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책을 처음 읽은 건 초등학생때였다. 초4인지 5였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척이 없긴 하다. 아마도 19금 책이 아닌 이상 내가 읽는 책에 대해 어떤 검열도 하지 않으셨던 어무니께서 내가 서점에서 고른 책을 그냥 사주신 것 같다.

어떤 경로로 손에 넣었는지는 까먹었는데, 아직도 그 '네 멋대로 해라'는 본가 책꽂이에 고이 꽂혀 있다. 그 책은 착한 아이 컴플렉스가 있었던 내게 이렇게 살 수도 있다니! 하는 충격을 줬던 걸로 기억한다. (네 멋대로 해라와 이빈의 '걸스'가 청소년기 내 성격형성에 영향이 컸다.)

 

네 멋대로 해라를 좋아했던 나머지 담임 선생님이 복도에 게시할 독후감을 써오라는 퀘스트를 줬을 때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갔는데, 파릇한 새싹을 키워야하는 초등학교 5학년 교실로 올라가는 복도에 게시하기엔 너무 자극적이었기 때문인지 빠꾸당했다. 다른 책으로 다시 써오라고... 그래서 난 '안네의 일기'를 읽고 써갔다. 최고의 고전으로 골랐으니 이제 됐나요? 하듯이.

그때 그 책을 읽고 얼마나 이해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예종이 뭔지도 모를 때니까!

독후감도 빠꾸당한 마당에 어디 써놓은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금 읽으면 당연히 그때완 소회가 다르겠다만, 올 설에 내려가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간질간질하게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오를지도.

 

 

신문과 한겨레21을 통해서 드문드문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는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

책으로, 다시금 그녀의 책들을 책장에 꽂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분명 이야기들은 정말 먹먹하거나, 슬프거나, 답답한 이야기였는데 특유의 문체때문인지 재미있어서 이걸 재밌어 하는 내가 나쁜 년이 된 것 같은 배덕감이 들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서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울면서 "재밌어.."라고 하는 내 꼴을 보면서 애인도 복잡한 기분이었겠지만.

거기에 반가움 반, 그동안 여러 책이 있었음에도 사지 않았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반 해서 여유 있을 때마다 다른 책도 사읽기로 했다. 그리고 주변에 계속 추천하는 걸로 내 팬심에 대한 부채감을 좀 갚아보고 싶다.

같은 세대 작가이니만큼 내가 책을 계속 읽을 수 있는 동안 그녀가 계속해서 글을 써주면 좋겠다.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것 같으니 매번 찾아서 보기는 힘들겠지만 책이 나오면 챙겨보는 걸로.

내가 따로 간직하려고 엄마에게 아버지를 좀 놓고 가라고 했더니 엄마도 참, 아버지를 빈 청국장통에 넣어놨지 뭐예요. 핑크색 프림통에 당신을 한 점 흘리지 않고 무사히 옮겨 담고 빈 통을 헹구려 하니, 물에 둥둥 뜬 당신의 조각들이 왜 그렇게 눈을 찌르듯 아파왔을까요. 아버지, 당신이 살아 계셨다면 얼굴을 찡그렸을 테지만 차마 당신을 하수구로 흘려보내 김치찌꺼기니 어느 집의 먹다 남은 찌개국물이니 하는 것과 섞이는 걸 볼 수 없어서 저는 당신을 원샷했답니다. 웬일로 목에 걸리는 것 없이 넘어가준 아버지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어요.
-p.29 내 안에, 아버지

여기저기 파헤쳐 찾아봤지만 낙엽이며 흙이며 온통 파놓은 거기서 그 조그만 아이폰을 찾을 수 있을리가. 죽은 개 묻다가 아이폰을 묻어버리다니 하도 한심한 일이라 슬프다가 갑자기 우스워졌다. 그렇다고 무덤을 다시 파헤칠 수는 없는 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다가 비직비직 웃었다. 올리야, 그래 아이폰 가져가라. 아버지 갖다 드려라. 아버지가 아이패드 갖고 싶어 하셧는데 이거라도 갖다 드려. 네가 가져다 드려. 보고 싶으면 전화할게. 잘 지내고, 가끔 카톡해라....

