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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초등학생때였다. 초4인지 5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척이 없긴 하다. 아마도 19금 책이 아닌 이상 내가 읽는 책에 대해 어떤 검열도 하지 않으셨던 어무니께서 내가 서점에서 고른 책을 그냥 사주신 것 같다.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까먹었는데, 아직도 그 '네 멋대로 해라'는 본가 책꽂이에 고이 꽂혀 있다. 그 책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었던 내게 이렇게 살 수도 있다니! 하는 충격을 줬던 걸로 기억한다. (네 멋대로 해라와 이빈의 '걸스'가 청소년기 내 성격형성에 영향이 컸다.)

 

네 멋대로 해라를 좋아했던 나머지 담임 선생님이 복도에 게시할 독후감을 써오라는 퀘스트를 줬을 때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갔는데, 파릇한 새싹을 키워야하는 초등학교 5학년 교실로 올라가는 복도에 게시하기엔 너무 자극적이었기 때문인지 빠꾸당했다. 다른 책으로 다시 써오라고... 그래서 난 '안네의 일기'를 읽고 써갔다. 최고의 고전으로 골랐으니 이제 됐나요? 하듯이.

그때 그 책을 읽고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예종이 뭔지도 모를 때니까!

독후감도 빠꾸당한 마당에 어디 써놓은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읽으면 당연히 그때완 소회가 다르겠다만, 올 설에 내려가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간질간질하게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오를지도.

 

 

신문과 한겨레21을 통해서 드문드문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

책으로, 다시금 그녀의 책들을 책장에 꽂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분명 이야기들은 정말 먹먹하거나, 슬프거나, 답답한 이야기였는데 특유의 문체때문인지 재미있어서 이걸 재밌어 하는 내가 나쁜 년이 된 것 같은 배덕감이 들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울면서 "재밌어.."라고 하는 내 꼴을 보면서 애인도 복잡한 기분이었겠지만.

거기에 반가움 반, 그동안 여러 책이 있었음에도 사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반 해서 여유 있을 때마다 다른 책도 사읽기로 했다. 그리고 주변에 계속 추천하는 걸로 내 팬심에 대한 부채감을 좀 갚아보고 싶다.

같은 세대 작가이니만큼 내가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는 동안 그녀가 계속해서 글을 써주면 좋겠다.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것 같으니 매번 찾아서 보기는 힘들겠지만 책이 나오면 챙겨보는 걸로.

내가 따로 간직하려고 엄마에게 아버지를 좀 놓고 가라고 했더니 엄마도 참, 아버지를 빈 청국장통에 넣어놨지 뭐예요. 핑크색 프림통에 당신을 한 점 흘리지 않고 무사히 옮겨 담고 빈 통을 헹구려 하니, 물에 둥둥 뜬 당신의 조각들이 왜 그렇게 눈을 찌르듯 아파왔을까요. 아버지, 당신이 살아 계셨다면 얼굴을 찡그렸을 테지만 차마 당신을 하수구로 흘려보내 김치찌꺼기니 어느 집의 먹다 남은 찌개국물이니 하는 것과 섞이는 걸 볼 수 없어서 저는 당신을 원샷했답니다. 웬일로 목에 걸리는 것 없이 넘어가준 아버지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어요.
-p.29 내 안에, 아버지

여기저기 파헤쳐 찾아봤지만 낙엽이며 흙이며 온통 파놓은 거기서 그 조그만 아이폰을 찾을 수 있을리가. 죽은 개 묻다가 아이폰을 묻어버리다니 하도 한심한 일이라 슬프다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그렇다고 무덤을 다시 파헤칠 수는 없는 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다가 비직비직 웃었다. 올리야, 그래 아이폰 가져가라. 아버지 갖다 드려라. 아버지가 아이패드 갖고 싶어 하셧는데 이거라도 갖다 드려. 네가 가져다 드려. 보고 싶으면 전화할게. 잘 지내고, 가끔 카톡해라....

