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사랑
김현주 지음 / 바이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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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치에서 구독하던 연재소설이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희수'와 '윤주'라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대화는 이성애 기혼부부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살면서 성애적 파트너십을 지향하거나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대화와 섹스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관계성을 유지해 나가게 하는 두 개의 바퀴라는 것이다.


나는 남편과 2011년부터 연애를 했고 2019년에 결혼했다. 남편과 만나면서 가장 많이 바뀐 점이 있는데, 그 전의 내가 고맥락 문화의 언어에 절여져 있던 사람이었던 반면(20대 초중반까지 내가 블로그에 쓴 글들을 읽어보면 내가 무슨 상황에서 그렇게 모호한 표현으로 글을 썼는지 한참 생각해야 한다) 연애를 시작하고부터는 남편과 투닥거리면서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맥락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마음에 드는 것은 아낌없이 칭찬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최대한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배려하면서 객관적 사실을 명료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나뿐만 아니라 남편도 같은 노력을 계속 해왔다. 그래서 지금은 부부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부부간의 섹스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다. 부부라는 묘한 관계의 전제 자체가 섹스하는 사이라는 것을, 섹스가 행복한 결혼생활의 키 역할을 하는 절대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나는 결혼 10년이 넘을 즈음에 확실히 인지했다. 결혼 연식에 상관없이 주기적으로 섹스하는 사이라는 사실은 그들 삶의 많은 부분을 대변해준다. 부부끼리 섹스를 안 한다(드물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는 것은 섹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p.130
"(…)물론 그때도 사이가 좋고 지금도 좋대. 근데 그 전하고는 너무나 다른 관계가 됐다는 거야. 정말 신기하지? 자기는 그동안 우리는 이대로도 정말 행복하다,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고 자기의 행복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대. 근데 그게 오만이었다는 거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인생이래. 뭐라고 했냐면 예나 지금이나 행복의 울타리 안에서 사는 건 맞지만, 지금은 생활의 요소요소가 다 기쁨이래. 자기 남편도 당연히 그럴 것 아니겠냐면서, 사이가 좋은거? 원만한 거? 그거랑 사랑하면서 애정을 나누고 사는 건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거라고 했어. 그러면서 나한테 지금 잘하는 거라고 힘들어도 계속 용기내라고 하는거야. 나 울고 싶은 걸 겨우 참았어." -p.190

책을 읽고 나서 여러 번 곱씹은 부분은 섹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결혼에 대한 조롱이 밈처럼 소비되는 사회에서(실은 나도 볼 때마다 엄청나게 웃는 편이다. 특히 결혼하지마 드립 같은 것은.) 우리는 상위 1%정도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윤주와 희수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구나 하는 기대가 생겼다.

사실 10대때부터 온갖 매체를 통해 접해서 이론은 만렙이었고 적극적인 성격탓에 실전도 이만하면 충분하다 자부해왔었으나.. 함께 한 기간이 길어지고 나이들수록 현생에 치이면서 얼마간 못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스트레스때문에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고 귀찮아지는 날도 있고 하면서 그래도 이만하면 행복해, 잘 살고 있어 라고 생각했었는데 희수가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들은 부부상담 이야기가 내 뒷통수를 치는 느낌이었다.


"아니야. 내일은 또 내일의 섹스가 있는 거야. 조금 아쉬울 수 있지만 서로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만으로도 피곤했던 하루를 기분 좋게 끝내고 편안히 잠드는 거지. 마음이 충족된 채로."

-p.163


매일 섹스를 한다는 윤주네 부부의 이야기를 보면서, 초반엔 '아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체력이 되나? 소설적 허용 아냐?' 하고 생각했었는데 반드시 사정과 오르가슴으로 끝나는 풀코스만이 섹스는 아니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온갖 이론서에서 전희-삽입-사정만이 섹스가 아니다!라고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런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던 건 이 책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소설이든 만화든 영화든 섹스는 항상 풀코스로 그려지니까. 하지만 그거야말로 일종의 클리셰겠지.


