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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질문 - 내 안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인생의 지혜를 찾아서
다큐멘터리 〈Noble Asks〉 제작팀 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5월
평점 :
추천 권유도 6
영국의 생물학자 ‘데니스 노블’과 한국의 고승 네 분(성파, 도법, 금강, 정관)과의 평범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원초적 문제’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이야기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개신교 신자인 이같은 작품을 접한 이유는 편협 된 종교관에 매몰되어 있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노력(?) 때문으로 속된 말로 좀 있어 보이려고 접하게 되었다.
난 개신교도이지만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논리인 ‘내 종교만이 최고’다 라는 생각은 갖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나의 종교와 종교적 신념이 중요하면 타인의 종교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기에 기꺼이 이런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 개신교 입장에서 보면 거의 역적 수준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아닌 것 아니다 -
가끔 언론을 통해 내 종교가 좋은 것이니 타 종교를 폄훼하는 일부 몰상식한 개신교도들의
사고치는 소식을 들으면 참으로 속상하며 진정으로 그들이 믿는 종교의 절대자께서 진정 그런
그들의 저급하고도 몰상식한 모습을 좋아 하실런지가 자못 궁금할 뿐이다. 절대 아닐 것이다.
최근 정권이 바뀌면 새로이 출범하는 정권이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경내를 관람하던 어떤 옹졸,
치졸빤스같은 인간이 불상에 절하는 다른 사람을 보고 난리를 친 사건이 일어난 모양인데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개신교도인 나만이라도 내 종교 외의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또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상대 종교에 대해 존경은 아니더라도 폄훼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런 자세가 올바른 종교인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순복음 조용기 목사님을 부처님 오신날
조계종인지, 동국대인지를 방문해 종교와 관련된 특강을 과거에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타 종교의 거두께서 상대 종교시설에 가서 특강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상대편 종교인을 초빙한 불교인들에 대해서도 높은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그들의 성숙된 모습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작품 속에서 눈에 들어온 대목은
“- 세상에는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런 기분이 들 때는 바로, 나 자신에게
‘어떤 틀’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 자기의 틀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는 것은 상대에게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내가 그 ‘틀’을 깨야 한다.“
라는 대목으로 나이가 들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위의 글이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종교를 떠나서 나이가 든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타협을 모르는
정치인들, 갈라치기를 주업으로 삼고 사는 인간들은 위 문구를 잘 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한 대목은
“- 자신이 준 것만 따지는 사람은 불행하고, 받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 대목은 성경의 말씀과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
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글이었다고 생각하며 매번 위 문구처럼 살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를 않다. 그런 나는 오늘도 나의 절대자에게 위 문구처럼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작품 제목 ‘오래된 질문’은 답이 없어 물어본지 한 참 지난 오래된 질문이 아니라 세상이,
시간이 흐르며 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즉, 구성원들이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던져진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도 역시 변할 수밖에 없기에 외견상 ‘질문’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질문이 아닌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마음을 잘 추슬러 보라는 ‘죽비적 가르침’을 던져주려는 작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시간이었다.
- ‘생명’이란 DNA나 두뇌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교류하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선 먼저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고
그 아득한 심연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고통의 본질을 깨닫고 재대로 대처하는 법을 배우면
쓸데없는 고통의 연쇄에 매이는 일을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 깨달음은 일상과 동떨어지고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다. ‘몰랐던 걸 알았다’, ‘잃었던 것을
찾았다‘, ’가려졌던 것이 벗겨졌다‘ 등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의 참모습, 이 세상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경험적 지혜가 바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에 맞게 내 삶을 만들어가는 실천이 더욱 중요하다.
- 지금 현실적인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다면,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당면한 문제를 줄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 고통은 그 자체로 우리를 괴롭게 하지 않는다, 그 고통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괴로움의 정도가 달라진다. 쓸데없이 과도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고통이 대부분 우리가
관념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 고통은 외부에서 주어진 상황이나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에서 유래
한다. 붓다는 이를 인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찾았다.
- 남들이 우리에게 붙인 이름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지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중도’라 부른다.
-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책임감을 가지라.
- ‘염화 미소’란 말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다.
- 시비, 분별, 번뇌, 망상이 있기 이전의 마음, 비교하기 이전의 마음, 나라고 하는 개념이 있기
이전의 마음, 부처님은 항상 그런 마음으로 행동한다.
- 그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대에 의지하여 내가 존재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대는 무한히 높은 자요, 귀한 자요, 고마운 자입니다. 그대 앞에서 나는 무한히 낮은 자입니다.
끊임없이 나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어야 하는 자입니다.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몸짓이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절’이란 주체적으로 낮은 자, 비우는 자, 나누는 자의 삶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 자존심이 센 사람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남과 견주어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 ‘좌선(坐禪)’이란 번뇌와 망상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로 앉는 것을 말하는데
‘좌(坐)’란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쉬는 것을 진짜 앉아 있다고 말한다
‘선(禪)’이란 어떤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기 이전의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고요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 ‘화두’는 반드시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거 계속 반복해서 되뇌면서
평화로운 본연의 마음 상태로 이끄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 감정에 휘둘리거나 쉽게 끌려가지 않는 단단한 마음을 ‘금강’이라 한다.
- 참선은 삶을 다르게 인식하는 방법
- 진정한 삶의 변화는 저 멀리 특별한 장소에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내가 발 딛고 선 자리에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신의 인생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사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 삶은 내가 마음먹고 행동하는 대로 살아지고 창조될 뿐이다.
- 남과 자꾸 비교할수록 내 행복이 점점 줄어든다.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과 함께하는 사람들,
그 속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교는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 동양에서는 왼손을 ‘체(體)’라 하고 오른손을 ‘용(用)’이라 한다.
‘체용론’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동양 철학의 아주 오래된 패러다임이다.
‘체’는 사물의 본체나 본질을 의미하고, ‘용’은 사물의 작용이나 현상을 의미한다.
- 사찰음식에는 마늘, 파, 달래, 부추, 아위 이렇게 5가지 ‘오신채’가 들어가지 않는다.
- 인생에서 좋은 때라는 것은 따로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가장 좋은 때이자 좋은 삶이다.
* 출판사에 표하는 이의제기
- P 46쪽에는 도법스님이 17살에 출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P 24쪽에서 이미 도법스님은
18살에 출가한 것으로 씌여져 있다.
독자는 이런데서 출판사에 대한 신뢰, 편집인에 대한 신뢰를 눈여겨 보게 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