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애니메이션이 지금보다는 더 일찍 개봉을 할 예정이었는데 코로나때문에 개봉이 미뤄지다가 드디어 개봉을 했다. 지금은 디즈니랑 픽사가 같은 계열사이기는 하지만 암튼 이거는 픽사 애니메이션이라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애니메이션은 아니다. 주인공이 재즈 뮤지션이라 음악이 나오기는 하지만.

전지적 '조' 시점에서는 원하지도 않았고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을 눈 앞에 두고서 어쩌다가 죽어버려 '절대로 다시 살아나고 싶어.'였고 전지적 '22' 시점에서는 딱히 지구에서 살고 싶지 않은데 도대체가 왜 지구에서 태어나라고 하는지 1도 모르겠어서 암튼 둘 다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하나는 지구에 가고싶고, 하나는 가고싶지 않고.

영혼의 성격은 알아서 정해주지만 지구에 가고싶은 이유를 찾는 'Spark'는 결국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같다. 그게 무언가 당대한 목적이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가 지금 이 순간 왜 살고싶은지'는 사람마다 이유가 다를 것이니까. 태어나기 전 영혼의 멘토를 정해주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멘토는 '사회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뛰어난 사람'의 영혼만 있었다는 것에서는 기분이 딱히 좋지 않았다. 사람마다 살고 싶은 이유가 다르고 어떤 것이 소중한지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왜 멘토를 맡는 영혼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유명한 사람'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링컨이나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 삶의 소중함과 주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마더 테레사 별로 안 좋아함)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스펙터클한 인생이 아닐지라도 모든 하루는 중요하고 모든 인생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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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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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책, 드라마에서 나오는 미래 지구의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은 몇 가지로 나뉜다.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문명의 파괴, 전염병 확산으로 인한 다수 인류의 죽음, 갑자기 들이닥친 빙하기로 인해 변해버린 지구, 심각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사막화되어버린 땅 등등등. 스노볼은 그 몇 가지의 디스토피아 중에서 빙하기로 변해버린 지구에서 스노볼이라는 안락한 지역과 그 외 지역에서 살아가는 인류로 나뉘어진 지구의 한 부분을 보여준다. 스노볼 바깥에서 살고 있는 인류는 아주 추운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스노볼에서 거주하는 인류는 안락함을 누리는 대신 자신의 삶을 방송화하여 보여준다. 이 책은 마치 디스토피아에서 진행되는 유튜브 채널 내지는 짐 캐리의 트루먼 쇼를 전인류화 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연예인을 좋아하거나 드라마, 영화를 보는 이유 중에 하나가 현실을 잊고 꿈을 꾸기 위해서라면 스노볼에서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 안락함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 초반에는 잘만 하면 유튜브가 전세계를 스노볼처럼 만드는 한 과정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스노볼에 나오는 모습이 현실세계의 유튜브를 소설화 한 것 같았다. 인기있고 매력있는 인물의 일상이 누군가에게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책의 스토리가 이어질수록 소설에서 그려지는 현실의 냉혹함은 역시나 실제의 냉혹함보다는 극적이고 정의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해리라는 캐릭터에 들어간 설정이 얼마나 과학적일지 가능한 일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주인공이 되어 무언가를 성취하고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으니까. 현실세계에서 그런 일은.. 별로 없다.

나름 재미있게 읽은 청소년 문학이자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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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불평등 시점
명로진 지음 / 더퀘스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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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에세이다. 에세이가 맞기는 한데 다른 시점에서 본다면 존 롤즈의 정의론이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의 한국의 정서와 상황을 예로 들어서 쓴 정의론이다. 철학적 사유는 비슷한데 한국어로 쉽고 해학적으로 풀어 쓴 정의론이다.

내가 이 책을 존 롤즈나 마이클 샌델의 책과 비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유라나 다른 있는 집 자식이 더 쉽게 높은 관문을 통과한다고 쓴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부분도 물론 정의론을 해학적으로 풀어썼다고 할 수 있으나 마이클 샌델의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에 나왔던 내용과 틀이 비슷한 내용이라서 이 부분을 골랐다.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노력의 유무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조건을 주지만 그 결과를 가르는 것은 결국 재화의 유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부유한 집 자재는 하루 24시간을 모두 '노오력'에 사용할 수 있지만 재화가 넉넉하지 않다면 24시간 중 일부의 시간을 '돈을 버는 일'에 사용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일을 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의 시간은 24시간에서 일부의 시간을 뺀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재능을 가졌더라도 노오력의 차이가 생기니 결국 성공을 하는 것은 있는 집 자식이다. 저자는 과거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대해 회상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썼다. 같은 지역에서 살며 같은 고등학교를 다녀도 어떤 사람은 버스로 통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타고 통학을 하였으며, 기사가 딸린 자동차를 타고 다녔던 사람은 연세대에 합격했지만 버스로 통학하던 사람은 연세대를 가지 못했다고.