소설 전반에 걸쳐 희수의 남편이 희수와 윤주(와 독자)를 분통터지게 한 이유는 막바지에 밝혀지는데 막상 듣고나니 사소한, 그러나 본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허탈하면서도 그게 독자에게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건, 이 소설이 오롯이 희수와 남편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윤주의 목소리를 통해 좋은 부부관계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고나서 남편과도 많은 이야기를 했고, 정말 책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도 읽어보겠다고 했다. (솔직히 놀랐다😜)


학부때 페미니즘 수업이었는지 세미나였는지에서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를 읽었었는데 그때 이 책이 나와 있었다면 난 이 책도 같이 읽자고 강력하게 건의했을 것 같다. 그 아쉬움을 담아,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게 되면 결혼선물과 함께 이 책을 한 권씩 안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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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집빵 - 한 가지 반죽으로 만드는 39가지 아침빵 가장 쉬운 집빵 레시피 시리즈
베카 아키코 지음, 서수지 옮김 / 옥당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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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들어 냉장고에 두고 하룻밤 지나고 난 뒤 구우면 되는 레시피라 해서 구매해봤다.
빵은 좋아하지만 발효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포기한지 꽤 됐는데, 기본 레시피인 베치번즈를 만들어보니 생각보다 맛있는 빵이 나왔다.
큰 수고 들이지 않고 부담없이 만들 수 있는 레시피들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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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0-02-17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실포실 맛나 보여요
 

말 쉽게 던지고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면서 그런 자신을 담백하고 쿨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변호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기 말은 똑바로 하자. 그건 솔직한 게 아니라 무례하고 무식한 거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 거짓말쟁이라서 말을 조심히 하는 거냐고. 그건 그들이 기분 꼴리는 대로 뱉으면 엉망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솔직함이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것 외에 아무 기능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솔직함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자들이 얼굴 안 본다고 말하는 것의 진짜 의미는 뭘까. 정말로 얼굴이 못생겨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일까? 그럴 리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그건 못생긴 것이 괜찮을 만큼 다른 장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이 남자들과 다르다. 남자는 자기 눈에 예쁘지 않은 여성에게는 잘 끌리지 않는다. 왜냐면 남자에게 여자의 얼굴은 대체가 거의 불가능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다른 장점이나 매력으로 그것을 덮기가 어렵지. 여자들은 그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결국 여자들이 말하는 얼굴을 안 본다는 말은 사실 ‘얼굴만 보는 것이 아니다.’가 되는 것이다.

일단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포기해야 할 부분도 있다. 내가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 생각이 든 건 전체를 봤을 때 내 잘못이 크다는 걸 자신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의 작은 잘못은 조금 덮어둬라. 싸움의 주 원흉이 자신인 걸 아는데 뭐 잘했다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말 다 하려고 하나. 그냥 죗값이라 여기고 넘어가라. 어떤 부분은 꼭 말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이 부분만은 분명히 당부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 같다든가 할 때 그런 게 있으면 사과를 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감정이 제자리를 찾은 뒤 이야기하라. 아마 훨씬 더 조율이 쉬울 것이다. 사과할 때는, 사과만 하고.

섹시한 사람들이 유행에 목매지 않고 자연스러운 멋이 나는 이유는 자기 세계가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섹시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세계관이 확실하다는 것과 동의어일 수 있다. 세계관이 뚜렷한 것은 곧 그 사람만의 색깔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 사람만의 향기.

그렇게 되려면 우선, 자기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뭐가 어울리고 뭐가 안 어울리는가, 어디에 가야 마음이 편하고 누구와 있는 것이 즐거운가. 이 고민들을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토론한 사람들은 단단한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러면 당연히 삶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일에도 열정적인 모습이 나오게 된다. 경상도 사투리로 ‘짜친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람들은 뭘 해도 짜치는 느낌이 없다. 어떤 선택이든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여유가 나오고 섹시하다는 느낌이 나온다. 사람은 복근이 없어도 섹시할 수 있다. 자기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사람들은 주름살이 있어도 섹시하다. 섹시해지고 싶다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와 열심히 대화하라.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지금 힘든 게 있고 괴로운 게 있을 거다. 근데 동시에 행복한 면도 같이 있다는 거지. 그건 옛날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러니까 하루치의 행복이 있는데, 이게 나중에 좋은 날이 와서 막 엄청나게 커질 거라는 그런 기대는 하지 말자. 왜냐면 ‘오늘’도 그 언젠가 과거에는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 기대했던 날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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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결핍이 다 채워지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때로는 두려웠다. 나는 단지 네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너를 결핍을 채우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기도 했다. 6년째 네 옆에서 사랑을 충분히 받으며 내가 깨닫게 된 것은, 결핍이 채워지는 건 관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이었다.

