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광조 평전 - 사화의 시대, 성리학적 이상을 꿈꾼 개혁가의 비상과 추락 ㅣ 한겨레역사인물평전
신병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1월
평점 :
추천 권유도 6
작품을 우리 역사에서 ‘개혁’이란 타이틀로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인 ‘조광조’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기대하고 접하였지만 그런 내용보다는 ‘4대 사화(士禍)’, 그것도 제일 처절한 피비린내를 초래했던
‘3대 사화’의 배경과 결과를 더 비중 있게 다룬 작품으로 역사에 깊이 있는 지식이 미비한 이들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려는 초보 역사 애호가들에게 도움이 된 이야기였지 작품 제목처럼 어느 특정
인물에 대한 ‘평전’으로 평가하기가 다소 애매했던 작품이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내가 생각해 볼 때 ‘평전’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주인공에 대한 ‘공과(功過)’를 독자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다루어지고 평가 - 그렇게 할 경우 평전이 아닌 새로운 장르로 갈 우려가 높겠
지만 - 되어야 진정한 ‘평전’이라 할 수 있지 특정 부분만 - 주인공 전체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저자의 이야기 혹은 주장이 주인공 전체의 업적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 부각된 상태에서 ‘평전’이라 부르는 것은 역사에 기본 지식이 일천한 사람에게 그리 좋은 방식은 아니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조광조’라는 인물에 대한 ‘평전’으로 이름을 붙이려면 더 심층적으로 개인의 업적에
대해 언급이 선행된 후 그에 따른 업적에 대한 공과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각도에서 언급되었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을 읽으며 작품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나의 판단이 옳은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훈(위훈)삭제‘로 ’기묘사회’라는 파장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파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정치사의 근현대사 중 매번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이를 ‘감추려는 자’의 논란의 단골
논쟁 거리인 '‘518 유공자 명단공개’에 대한 논의를 공개적으로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정보와 상식으로는 해당 사안을 꺼내기만 하면 ‘밝히려는 자’와 ‘밝히지 않으려는 자’간
에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차제에 이 부분에 대해 조사를 명확히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해당 사안에 대해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이 항시 발목을 잡고 넘어지려는 자세에 대해 확실한 대못을 박는다는 심정으로 ‘밝히지 않으려는 자’들이 명명백백 유공자분들의 명단과 개인별 공훈 업적내지는 선정 이유를 밝혀 다시는 발목 잡는 인간들이 이 땅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후손들에게는 떳떳한 자료로 남겨보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진실을 감추려 하거나, 밝히지 않으려는 자들이 518 유공자분들이 잠들어 계신
신성한 장소에 대해 돌아가신 분들로부터 무슨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면서 이 나라의 국민이고 그곳에 잠들어 계신 분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운 조문이 가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문 오는 분들에 대해 어떤 근거로 조문을 막는지 그리고 그런 행동이 과연 옳지 행동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있으며 그런 행동이 잠들어 계신 영현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일군 오늘날의 대한민국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조문을 온 몸으로 저지하는 분들이 잠들어 계신 분들의 진정한 후손인지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계속해 오고 있었는데 이러다가는 조만간 황해도 안중근 의사와 충청도 이봉창 의사, 마산의 김주열 열사와 서울의 연세대 이한열 열사 등을 조문하려 할 때 그 지역 사람이나 관계자가 아니면 조문을 못 받겠다고 난리치거나 조문을 방해하는 집단이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으며 곧 조문오는 사람들에게 잠들어 계신 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주민등록 등본’과도 같은 증명서를 제출해 돌아가신 분과 어떤 연관성이 명확한 확인이 되어야만 조문이 가능한 날이 올 것 같아 아주 걱정스럽다.
매번 선거철이나 무슨 때만 되면 민주화 영현께 조문 오는 것을 막는 자들도 이상하고 그래도
가겠다고 박박 우기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더 이상하다. 오지 말라고 하는 데 굳이 우기며 가는 행동은 무엇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에 민주화 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을 모신 곳이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것도 아닌데....앞으로 계속 이런 저런 사유로 특정 지역에서 특정 단체나 사람들의 조문을 막는다는 것은 유공자가 특정 지역과 단체의 상징이 아니기에 또 다른 현대판 지역차별이요 인격 차별이라 생각되기에
굳이 그런 차별화가 일상화된 지역에 대해 미련을 갖지 말고 다른 민주화 영현들께서 잠들어
계신 지역을 성시화하여 국가적 차원의 지원과 관리에 적극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질 낮은 작태를 보면서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후손이라면 그렇게 치졸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번 기회에 정확히 유공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조문 오는 사람을 막고 난리 피우는 이유는 유공자 후손들 속에 가짜가 많거나 무늬만
유공자 후손인 자들이 많아 그 가짜 후손들이 난리를 치기 때문이며 또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난리를 그악스럽게 쳐대야 진짜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 속에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런 나의 생각이 완전 틀렸다고 생각하는지요?