이것이, 내가 리퍼까지 받고도 끝내 스마트한 인생을 살지 못한 한심한 이야기다.
-p.35 전혀 스마트하지 못한 이야기

세상만사를 전혀 모르시는 부모님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닳고 닳은 기분에 젖은 나는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실제로 피해를 봤을 경우 의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난센스라고 후에 어떤 친구가 말해주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맑은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신앙 덕분이었다. 내게는 없었던 바로 그것. 아무도 오지 않는 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나중에 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그러면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지금, 지금 갚아줘요! 바로 지금! 물론 하나님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술을 마시러 갔다.
p.68 경찰 아저씨의 옷자락

지금 병상에 누워 힘겹게 싸우고 계시는 리영희 선생님 역시, 그 `일체의 비결`을 알고 계셨다. 선생님은 "인생에 대단히 로맨틱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면, 많은 것이 간단해진다"고 특유의 간명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20대가 그토록 독하고 힘들었던 이유는 여기보다 어딘가에, 라고 중얼거리며 끝없이 뭔가 대단히 로맨틱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삿된 망상이었다. 그 망상이 헛된 기대를 부르고 망상과 기대가 힘을 합쳐 피를 펄펄 끓게 하던 거였다.
-p. 164 지금은 이게 다예요

그나마 강용석 같은 인간들이 `강용석 모먼트`를 일으킬 때는 우리 편 아니니까 날라차기라도 할 텐데, 그래도 `동지`인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쪽인 것 같은 사람들이 저런 순간을 일으킬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제일 곤란하다. 이럴 때 그냥 분위기 맞춰서 좋게 넘어가야 하는 것이 동지인 건지 다음에 어디 가서 그러지 말라고 똑바로 쏘아붙이는 게 동지인 건지 헷갈리다가 나중에 말하려고 생각하다 보면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가 결국 나만 뻘쭘하고 속이 상하는 지경이 되어 결국에는 아 내가 싸게 굴었나, 내가 잘못된 사인을 보냈나? 하고 자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폭력 피해자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빠져 들어가는 전형적인 개미지옥이다.
-pp. 184~185 보수와 진보가 다르지 않을 때

사는 게 강퍅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떠올린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악에 받쳐 잘 살겠다는 것들은 안 이쁘지만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 다음부터 나는 함부로 비둘기 징그럽다 말 안 하기로 했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pp.234~235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쁘다

그 일 할 사람, 그 일 하지 않을 사람으로 나누는 이러한 태도는 한 발자국만 떼면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이나 한진중공업 노동자 같은 사람들을 탄압하는 사용자들과 같은 태도가 쉽다. 그런 대접을 당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일 할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일 할 사람들의 일, 남의 일 이렇게 칼같이 줄을 그을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그런 일 할 사람, 아닌 사람으로 우리가 남을 판단한 바로 그 잣대로 나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의 시장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사람 사는 질서라고 칼같이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나처럼 시장 가치가 없는 사람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겠지만, 나 역시 그런 분들과는 마구 척지고 싶다. 있는 대로 척지고 싶다. 평생 척지고 싶다. 만나봤자 서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확실하게 척지고 사는 게 피차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pp.276~277 무혈의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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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번호로 mms가 도착했다.

"할머님 색칠공부 하신거예요 보시고 답장주세요"




얼마전 할머니께 전화가 왔었다.

'보훈청에서 참전 용사들 치매 예방한다고 색칠하는 걸 줬는데, 해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림이 좀 복잡하고 예쁜 거 있으면 구해다오' 하고.

요새 핫한 컬러테라피가 그 시골까지 가는구나~하고 신기한 마음에, 이것저것 주문을 해드렸었다. 제일 유명했던 비밀의 정원과, 마법의 숲, 정교한 패턴이 많은 것처럼 보였던 크리에이티브 테라피 컬러링북까지 해서 세 권. 













배송 쩌는 알라딘답게 원통 그 시골에도 익일배송이 되더라.

원통에는 문방구에 12색 색연필밖에 없다고 하시길래 36색 색연필도 같이 주문해드렸다.

나중에 가서 할머니 완성하신 거 봐야지 했었는데, 주기적으로 오는 보훈청 도우미분이 감사하게도 사진을 찍어 보내주신 것이었다.


