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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 - 국제정치 전문가 김준형의 세계 10대 분쟁 이야기
김준형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추천 권유도 6
매번 매스콤을 통해 접하는 ‘지역분쟁’에 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는 ‘요번엔 왜?’, ‘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라는 수준으로
지역분쟁을 받아들였지 그런 분쟁의 배경 혹은 영향에 대해 관심을 크게 갖지 않았던 게 사실인데 금번 작품을 통해 지구촌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주요 지역분쟁의
원인을 확인하고는 좀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분쟁지역을 읽으면 세계가 보인다?’는 이야기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지역 분쟁이 지금 당장 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분쟁으로 인해 세계가 보였다’고까지는 이야기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고 그 보다는
‘세계’가 아닌 인간의 탐욕이, 강대국의 음흉한 계략이, 정치적 리더들의 수준 낮은
안목이,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어가야 할 종교적 이기주의가 눈에 들어온 시간이었다.
해당 작품에서 얻은 여러 경우의 수를 내가 살고 있는 우리 한반도에 적용해 보니
중국에서 벌이는 어떤(?) 행사에 맞춰 방문한 뚱보 돼지 색히의 뒤뚱거리는 모습에서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이용만 당했던 ‘쿠르드 난민’이 생각났으며,
그 돼지 색히를 격려하는 나이 처먹고 뒷방 노인네 역할만 해도 버거운 노욕에 찬
색히들이 돼지 색히를 격려하는 호전적인 수준 낮은 행동을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도 자칫 분쟁 지역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스런 마음이 들었는데 특히, 돼지
색히로 인해 국제적으로 우리 땅이면서 ‘독도’라 부르지 못하고 ‘리앙쿠르트’로 불리게 만든 일본 놈들과 같은 일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에서 벌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크게 나타난 순간이었다.
작품을 통해 작금의 지역 분쟁의 원인이 과거 강대국이었고 지금도 강대국이라 불리는 몇몇 특정 국가에 의해 자행된 결과의 산물임을 고려해 볼 때 몸뚱이만 컸지 지적 능력이 한 참 떨어졌던 중국이, 과거 열강들이 자신에게 행한 방식으로 작금의 세상에서
세계를 대상으로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에서 난동에 가까운 패악질을 벌이며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약소국 14개국을 대상으로 크고 작은 분쟁을 일으키고 있고 앞으로 이런 분쟁이 지속될 것이 예측되는데 그렇게 될 경우 과거 출간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조지 프리드먼’의 저서 ‘100년 후에’(김영사)에서 언급한 중국의 분열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게 저자도 그렇고 작품을 읽은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열강에 의해 주도되어 원래의 모습에서 변질된 약소국(?)의 모습은 분쟁 이전으로 즉,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으로 중국의 경우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해당 지역의 문화와 인종을 말살시키려 난리치는 티베트 문제와 신장 위구르 문제는 물론이고 바닷길 가로막고 지랄하는 문제도 반드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 과정에서 중국은 반드시 분열될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아무튼 지역 분쟁 역사를 읽으며 중국, 중국인들이 앞으로 펼칠 광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1.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까]
- 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데 이유는 91년 바르사뱌 조약기구가 해체
되면서 서방에 대해 러시아는 NATO의 해체를 요구하나 NATO는 동유럽 확장은 물론
새 회원국에 대해 군대와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러시아와
이웃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까지 가입하려 하자 위기감을 느끼며 침공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으로 자신들이 선택할 문제라며 NATO가입 강행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기 나라 일부로 여겨 전쟁이란 용어 대신 ‘특수 군사
작전’이라 부른다.
- 러시아는 미국에 대해 새로운 나토 회원국에 배치한 군대와 핵무기 철수를 요구함과
동시에 2014년 체결한 ‘민스크 협정’ 준수를 요청
* 민스크 협정
: 벨라루스 수도인 민스크에서 ‘돈바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우크라이나, 러시아,
러시아 분리주의 집단 간 맺은 국제 협정으로, 전통적으로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돈바스 지역 주민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분리를 원해 일어난 분쟁으로 해당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분쟁이 종식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러시아 침공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함.