진실은 시간이 흐른다고,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니 이런 저런 방식과 사유로 진실을 가려도 언젠가 누군가 반드시 밝혀 낼 것입니다.
하여튼 518 민주화 유공자 명단과 숫자를 정확히 알고 싶을 뿐입니다.
작품을 읽으며 작금의 이 땅에는 왜 이렇게 함량 미달의 정치인들과 무늬만 민주화 유고자들이 갑자기 넘쳐 나게 되었는지 이유가 몹시 궁금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위에서도 언급되었고, 작품에서도 ‘기묘사화’를 촉발시킨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가짜 유공자’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즉, ‘빈 수레가 요란하듯’ 가짜가 진짜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가짜가 선동적으로 난리쳐 국가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도 시끄럽게 만들어야 난리치는 가짜들을 수용하는 어떤 중재안이 나와 더
이상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어 얼렁뚱땅 넘어가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함량 미달인 가짜들도 거기에 은근 슬쩍 섞여 자신들도 진짜로 포장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혼란한 정국을 ‘숙주’로 함량 미달의 암적인 정치인들과 인사들이 갑자기 늘어나게 된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위선으로 가득한 가짜들의 특징은 누가 봐도 겉과 속이 다른 행실로 국민을 기가 차게 만들고
있지만 자칫 구설수에 휘말리기 싫은 대다수의 국민들과 매체들은 극성스런 ‘팬덤 현상’에 매몰
되지 않으려 좌도 우도 아닌 중도에서 미적지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최근 진행된 청문회에서 ‘갑’들의 비상식적 수준 낮은 행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런 후보와 그런 후보를 지명한 집단에 대해 질타는커녕 오히려 그들 편에 서서 사과 없이 변명하려는 주도 세력의 기이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대중들은 ‘너희도 별 수 없구나’라는 식으로 침묵하고 있지만 이럴 때 나서야 할 우리의 매체들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파수꾼으로서 기능을 다해
‘팩트’를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이 내 놓는 논평을 받아쓰기에 급급한 이상한 세상으로 변하고 있지만 누구하나 이를 지적하지 않거나 반성하지 않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
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어느 수준 낮은 인사가 청문회에서 문제되는 사항을 지적하자 ‘임명권자를
이기려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으나 누구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대응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 옳아서라기보다 그런 질 낮은 지적질에 일일이 대응하였다가
그런 수준 낮은 인간과 그의 평가를 인정하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춰질 수 있기 때문에
언급을 외면하는 것으로 주장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 개 무시로만 일관하고 있는 그런 자세가 좋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일견 답답한 - 민주주의는 답답한 면이 강하다 - 면도 있다.
그 이유는 그런 질 낮은 발언에 환호하는 집단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일인자가 행한 평가에
대해 아무도 비판하거나 댓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비판이 맞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근자감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호도되어 그의 생각과 시각에 벗어난 집단과 개인에
대해 조롱질 하는 것이 정의고 진리라 믿으며 더욱 활개치고 있어 그런 답답함이 극에 달하고
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저질 발언을 한 인간은 더 기세등등하여 ‘내 말이 맞으니 세상이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내 말이 맞지‘, ’나를 이길 자는 없다‘고 하면서 온갖 폼
다 잡고 콧수염 날리며 한마디 더 하고 있다. ‘내가 뭐랬어...별거 아니라 했지?’
이런 갑갑한 시절에 전진과 발전의 토대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처럼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기본기 충실과 함양 방법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초석을 놓은 우리의 민주화 유공자들 툭히 518 유공자에 대한 조사를 통해 그분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 오셨는지와 어떤 방법으로 현실적 난제를 해결해 오셨는지를 연구해
보자는 것이다.
즉, 그분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과 버려야 할 점이 무엇이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전, 현직 정치인들을 우선 대상으로 조사해 보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
조사 대상으로 그들을 먼저 선정한 이유는 작금의 현실에서 앞장서서 난리를 치니 너는 얼마나 깨끗한지 조사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난리치는 너의 조상은 이러이러한 관용과 아량을
갖고 계신 훌륭한 분이었다는 것을 부각시켜 화합과 상생의 방식을 찾아보자는 의미이며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보자는 차원에서 제안하는 것이니 용단을 내려 동참하기를 읍소하는 바입니다.
어느 신문을 통해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가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140년 전 이 땅에 선교사 ‘윌리엄’‘과 ’메리 스크랜턴‘이라는 두 사람이 한국 땅에 파송되었습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병을 앓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진료소를 엽니다. 그 진료소가 바로 상동교회입니다.