할머니가 완성하신 걸 보니 진짜 할머니 센스가 어디 안간다 싶다. 전화드렸을 때 "너무 복잡해서 할머니는 못하겠다~ 그래도 이쁘구나" 하시더니 당연하게도 겸양이었어!! 배신감이 든다 ㅠㅠ 할머니는 색감이 뛰어나신데 왜 난 7세 수준에서 색감이 멈춰있는가...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 할머니 댁에 간간히 놀러가면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해주시기 시작했다. 그전엔 옛날 얘기를 잘 안해주셨는데 이제는 내가 이해할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셔서 그런가, 자주 이야기를 해주신다. 듣다보면 정말 입이 딱 벌어질만한 이야기들이다. 빠워한 신여성이셨음.

1. 일제시대 북쪽에서 공장장 딸내미로 태어나 온갖 호사를 다 누리면서 학창시절을 보내셨다. 공장장이었던 아버지한테 밤에 놀러오던 손님들이 독립운동가였다는 클리셰같은 이야기는 덤.

2. 유치원때는 일본인 유치원을 다녔는데, 거기에 러시아인 친구도 있었다고.

3. 어린이 합창단을 했었고, 해방 후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 숨어지내다가(아버지가 자본가라서?) 북한 라디오 방송국 합창단 활동을 하셨다. 다시 방송국으로 가게 된 일화도 정말 신기했다. 고등학교때 소풍을 등대로 갔는데, 돌아다니다가 등대 옆 방송국에 우연히 들어갔더니 예전에 합창단을 맡았던 사람과 조우해서 '너 다시 합창단 해라'해서 하게 되셨다고. 

4. 한국전쟁때 해병대 행정/보급쪽으로 복무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6~70년대 장교로 근무하셨는데 할머니가 꽂아주셨다는 식으로 얘기하시기도 했다. 우스개소리인지 진짠지는 모르겠지만.

이외에도 아빠한테 건너 들은거라 정확하지 않지만 서울대 가정교육과인가, 그쪽으로 입학하셨는데 결혼하는 바람에 그만두셨다고.


할머니의 책장을 보면 니체와 하루키의 책, 마리아 칼라스의 음반 같은 것들이 꽂혀 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의 책장이라고 믿을 수 없을만큼 세련된 목록들로 가득차 있는데,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왜 반짝거렸던 할머니의 삶이, 결혼이라는 기점에서 뚝 하고 암전되어 버리는 걸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요새는 내가 좀 더 여성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었더라면, 혹은 역사나 문화인류학적 소양이 뛰어났더라면 할머니의 삶을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긴다. '무척 가치있는 이야기일 것 같은데 나같은 머글밖에 모르고있어ㅠㅠ'하는 답답함. 나 말고 다른 인터뷰이가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줬으면 하는 욕심. 뭐 이런 감정들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요원하고, 결국은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내 몫인 것 같다. 


사실, 친가 친척들의 관계가 소원하기도 했고, 나도 바쁘단 핑계로 명절날밖에 못찾아뵀었다. 그러니 이제사 찾아뵙는 건 좀 간질간질한 일이라 선뜻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할머니의 삶에 대한 내 호기심(불경스러운 말일수도 있지만 정말 호기심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이 요사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걸 느끼면서, 3월이 되기 전에 원통에 나 혼자 가서 하루이틀 묵으면서 할머니 이야기를 진득하게 듣기로 결심했다. 가는 길에 컬러링북도 몇권 더 사서 들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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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1-26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계셔서 아직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책도 주문해 드릴 수 있는 님이 부러워요.

AgalmA 2015-02-0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가 예술가시잖아요@@?
저 강원도 원통 알아요. 거기 앞강도 알고ㅎ...와, 거기도 예술가가 살고 있었어! 당연한 소리지만.
 