[2.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올까, 이스라엘 - 팔레슽타인 분쟁]
-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랍과 유대인 사이에서 양다리 전략을
구사. 1915년 ‘후세인-맥마흔 선언’으로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하지만 2년 후 1917년
유대인들의 전쟁 자금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국가 건설 지지.
---> 1차 대전 후 국제 사회는 유대인들의 지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며
유대인 손을 들어 줌.
--->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다수인 아랍인들을 어떤 대책도 없이 강제로 추방할 때
유대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피해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 옴
- 제2차 세계대전 후인 국제연합은 해당 지역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마련, 해당 지역을 예루살렘(공동 지역)은 남겨두고 ‘유대국가’와 ‘아랍인
국가’로 분할하자는 방안 수립.
---> 아랍인들이 이를 거부하고 원만히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이 철수하자
제1차 중동전쟁 발발
*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 국제사회가 법적으로 인정한 팔레스타인 기구, 독립국 팔레스타인 건국을 목표로
1964년 결성
· 중앙집권적 정치조직이 아닌 여러 정당과 단체가 연대한 조직
· 대표적 정당은 ‘파타’와 ‘하마스’가 있는데, ‘파타’는 2국가 해법을 인정하고 비폭력
독립운동을 지지하나 ‘하마스’는 이슬람 수니파 근본주의 무장조직으로 2국가 해법에
반대
- 1956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으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과
2차 중동전쟁
--->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의 요충지를 점령
- 1967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군사동맹을 맺고 주변 아랍국과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다
실패(3차 전쟁)
--->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 완승, 이스라엘 영토는 3배가 확장되며 유엔이 당초
제안한 땅의 5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함.
- 1973년 3차 전쟁 당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이집트와 시리아가 공격하나
이스라엘에 완패(4차 전쟁)
---> 시나이 반도는 협상을 통해 이집트가 되찾았으나 시리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골란고원은 미회복.
* 1993년 미국의 주도로 ‘오슬로 협정’으로 PLO가 마침내 수립.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독립해 ‘국가 대 국가’로 공존하자(2국가 해법)
--->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자치정부, 점령지 반환 및 이스라엘에 대한
무장 투쟁금지)
· 3차 전쟁 이전의 국경선으로 되돌아 갈 것
--->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 일부 지역에서 철수
- 1996년 팔레스타인을 축출하려는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하면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며 팔레스타인도 2006년 강경파 하마스가 집권하며 분쟁이 격화.
- 이스라엘의 우경화가 강화되고 있는 이유 ---> 인구 구성의 변화
· 건국 초에는 유럽 중동부 출신의 유대인인 ‘이슈케나지(히브리어, 아슈케나즈의
유대인)가 많았다. 아슈케나즈는 히브리어로 독일을 뜻하기에 ‘아슈케나즈 유대인’은 ‘
독일 유대인’이란 뜻으로 이들은 금융, 무역업에 주로 종사했다.
· 건국 후에는 이베리아반도 출신의 유대인 즉, 세파르디(히브리어, 스페인이란 의미)
유대인 집단으로 이들은 주로 이스라엘에서 하류층을 이룬다.
---> 따라서 팔레스타인들의 삶의 기반과 겹치게 되었고, 사회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이들은 진보 세력의 점령지 반환 정책에 반대하며 이스라엘의 우경화를 주도.
[3. 미국은 왜 아프가니스탄에 무관심해졌을까, 미국 - 아프가니스탄 전쟁]
- 아프가니스탄은 아시아와 중동, 러시아를 잇는 중요한 땅으로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와 인도양으로 진출을 꾀하는 ‘이란’의 주요 표적이 되나 영국이 이를 방어.
--->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3차에 걸쳐 침공하나 실패.
--->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 위해 접근하며 아프가니스탄과 군사적으로 교류를 확대
---> 러시아 군사 연수를 수료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이 소련식 공산주의를 추구하며
세력 형성, 이들의 반대 세력 즉, 부족 세력들은 이슬람이란 종교를 중심으로
서구화는 물론 소련식 공산주의에도 반발.