그곳에 돌을 던진 소년이 있었습니다. 전덕기. 그는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가난한 숯장수였습니다. 하지만 스크랜턴 부부는 그를 품었습니다. 그 사랑이 아이를 바꿨습니다. 그는 자라
상동교회의 목사가 돼 하늘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윌리엄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화학당,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한 번의 용서가 한 교회를 살렸고 그 교회가 도시를 살렸고, 그 도시가 민족을 흔들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로우시기 때문
입니다. 그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도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그 은혜가 지금도 우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출처 국민일보 20250728]
- 조선 전기,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던 보수 세력인 ‘훈구파’에 의해 새로운 개혁 진보 세력인
‘사림파’가 화를 당한 대표적 사화가 무오사화(1498년, 연산 4년), 갑자사화(1504년, 연산 10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이다.
* ‘훈구파’는 ‘공훈을 지닌 구세력’을 뜻하는 용어로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공신의
특권을 가지고 그 기득권을 제대로 승계한 정치 세력을 지칭한다.
---> 훈구파의 세력이 공고히 된 이유는 세조 집권 과정에서 공신이 대거 배출되었고
그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었기 때문인데 정치적으로 보수 기득권 세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강했지만 조선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외교와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학문적, 실무적 능력을 겸비했던 이들의 역할이 컸었다.
- 사림파의 뿌리는 여말선초,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한 길재
(吉再)등의 ‘영남사림파’로부터 시작되며 계유정난으로 세조가 등극하며 급속 그 세력이
확산된다.
---> 성종이 사림파 인물들을 정계로 불러들여 훈구파 견제라는 역할을 기대하지만 의리와
충절이라는 성리학 명분으로 무장한 사림파에게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다.
- 왕에 대한 견제를 주 업무로 하던 사림파들은 주로 언관직에 진출해 있었는데 왕에 대해 사사
건건 제동을 걸던 사림파들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찾던 연산군의 폭정이 더해지면서 사림파는
크게 화를 입는다.
---> 특히,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촉발된 1498년 무오사화는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초래
- ‘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사림파의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사건이 동시에
이들이 추진한 ‘과거사 바로잡기’가 훈구파의 저항을 받은 사건이다.
- 친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어 일어난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능상(凌上, 위를 업신 여긴
다)에 대한 피해 의식이 확실히 드러난 사건.
---> ’연려실기술‘에서는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모친의 죽음에 대해 알린 것이 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 무오사화 피해자가 52명이었던 것에 비해 갑자사화는 239명인데 이중 40%인 96명이
사형되었다.
---> 갑자사화는 표면적으로는 모친에 대한 복수극인 듯하지만 실제는 독재 군주(연산군)의
정치적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은 가차 없는 처벌이 뒤따른다는 어떠한 비판 세력도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사건이다.
---> 1506년 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중종)’을 옹립하는 반정으로 ‘조광조’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주요 배경이 된다.
- 조광조의 인생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 것은 ‘무오사화’로 평안도에 귀양 온 ‘김굉필’과의
만남으로 이는 영남사림파의 학맥이 기호사림파에게 접목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책은 ‘소학’으로 소학은 주자가 삼대의 이상을 실현
하기 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에서 주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으로 ‘수신
(修身)’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림파 성향에 부합되는 측면이 많았다.
한마디로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규범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책으로, 유학 교육의 입문서이다.
---> 김굉필의 학문을 계승한 조광조는 중앙의 정치 현실에서 ‘소학’을 정책 이념으로 구현
함으로써 스승의 사상을 뒷받침하고자 했다. 조광조를 위시한 중종 시대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들은 연산군 이래 퇴폐해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소학’으로 존중과 학문
의리를 구명하는데 몰두했다.(P57)
-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소학’과 함께 ‘향약(鄕約)’ 보급에도
전력을 다했다.
---> 기묘사화로 향약이 흐지부지되며 1574년(선조 7년)을 고비로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던
흐름이 중단되고 각 향촌마다 특수성을 반영한 개별 향약들이 다수 등장한다.
- 중종 반정의 주요 공신(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모두 사망하자 중종은 왕의 입지를 찾기
시작했다. 중종은 자신의 입장을 적극 추진할 인재를 찾아 나서는 과정에서 조광조를 적극
신임하게 된다.
---> 중종과 조광조의 동거와 몰락의 과정은 조선 건국 초기 신권 강화론을 주장한 정도전이
왕권 강화론의 핵심 인물인 태종에 의해 제거되었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 중종 대의 정치적 과제들 중에서 중요했던 일 중 하나는 폐위된 왕비 신씨에 대한 명예
회복이었다.
1) 소릉 복위운동
: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안치된 ‘소릉’에 대한 복위 운동으로 소릉 복위는 세조 대의
정치적 유산을 청산하고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던 조광조에게 날개들 달아준 사건
2) 폐비 신씨 복위론
: 중종을 왕으로 추대 직후 단경왕후인 왕비(연산군 처남인 신수근의 딸)를 폐위 시킨 것에
대한 복위 문제는 조광조가 주도가 되어 추진하였다.