-지금 너를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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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촌 언니와 서울에 전셋집을 얻어 함께 자취를 하기로 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던 집 방에서 내가 가져가야 할 물건들을 챙겼다. 당장 입을 옷과 노트북, mp3 같은 것을 넣고 나니 나머지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다시 볼 거라 생각하며) 중학생 때부터 모은 영화 잡지들, 공부하기 싫을 때마다 주고받은 학교 친구들과의 쪽지들, 중고장터에서 사 모은 VHS테이프들, 내가 찍힌, 찍은 사진들, 쓸데없이 모은 액세서리와 작은 장난감들.

언젠가 다시 본가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치 여행이나 캠핑을 떠나듯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챙겼다. 그때는 몰랐다. 내 방이 그 어설픈 독립 선언과 함께 사라지게 될 거라는 걸. 기숙사와 오피스텔, 수많은 자취집을 옮겨 다닐 동안 늘 그대로일 것 같았던 ‘내 방’은 이사를 거듭할 때마다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렸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뒤, 나에게 남은 짐은 여행 캐리어 하나였다. 그것이 내 독립의 결과였던 것이다.
<내 방>

나는 정말 신기한 지혜와 현명함이 나에게 저절로 주어질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판단하고, 적응하고, 때로는 참아내는 능력을 기르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나에 대한 나의 믿음도 그냥 자연스럽게 깊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뿌려진 마취에 가까운 카피들은 나를 더 부추겼다. ‘나의 방식대로 간다.’ ‘나다운 게 가장 중요하지.’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게 정답이야.’(대부분 신발이나 청바지, 쭈쭈바 광고 카피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왜 한 건지도 모를 말들을 내 인생에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 아무것도 훈련되지 않고 할 계획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계속 믿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말 하나로 나는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승인하고 스스로를 자주 속였다.
<위대한 하루>

대학교에 다닐 때는 삼청동에 자주 갔다. 천장이 높은 미술관에 가서 큰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뭔가 된 것만 같았다. (그럴 리 없지만) 멀리 보이는 북악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차갑고 가벼운 공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넉넉한 거리, 웅장한 건축물들의 세련되고 약간은 비린 냄새. 머리를 비우고 오도카니 그 안에 서 있으면 몹시 허무했고 그래서 좋았다. 아트선재에서 독립영화를 보고 풍문여고 앞길을 따라 안국동을 걸으면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했던 얘기들이 생각났다. "서울에 가야 된다. 일단. 무조건. 그거 말곤 답이 없다."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좌절하듯 생각했다. 진짜 답이 없었을까?
<내가 죽게 될 도시>


언젠가부터 서울의 모든 곳이 파스를 떼어낸 자국처럼 얼얼하고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제일 좋아했던 사람과 소리를 지르며 싸웠던 일도, 면접에 떨어져서 15킬로미터를 걸었던 길도, 늘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픈 친구와의 마지막 만남도, 내 20대를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친구와의 기억들도 다 서울 곳곳에 있다. 모든 서울의 공간이 실수와 안타까움과 이상한 욕망으로 채워지게 됐다. 서울이 싫었고, 그 감정들이 아물고 나니 어디든 지루했다. 관광객처럼 이곳을 동경하고 떠돌 때가 좋았는데. 나는 왜 여기 에 오게 된 걸까.
<내가 죽게 될 도시>



과거의 나에게 고향이란 물이 없는 어항 같았다. 출세를 위해 준비하고 상경을 위해 대기하는, 오로지 밤늦은 시간의 학원 차와 학원 간판만이 에너지를 가진 멈춰진 공간. 나는 반짝이는 낚싯바늘을 하염없이 기다렸고, 결국 바다 같은 서울에 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매일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쓸데없이 그 어항에 물이 채워져 있었다면 어땠을까 가정해본다. 내가 어느 곳에 살고 있건 지겹고, 싫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기회가 내 집 앞과, 내 회사 근처와, 내가 보는 텔레비전까지, 모든 곳에 있었더라면. 그 어항에서 자랐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동경하고 어디에 있을까.
<내가 죽게 될 도시>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아야지, 다른 사람 이야기도 선을 긋고 들어야지, 이런 기준들을 계속 만들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단 그냥 그게 어른스러운 건 줄 알았다. 감정적인 빚을 지지 않는 게 인간관계에서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고민을 털어보라고 말하거나 공감을 잘 해주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으면 지식 in을 쳐보면 됐다.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도 많고 평생 얼굴 안 볼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써준 답변도 내가 알아서 받아들이면 되니까. 그렇게 그러고 말면 그만이지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인생이 걸린 고민을 듣고도 지식in 답변 수준으로 대하고 있었다.
<안녕들 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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