- 1978년 좌파 군인들에 의해 공산정권 수립
---> 무자헤딘(성전에서 싸우는 전사)이라는 반정부군이 결성되어 아프가니스탄 내전
발발
---> 소련 남부지역(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이슬람권 국가들
에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소련은 아프카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켜
혁명이 번지지 않게 차단
---> 소련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 소멸 작전 전개(소련판 베트남 전쟁)
- 1990년 주요 장성들이 친소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쿠데타 모의 사실이 발각되어
내분 발생
---> 무자헤딘의 승기, 소련의 붕괴와 맞물려 1992년 탈레반 정부 수립
* 텔레반이란 (알카에다는 아랍어로 ‘근본주의’라는 뜻이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거주하던 파슈툰 부족에서 시작한 반정부군 조직, 탈레반은
‘학생’이라는 뜻으로,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양성하는 신학교 학생들이
반정부군으로 주로 활동하면서 붙여진 이름
- 2001년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 알카에다를 보호한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나 탈레반 간부가 ‘미국에게 시계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면서
미국에 대해 지구전을 전개
---> 2021년 미국은 에너지 시대가 변화(석유 ---> 셰일가스)하면서 에너지 수입국
에서 수출국으로 또 위험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중동 문제에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 블로백(BlowBack)이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군사 강국으로 키우나 미국은 후세인의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텔레반을 도왔으나
미국은 추후 20년간 텔레반과 전쟁 전개
[4. 대만은 왜 국기가 없을까, 중국 - 대만의 갈등]
- 중국 역사에 대만이 등장하는 것은 청나라 때로, 푸젠성, 광둥성 등에서 한족이 이주.
대만이 주목받은 이유는 필리핀과 중국 본토를 잇는 거점인 데다 교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 대만인은 본성인(本省人, 청나라 때 건너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만 거주 한족)과
외성인(外省人, 1949년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대만으로 건너온 한족)
으로 구성되는데 장제스로 대표되는 이들은 교육과 소득이 높아 대만 정부의 고위직
과 관리직을 독차지.
- 2차 대전 직후 대만의 ‘국민당’과 중국의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대립.
---> 중국은 대만을 전쟁에 패한 장제스가 세운 ‘괴뢰정부’로, 대만은 중국을 쿠테타를
일으킨 공산당 세력으로 본다.
- 1970년대부터 ‘데탕트 시대’로 접어들면서 미국과 중국,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1971년 미국이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대표로 인정하고 1972년 중국의
‘하나의 중국’ 원칙에도 동의
---> 국제사회에서 대만은 독립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표기할 때는 ‘중화
타이페이’라고 표기, 1983년부터 중국은 대만을 ‘중화인민공화국 타이완 특별
행정구’로 지명, 홍콩/마카오와 같은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여기고 있다.
* 중국의 새 이념은 민족주의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하여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사실상 더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국민을 통치하기 어려워졌다. 국민을 결속할 다른
이념이 절실했는데 찾아낸 것이 ‘민족주의’라는 이념이다.
---> 민족주의가 뿌리내리면서 ‘영토’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
---> 내륙에서는 주변국(인도, 파키스탄, 부탄 등)과 영토를 놓고 분쟁하고, 동중국해
와 남중국해에서도 해상 영유권을 놓고 분쟁 중.
* 대만에는 민진당과 중국국민당(이하 국민당)이 있는데,
내륙에서 중국공산당과 치른 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건너왔는데, 공산당과 다시
싸우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대만을 통치하는 데 주력, 그 결과 국민당은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하다 지난 1987년 해제.
민진당은 1986년 이후 대만 사회도 민주화되면서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합법 정당으로
활동 시작. 또 국민당으로부터 소외된 본성인을 지지층으로 삼으며 중국 본토 수복은
비현실적인 구호라 여기며 국민당이 중국 본토 수복을 핑계로 현상을 유지하고 부패만 일삼고 있다고 싫어함.
