이 올린 약밥을 먹고 아침까지
멀쩡하던 선조가 급사, 광해군 즉위 후 이이첨의 귀양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또 영창대군을
밀었던 영의정 유영경의 정리, 광해의 동복 형인 ‘임해군’의 처리, 인목대비 폐모론 문제와
인목대비 부친(김제남) 역모 사건 조작 등에 이이첨이 깊이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으며 가장
악질적인 것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론 조작’에 공을 들였다는 것이다.
---> 폐모 논의 후 대사헌에서 대제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이첨은 역사 마저 ‘숙청’했다.
본래 삼정승 이하 수십 인의 각 부서 대신들이 합의호 뽑게 되어 있었던 ‘사관’을 독단으로
뽑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사초를 편집하게 했다. 선조실록 수정본을 만들게 한 명분을 줌.
- 그는 호패법, 중립외교(친명배금), 대동법 등 광해군에 의해 전략적으로 추진하려된 3대 개혁
정책 중 ‘호패법’에 대해서만 적극 반대했을 뿐 나머지 정책에 대해서는 찬성도 지지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광해군 재위 초기 신하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혁정책이었지만 실권을
장악한 이이첨은 잇단 옥사를 통해 다른 당파를 몰아낸 이후 광해군의 행동이란 ‘폐모살제’ 못지
않게 비난을 받은 무리한 궁궐 공사 밖에 없다.
- 광해군의 지지세력이던 ‘대북’내부에서 역모 사건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로 평생 동지였던 허균
문제가 생기자 허균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다. 이이첨이 명나라 사신으로 나가 있을 때
올라온 상소를 시작으로 이이첨과 광해군은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광해군이 보인 첫반응은 ‘이이첨의 짓인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그는 분열과 파괴의 리더십을 추구한 인물로 희대의 간신으로 인간 이하라고 매도당하게 된
까닭은 그가 폐모살제를 비롯한 온갖 패륜과 살육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으며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세력을 포용하고 타협하려 하지 않고 중도세력까지 ‘적’으로 지목하고 배척함으로써 반격당할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자파의 결속력을 극대화하는데만 온 정성을 쏟았기 때문이다.
[김자점 (1588~1651)]
- 안동 김씨의 일파로 대단한 집안은 아니었음. 광해군 때 병조좌랑을 지냈다 하여 일단 군사
전문가로서 정묘호란 - 뱐조호란 당시 중책을 맡았는데 어전회의에서의 논의를 보면 수준
이하의 발언을 하는 등 그의 자질을 의심받게 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재덕이나
배경이 수준 이하인 사람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인조반정과 광해군 대의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인물난이 가중된 덕분이었다.
- 인조 3년 동궁비 간택 당시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던 윤인발의 사촌 누이를 역적의 자손이라
폄하하다 인조의 눈밖에 나는 바람에 삭탈관직되고 시골로 쫒겨나나 정묘호란이 발생하며
조정으로 재 유입된다.
- 정묘호란을 치루며 김자점은 성가가 높아지나 병자호란이 발발하면서 김자점의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데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그의 군대와 각 방면의 군 지휘관들을 모아
적의 배후를 치자고 건의하였지만 김자점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다. 전쟁이 끝나고 이에 대해 문책을 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조판서가 된다.
---> 친청파라는 측면과 인조 입장에서는 다루기 쉬운 인물이라는 평이 있었기에 재 등극이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
- 그는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 강씨의 죽음과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난제를 푸는 키맨으로 활동
하였고, 소현세자 사후 후계를 정할 때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하는 데
인조의 뜻에 따라 찬성을 한 유일한 찬성파였기에 인조에 의해 중용된다.
- 봉림대군이 권좌에 오르자 김자점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기 시작하자 효종은 상소를 전격 수용
해 그를 귀양보낸다. 조선 왕조에서는 본래 선대 임금 때의 중신은 웬만큼 탄핵을 받아도 쉽게
처벌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김자점은 탄핵 시작된지 6일만에 귀양이라는 중벌에 처한다.
---> 자신을 도와줄 것으로 판단했던 청나라가 조용하자 역모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 김자점의 가장 큰 잘못은 그가 시대를 타기만 할 뿐 이끌어가지 못했고, 이끌어 가려 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혼란의 시기에 김상헌과 임경업은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키는 비전을,
최명길은 굴욕을 참고 내일을 준비하는 비전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의 행동의 실제 의미가 어떠
했든, 고통 받던 국민은 그들의 행동에서 뭔가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에서 북벌까지 정치사의 중심에 있었던 김자점은 아무런 비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이익만 바라보고 이 줄에서 저 줄로 건너뛰는 어릿광대 같았다.
* 간신의 행동 유형
1. 개인적으로 콤프렉스에 시달린다
2. 사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치우쳐 공무를 결정한다
3. 일정한 노선을 견지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한다
4. 지나친 아첨 또는 지나친 전횡으로 임금이 제대로 정치를 못하게 방해한다
5. '소인의 당'을 만든다
6. 화합과 상생이 아닌 분열과 배제의 정치를 추구한다
7. '충신', '영웅'을 모함하거나 처단한다
8. 목적을 위해 부도덕하고 교활한 암수를 쓴다
9. 물욕이나 색욕이 과도하다
10. 배신하거나 패륜을 저지르는 등 사생활이 비윤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