빈둥빈둥 당당하게 니트족으로 사는 법
파(pha) 지음, 한호정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 일년 반 가량 드문드문 백수로 지냈다. 나같은 사람이 보통의 `회사`에서 일하는 건 불가능하겠구나...하는 자포자기가 있던 차에 후배가 길을 제시해줬고, 작년엔 그걸 준비하면서 생활비도 마련할 겸 적당히 이런저런 일을 했다. 애인도 취직을 준비하며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했다. 둘 다 일하기도 했고 둘 다 쉬기도 했다. 한 사람만 일할 때도 있었다.
책을 읽다보니, 우리 둘 다 이 책이 말하는 니트의 범주에 들어가는 듯 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일하기 싫어한다는 점에서 나는 진정 니트,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점에서 애인은 부진정 니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작년은 돈에 쪼들리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즐겁게, 살만하게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책에서는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관계를 해결하는데, 나는 애인과의 단단한 유대감으로 돈 없이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순간순간의 스트레스는 분명히 있었다. 일기에 돈때문에 생기는 갖은 짜증을 적어둔 걸 보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고, 지금을 버텼으니 앞으로 어려움이 닥쳐와도 함께 극복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제 난 대학원에 가고, 애인은 포트폴리오가 쌓여 본격 구직활동을 시작한다. 당분간도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올해도 즐거우리라 감히 기대를 해본다.

일을 하는 사람이 늘 정해져 있을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일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일을 하고 그때그때 지친 사람들이 쉰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지치면 쉬고, 쉬고 있던 사람이 잠시 뒤 일을 하러 나간다. 그것이 몇 개월이나 몇 년 단위로 교대로 이어질 수 있다면 한 사람이 일하는 것보다 노동 형태에 더 유연성이 발휘된다. -218p

만약 자연스럽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정신이 균형을 잃고 무너졌거나 몸이 피곤한 것이니까 그럴 때는 될 수 있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쉬면 된다. 회복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뭔가 하고 싶어질 것이다. -126p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아무도 일을 하지 않게 돼 사회가 무너진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설마 모든 사람들이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협박 때문에 일을 하고, 그것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강제나 처벌을 통해서만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이라면 한심한 것이다. -216p

단지 좀 더 큰 시점에서 바라봄으로써 같은 사회에 사는 타인들에게 좀 더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니트족이 아닌 사람들이 니트족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니트족은 그냥 우리와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우리와 공통되는 것을 지닌 존재들이니까. -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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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을 지낸 동네를 떠난 뒤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이사온 동네는 빙수집이 변변치 않다는 점이었다. 최근 자그마한 빙수전문점이 하나 생겨서 신났었는데, 어찌 맛있는 건 금방 소문이 나는지 코딱지만한 가게가 맨날 미어 터져서 줄서고 난리다.

 

호밀밭의 그 빙수가 잊혀지지가 않아서 도대체 어떻게하면 그 맛을 따라할 수 있을까 싶어하던 차에, 그리운 그 룩을 표지로 쓰고 있는 책을 발견!  손에 넣고나서 눈으로 슥슥 읽고 책꽂이에 꺼내두었다가, 어제 드디어 개시를 해 봤다.

책에 나온 대로 우유얼음을 만들고, 미리 사뒀던 팥이랑 고명떡을 얹어 완성!!

 

 

획기적이다.. 이제 다시 빙고에서 줄서서 기다릴 일은 없을 것이야!

 

 어릴 땐 팥이 싫어서 줄기차게 과일빙수만 해먹었는데, 나이가 차츰 들면서 우유얼음에 찹쌀떡, 팥만 올린 빙수가 제일 맛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이번엔 빙수얼음만 만들었지만, 머지않아 팥도 삶고 베이스소스도 제조하고 있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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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학부 교양으로 라틴아메리카 관련된 수업을 들을 때였다. 다큐로 간단하게 소개된 공공의료 시스템의 내용은 이 책을 요약한 것이었는데, 흥미가 생겨 더 자료를 찾으려고 해도 그땐 이 책이 없을 때라 궁금한 마음을 품어두기만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보고 오!! 단숨에 읽어내리게 되었다.