그 외에도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갑질이나 꼰대 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하면서도 몇몇 글에서는 스스로 꼰대임을 증명하거나 여성혐오발언을 하는 것도 보였다. 꼰대가 꼰대를 까면서 스스로 꼰대임을 입증하는 이중적인 글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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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양장)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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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과 심리학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읽기 전 제목만을 보고 생각한 두 가지 질문이다. 세상에는 심리학과 관련된 수많은 책이 있다. 많은 사람이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지치기 시작할 때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상담을 받는다.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자기 자신의 심리를 돌아보는 것이다. 왜 힘든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 내가 힘든 일이 나의 정신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 나의 정신건강이나 심리상태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러 가능성이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라는 심리학에 정통한 사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지금 당장 마음이 다쳐서 심리치료나 상담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책도 아니다. 심리학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박사학위를 따거나 연구를 하는 것이 맞고, 심리치료나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전문 카운슬러나 병원에 가야만 하는 것이지 이 책을 읽으면 안 된다. 이 책은 마음이 아프기 전에 읽어서 예방을 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미러링 효과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심리적인 법칙이 적혀있다. 같은 조건에서 두 명의 사람이 일을 할 때 왜 수익률에서 차이가 나는지, 똑똑한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데 결과물은 항상 나쁜지,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주려면 첫인상부터 신경 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알려준다. 개인의 성과부터 시작해서 조직의 성과, 호감이나 관계에 대해서도 심리학에 나와있는 법칙과 효과 등으로 설명을 해주고 관련된 일화를 적어두었다.

이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스킬 한두 개만이라도 정확하게 가지고 간다면 행복으로 가는 길이 조금은 순탄해지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직장을 다닐 때 사용할 수 있는 심리적인 효과, 기업의 수장으로서 직원이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방법, 호감을 얻는 방법 등으로 목차가 나누어져 있으니 지금 당장 필요한 부분부터 읽으면 더 좋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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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관람하면서 음악은 매우 좋은데 뭔가 시각이 편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성 주인공인 루벤은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루벤의 경우 (아마도) 귀족이라고 생각될만큼 매우 부잣집의 외동아들이었으나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 영화에서는 루벤이 왜 시력을 잃었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예전에는 볼 수 있었으나 서서히 시력을 잃어갔고 시력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누군가 색깔에 대한 정보 등을 알려준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루벤은 전맹에 가까운 수준으로 시력을 잃었으나 빛을 구별할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한 집에 머물렀기 때문에 활동지원 없이 집안 내부는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다만, 시력을 잃은 이후에 매우 난폭해져서 고용인에게 심각한 폭력을 휘둘렀으며 씻는 것을 싫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리는 난폭한 루벤에게 책을 읽어주기 위해 고용된 사람이었다. 영화 시놉시스에는 '얼굴과 온 몸에 흉측한 상처가 있고 남들과 다른 모습'이라는 표현으로 마리의 외적 모습을 설명해두었지만 마리는 그저 알비노일 뿐이었고, 알비노라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크지만 '얼굴과 온 몸이 흉측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알비노의 경우 사람에 따라 시각장애를 동반할 수도 있는데 안경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시각장애는 없지만 피부가 매우 약할 것 같다는 추측이 되었다.

이 영화는 사랑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지만 나는 소통과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루벤의 경우 시각의 결핍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을 닫고 그 누구와도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 어떤 관계도 맺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이 상처받은 것을 '폭력'으로 들어냈을 뿐이다. 마리는 알비노라는 이유때문에 차별이나 학대를 받았는지 영화에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니거나 사람 앞에서 후드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마리의 행동으로 유추했을 때 '책' 이외의 그 어떤 소통도 거부한 것 같았다. 루벤과 마리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느낀 이유 중 하나는 마리가 책을 낭독하고 루벤이 그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서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통과 관계에 대한 갈증을 서로 풀어주었으며 서로에게 느낀 감정을 서로 사랑이라고 인식한다.

루벤이 각막이식수술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게 되기 전, 마리는 그를 떠난다. 마리가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루벤이 자신의 실제 모습을 보고 떠나면 상처를 받을까 두려워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거짓말로 루벤이 상처받을까 두려워서인지 알 수 없다. 마리는 루벤의 사랑을 순수하다고 표현했지만 나는 루벤의 사랑이 상당히 거칠고 폭력적이라고 느꼈기때문에 어떤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루벤은 눈을 뜨고 난 뒤 마리를 찾기 위해 집장촌까지 가지만 그 곳에서 일하는 여성에게도 폭력을 휘두른다. 또한 눈을 뜨기 전 가고싶다는 터키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뒤 도서관에서 찾은 마리에게 함께 있자고 제안하지만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자신의 손으로 다시 눈을 멀게 만든다. 순수한 사랑으로 마리를 갈망하기에 벌인 일이라기에는 너무나 폭력적이다. 루벤의 사랑은 순수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던 것일까? 나는 이 영화가 아름답다고 쉬이 이야기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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