[5. 중국군과 인도군은 왜 몸싸움을 벌였을까, 중국 - 인도 분쟁]
- 갈등의 씨앗은 영국으로 19세기 인도제국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부탄 등 까지 포함한 제국으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섞여 있었는데, 영국은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들 이익을 위해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막기 위해 국경선을
설정한다.
---> 영국은 청나라에 ‘아다그- 존슨 라인’을 제안하는데 이는 청나라가 지배하던
카슈미르 일부 지역인 ‘악사이 친’지역이 포함된 국경선이다.
---> 청이 반감을 표시하자 ‘악사이 친’을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는 방안
(매카트니 - 맥도널드 라인)을 제시
그러나 청나라 내부 사정으로 이런 수정안에 대한 공식적인 수락도, 거부가
없자 영국은 당초 제안한 ‘아다그 - 존슨 라인’으로 국경을 확정
--->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내부가 안정된 중국이 국경선에 관심을
가지며 영국과 인도를 비난하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후인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본격적 국경선 갈등 시작.
티베트 지역이 인도 쪽으로 돌아서면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티베트를 중국이 기습 점령하자 서남시아에서 리더 역할
을 생각했던 인도는 이런 중국으로 인해부담을 크게 느낌 .
---> 1962년 중국이 ‘맥마흔 라인’에 근거, ‘악사이 친’과 북동부 ‘아루나찰 프라데시’
지역을 중국에 편입 미국이 개입을 천명하자 중국은 느닷없이 휴전을 선언하고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철수하고 ‘악사이 친’ 지역을 점령해 버리면서 자신들은 ‘ 아다그 - 존슨라인’을 수락한 적이 없다고 발표.
결국 인도는 ‘아루나찰 프라데시’를, 중국은 ‘악사이 친’ 지역을 갖는 식으로
추진됨.
- 중국과 인도의 국경 길이가 약 3천 킬로미터로 국경 분쟁이 일어나는 곳이 20여 곳에 달하고 있다.
인도는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일 때는 미국과 가깝게 지내지만, 그렇다고 반중
노선을 취하지 않고 미국이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제재하려는 것에도 반대하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국가로 이런 인도의 이중적인 태도에 미국은 불만을 갖고 있으나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국가로 최적이기에 지속적인 우호관계 유지 중
.
[6. 이웃과 왜 싸우게 되었을까, 인도 - 파키스탄 분쟁]
- 카슈미르 지역은 16~19세기 중반까지 인도 최초의 통일 국가인 무굴제국의 땅이었으
나 무굴제국이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제국이 된다.
1947년 영국이 떠나면서 인도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힌두교와 이 슬람교가 갈등
하면서 힌두교는 인도, 이슬람(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나뉘는데, 이때 카슈미르
지역도 인도 땅과 파키스탄 땅으로 나뉘어지며 훗날 인도령 일부인 ‘악사이 친’을
중국이 차지하해 카슈미르 지역은 인도령, 파키스탄령, 중국령으로 나뉜다.
-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의 가장 큰 원인은 영국이 해당 지역에서 실시한 ‘분할
통치’에 기인한다.
즉, 영국은 의도적으로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차이를 부각해 두 종교인들 간에 적대감
을 품게 했는데,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힌두교 사람을 지배층으로 편입
시켜 영어를 포함한 서구식 교육을 통해 친영 세력으로 만들어 이슬람 세력을 관리
하게 만드는 전략으로 하지만 힌두교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슬람
세력도 동시에 지원한다.
---> 영국이 떠나기로 한 후 인도 임시정부 수립을 놓고 협의할 때 힌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영국은 임의대로 인도를 파키스탄과 인도,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3국으로 분할해 버린다.
---> 독립 당시 카슈미르 지역 대부분 주민은 이슬람 교도로 무슬림이 많은 파키스탄
에 편입되기를 희망했으나 지배층은 힌두교도가 많아 대다수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흰두교의 국가 인도에 편입되어 인도와 전쟁이 일어남.
☞ 인도령, 파키스탄령으로 나뉘는데 중국이 인도령을 침공해 점령.