이것이, 내가 리퍼까지 받고도 끝내 스마트한 인생을 살지 못한 한심한 이야기다.
-p.35 전혀 스마트하지 못한 이야기

세상만사를 전혀 모르시는 부모님의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닳고 닳은 기분에 젖은 나는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실제로 피해를 봤을 경우 의식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난센스라고 후에 어떤 친구가 말해주었다. 부모님이 그렇게 맑은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깊은 신앙 덕분이었다. 내게는 없었던 바로 그것. 아무도 오지 않는 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나중에 다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그러면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곤 했다. 지금, 지금 갚아줘요! 바로 지금! 물론 하나님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술을 마시러 갔다.
p.68 경찰 아저씨의 옷자락

지금 병상에 누워 힘겹게 싸우고 계시는 리영희 선생님 역시, 그 `일체의 비결`을 알고 계셨다. 선생님은 "인생에 대단히 로맨틱한 것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면, 많은 것이 간단해진다"고 특유의 간명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20대가 그토록 독하고 힘들었던 이유는 여기보다 어딘가에, 라고 중얼거리며 끝없이 뭔가 대단히 로맨틱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삿된 망상이었다. 그 망상이 헛된 기대를 부르고 망상과 기대가 힘을 합쳐 피를 펄펄 끓게 하던 거였다.
-p. 164 지금은 이게 다예요

그나마 강용석 같은 인간들이 `강용석 모먼트`를 일으킬 때는 우리 편 아니니까 날라차기라도 할 텐데, 그래도 `동지`인 것 같은 사람들이, 우리 쪽인 것 같은 사람들이 저런 순간을 일으킬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제일 곤란하다. 이럴 때 그냥 분위기 맞춰서 좋게 넘어가야 하는 것이 동지인 건지 다음에 어디 가서 그러지 말라고 똑바로 쏘아붙이는 게 동지인 건지 헷갈리다가 나중에 말하려고 생각하다 보면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가 결국 나만 뻘쭘하고 속이 상하는 지경이 되어 결국에는 아 내가 싸게 굴었나, 내가 잘못된 사인을 보냈나? 하고 자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폭력 피해자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빠져 들어가는 전형적인 개미지옥이다.
-pp. 184~185 보수와 진보가 다르지 않을 때

사는 게 강퍅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때 과자를 뿌리던 할머니 모습을 생각하고 그 목소리를 떠올린다.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뻐. 악에 받쳐 잘 살겠다는 것들은 안 이쁘지만 살겠다는 것들은 이쁘다. 그 다음부터 나는 함부로 비둘기 징그럽다 말 안 하기로 했다. 누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인가. 살겠다고 하는 것들끼리.
-pp.234~235 살겠다는 것들은 다 이쁘다

그 일 할 사람, 그 일 하지 않을 사람으로 나누는 이러한 태도는 한 발자국만 떼면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이나 한진중공업 노동자 같은 사람들을 탄압하는 사용자들과 같은 태도가 쉽다. 그런 대접을 당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일 할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그런 일 할 사람들의 일, 남의 일 이렇게 칼같이 줄을 그을 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그런 일 할 사람, 아닌 사람으로 우리가 남을 판단한 바로 그 잣대로 나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능력에 따라 그의 시장가치가 정해지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사람 사는 질서라고 칼같이 당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 나처럼 시장 가치가 없는 사람과는 별로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겠지만, 나 역시 그런 분들과는 마구 척지고 싶다. 있는 대로 척지고 싶다. 평생 척지고 싶다. 만나봤자 서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확실하게 척지고 사는 게 피차 정신 건강에 좋으니까.
pp.276~277 무혈의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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