- ‘소격서’는 원래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으로 나라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
(日月星辰)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는데, 조광조는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도덕정치의
실천을 위해 소격서의 혁파를 추진.
---> 조광조와 중종 개인 사이의 논쟁을 넘어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보여 준 사건으로 조광조가
실각한 이후 소격서는 다시 설치된다.
- 조광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자신과 손발이 맞는 세력을 원했는데 이런 인력을 과거를
통해 끌어 모으는 데 한계가 있어 인재 등용의 한 방법으로 ‘천거(薦擧)’제도를 이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 제도에 대해 강력 반발한 이가 이조판서 ‘남곤’이었다.
천거제도는 추후 ‘현량과’로 변모하여 인력 추천 방식이 더 강화되지만 이를 통해 조광조가
정치적으로 세력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결집시키는 계기와 함께 조광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원인이 된다.
---> 소격서 혁파, 향약 실시에 이어 현량과까지 추진하면서 개혁에 탄력을 받은 조광조는
중종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기득권 세력에 치명타를 가하게
되는데 그것은 정국공신의 전면적인 개정 요구였다.
☞ 역대 왕별 공신 숫자
· 태조 개국공신 52명 · 태종 1차 왕자의 난 정사공신 29명, 즉위 직후 좌명공신 46명
· 계유정난 직 후 정난공신 43명 · 세조 등극 후 좌익공신 46명
· 이시애의 난 직 후 적개공신 45명 · 예종 즉위 후 익대공신 39명
· 성종 즉위 후 좌리공신 75명 · 중종 정국공신 120여명
---> 정국공신들 중 상당수가 문제가 있는 인물임을 공표하는 것은 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으로
서는 매우 난감한 상황으로 왕으로서의 정통성 문제까지 제기될 수 있는 상황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 중종의 결단으로 바로잡을 공신 명단이 발표되는 데 약 76명의 공신 명단에서 제외됨
---> 조광조 세력은 명단 발표 4일 후 중종이 대대적인 역습에 직면한다.
- 중종은 조광조를 붕당 형성 죄목으로 전격 구금시키지만 영의정 정굉필이 조광조에게 붕당죄를
적용하면 중종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며 붕당 죄 적용이 중종의 뜻인지 홍경주나 남곤과 같은
인물의 뜻인지를 분명히 해 줄 것을 요구.
---> 정굉필 및 안당과 성균관 유생들의 논리에 중종은 일단 후퇴, 조광조 일파의 처형을
미룬다.
- 홍경주와 남곤 그리고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가 작당하여 만든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조광조를 더욱 사지로 내 몬 결과 거세되고 만다.
결국, 사관의 기록을 보면 조광조는 중종에 대한 믿음을 계속 보였지만, 조광조 세력의 성장에
부담을 느낀 중종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 남곤, 홍경주, 심정은 이들이 주도한 기묘사화로 인해 조선 최고의 간신으로 평가되고 있다.
- 중종은 조광조가 시의를 헤아리지 않고 날뛰었기에 죄를 주었다고 하면서 조광조 일파를
처리한 직후 공신 개정에 관한 일을 재 논의할 것을 지시하고 남곤과 심정을 조정의 요직에
전진 배치함은 물론 현량과 폐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조광조가 추진했던 각종 개혁 흔적
지우기에 집중.
- 인종은 세자 시절 사림파를 중용했는데 그중에서도 인종의 스승으로 활약을 한 대표적인
인물은 김인후였는데, 인종 즉위 직후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대한 신원 상소가 성균관 유생,
사헌부, 홍문관 등 곳곳에서 올라왔다.
조광조의 신원의 당위성을 알면서도 선왕인 중종의 처분을 쉽게 바꿀 수 없었기에 인종은
고민했다.
---> 1567년 선조 즉위 후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때에 이르러 가능했으며 조광조
추존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업은 문묘 종사로 1610년(광해군 2면) 광해군이 오현의 문묘
종사를 허락한다.
--->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의 영수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조식, 이황,
이이는 공통적으로 조광조에 대해 깊은 존승을 표시하고, 그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을
소임으로 삼았다.
- 기묘사화의 비극은 왕권에 대한 견제 장치로서 성리학의 이념을 무기로 하여 등장한 신권의
도전에서 신권, 즉 조광조가 패배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기묘사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정치 노선이 중종과 보수 세력의
반격을 받아 좌초한 사건으로 조광조의 사림파 학통을 계승한 인물인 이황은 자신의 언행록
에서 냉정하게 조광조를 평가하며, 조광조가 일의 형세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무리하게
개혁 정책을 추진한 점과 걷잡을 수 없는 개혁의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 타협을 이루지 못한
점을 실패원인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