'담장 안으로'라는 이름의 공공의료 시스템 '바리오 아덴트로'는 공중보건의가 있는 1차진료소를 거점으로, 전국 구석구석에 진단과 예방을 중심으로 한 공중보건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의사가 턱없이 모자랐던  초기에는 이들이 치료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의사들이 마을 주민의 삶에 밀착하여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예방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말 그대로 공중보건 중심의 1차 진료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쿠바에서 시작된 것으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계의 압박에서 살아남고 동맹을 늘려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한편 쿠바는 자본주의식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쿠바의 국제주의는 군사적 의미에서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쿠바의 국제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탄생한 사상이었다.

자신이 주창한 국제주의를 신천하기 위해 쿠바는 의료 봉사단과 교육 봉사단을 구성해 질병과 맞섰고 문맹과 싸웠다. 이런 쿠바의 노력은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천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뽑아 쓰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쿠바는 약소국이었기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인 차원에서 도울 힘이 없었지만 지난 5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개발 모델을 추종했지만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 나라들의 귀감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한 세기 전 호세 마르티가 국제주의를 제안하면서 주창한 "모든 인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p.265


최근 쿠바의 교육이나 의료, 협동조합 모델 등을 조명하는 책이 많아진 걸 보면 '모든 인류의 조국'을 지향하고 있는 그 정책이 빛을 보고 있는 듯.


요런 시리즈들이 검색해보면 꽤 많이 나와 있다.













또한 이 의사들은 오후에는 의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실습하는 선생이 된다. 대도시의 비싼 의대 역시 존재하지만, 이와 별개로 평생교육처럼 문턱이 낮은, 그러나 과정과 수료가 어려운 의학교가 곳곳에 생겨나 바리오 아덴트로의 공중보건의 자리를 채워 줄 의사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쿠바의 의사들이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후학을 재생산하고, 임무를 다한 쿠바의 의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평화의 군대"라고 부른다.


지역 통합 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골 지역에 살든 도시 빈민가에 살든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담장 없는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지역 통합 의학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통합 의학교가 "맨발의 의사"라 불리는 의료 보조원 양성을 위한 단기 연수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베네수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독특한 정책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바리오 아덴트로에 나가 진료하는 의사를 도우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 보건 의료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오후에는 일반적인 의과대학에서 받는 수업과 같은 의학 수업을 받는다.

-p.18


가정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무료 의학 교육 제공, 보편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건강보험 마련,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에 적절한 보건 의료 시설 구축이 그 조건이다.

-p.336



이 책은 쿠바 식의 의료 시스템에 반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의사가 있다는 점, 턱없이 적은 봉급에 베네수엘라의 보건의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졸업한 뒤에 보건의가 되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동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의사의 특권이 높은 소득과 과시적 소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이타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과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를 존경한다.

-p.322



자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있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제1세계가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아벨 프리에토 쿠바 문화 장관은 2004년 알레한드로 마시아 기자, 훌리오 오테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쿠바 정부가 부유한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부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가정에 수영장이 딸린 집과 별장, 자동차 2대씩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쿠바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문화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쿠바는 소비주의와 정반대되는 문화, 즉 물건 구입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맞서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p.263


'존경'을 먹고산다니, 얼마나 이상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미국처럼 빚을 떠안고 시작하게 되거나, 한국처럼 돈이 없으면 점점 입학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과는 분명 시작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남의 제도가 더 좋아보이기도 하고, 이 책과 내가 놓치고 있는 어두운 면도 분명 많겠지만... 적어도 진주의료원이나 카프병원처럼 국공립 의료원이 문닫고 있는 한국에 살면서 '왜 우리는?'하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었다(물론 노답).


보면서 엘 시스테마도 떠올랐다. 역시 베네수엘라의 공공 음악교육 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교육과정에 흥미를 갖게 한 사업이다. 바리오 아덴트로와는 다르게 차베스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호세 안토니오 아브라우 박사의 노력으로 베네수엘라에 자리를 잡고 큰 성공을 이룬 사례. 이 또한 공공영역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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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권을 누리도록 한다면
교육이 아닐 테지요.

함께 나눌 뜻으로
법도 의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가르치면서 배우리라 느껴요.

브륀 2013-07-23 11:48   좋아요 0 | URL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함께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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