---> 인도는 카슈미르 지역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국내 문제로 보고 있으나
카슈미르 인구의 80%와 파키스탄과 해당 지역의 분리주의자들은 국제 분쟁
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로 파키스탄은 유엔 결의에 따라 카슈미르를 누구
땅으로 할 것인지 국민 투표를 제안했으나 인도는 외면 중.
- 1944년 인도가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자 파키스탄도 카슈미르를 놓고 인도의
군사력을 실감하며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중국이 인도를 견제하기 위해
파키스탄의 핵무장을 측면 지원한다.
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에게 파 키스탄 기지 제공 대가로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 지지를 얻어내어 1988년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에 성공.
[7. 왜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울 수 없었을까, 튀르키예 - 쿠르드 분쟁]
- 쿠르드족은 ‘국가 없는 최대 단일민족’‘, ’중동의 집시‘로 불린다. 중동에서 아랍인,
이란인, 튀르키예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민족으로 이 중 절반이 튀르키예에 산다.
---> 인종, 역사적으로 이란계 산악 민족인 관계로 이란과 접경 기역인 튀르키예
동부에 많이 거주. 종교적으로 수니파(공동체가 뽑은 대표자를 계승자로 여기는
파) 무슬림으로 고유한 정서와 문화, 언어를 가지고 있다.
- 쿠르드 문제를 ‘제2의 팔레스타인 분쟁’이라고 하나 팔레스타인이 아랍 민족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쿠르드족은 어떤 국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이라크만
자치권을 인정)
-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서 패하자 ‘세브르 조약’(연합국-오스만제국)에
의거 쿠르드족에 자치권이 부여되기로 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후 ‘로잔 조약’이 체결 때에는 쿠르드 족에게 주기로 했던 땅에서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이 그 지역을 편입하면서 또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연합국이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후 쿠르드족이 세운 국가를 무효화해 버리며
국가를 세울 수 없게 됨
-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쿠르드족의 ‘마하바드 공화국’을 수립하나 이는 이란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것이었는데 소련이 이란과 협정을 맺고 철수하자
이란이 쿠르드를 공격할 때 소련에 도움을 요청하나 소련은 이를 외면, 이란이
쿠르드족을 무참히 학살함.
- 1972년 이란과 미국이 이라크에 쿠르드 자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약속을 믿고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 이란을 위해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나
이란이 이라크와 협상을 맺어 분쟁을 종식하자.
쿠르드 독립 문제는 외면하며 또 1980년 이란과 이라크가 전쟁을 벌이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이 이란을 도울 것을 염려하여 쿠르드족을 화학무기로 학살.
- 1991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미국에 대한 지원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으나 미국은 또 쿠르드족의 공로를 외면하고 종전 후 독립을 지원하지 않음.
뿐만 아니라 2003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과 IS 격퇴 과정에서 쿠르드족이 미국을
위해 노력했으나 철저히 외면 받음.
- 쿠르드족이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는 이유는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자원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략적 요충지가 많기
때문에 독립 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것이고
쿠르드 내부적으로도 부족이 무려 500개가 넘어 여느 무슬림 공동체처럼 부족주의
성향이 강해 근대적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
[8. 시리아에서 전쟁은 끝난 걸까, 시리아 내전]
[9. 군부가 계속 집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미얀마 내전]
- 위의 두 내전은 자국내 리더들의 성숙치 못한 행동과 종파주의적 사고에 의해 국민간
분열을 촉발시킨 점이 많아 정리에서 제외하였는데, 어찌되었든 시리아 내전과
미얀마 내전은 닮은 점이 많다.
민주화 운동에서 무장 투쟁으로 전환된 점, 종교.민족 등의 요인으로 시민들이
나뉜 점, 주변국은 물론이고 세계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힌 점이 그렇다.
한마디로 두 나라의 내전을 보면 우리 정치인들이 보고 배울까 겁이나 정리에서
제외했다.
[10.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왜 학살자가 되었을까, 에디오피아 내전]
- 수준 낮은 정치인들로 인해 진행되고 있는 참극으로 누가 배울까 겁이 나서 역시
정리에서 제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