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공공의료시스템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학부 교양으로 라틴아메리카 관련된 수업을 들을 때였다. 다큐로 간단하게 소개된 공공의료 시스템의 내용은 이 책을 요약한 것이었는데, 흥미가 생겨 더 자료를 찾으려고 해도 그땐 이 책이 없을 때라 궁금한 마음을 품어두기만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보고 오!! 단숨에 읽어내리게 되었다.



'담장 안으로'라는 이름의 공공의료 시스템 '바리오 아덴트로'는 공중보건의가 있는 1차진료소를 거점으로, 전국 구석구석에 진단과 예방을 중심으로 한 공중보건정책을 펼치는 것이다. 의사가 턱없이 모자랐던  초기에는 이들이 치료 중심의 활동을 했지만, 의사들이 마을 주민의 삶에 밀착하여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예방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말 그대로 공중보건 중심의 1차 진료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사업은 쿠바에서 시작된 것으로,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세계의 압박에서 살아남고 동맹을 늘려가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다.


한편 쿠바는 자본주의식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그러나 쿠바의 국제주의는 군사적 의미에서의 국제주의가 아니었다. 쿠바의 국제주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을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개발도상국에서 탄생한 사상이었다.

자신이 주창한 국제주의를 신천하기 위해 쿠바는 의료 봉사단과 교육 봉사단을 구성해 질병과 맞섰고 문맹과 싸웠다. 이런 쿠바의 노력은 군사적으로 개입하거나 천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뽑아 쓰는 선진 자본주의국가의 행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쿠바는 약소국이었기에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인 차원에서 도울 힘이 없었지만 지난 500여 년 동안 자본주의 개발 모델을 추종했지만 아무런 혜택을 보지 못한 나라들의 귀감이 될 수는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쿠바는 한 세기 전 호세 마르티가 국제주의를 제안하면서 주창한 "모든 인류의 조국"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게 되었다.

-p.265


최근 쿠바의 교육이나 의료, 협동조합 모델 등을 조명하는 책이 많아진 걸 보면 '모든 인류의 조국'을 지향하고 있는 그 정책이 빛을 보고 있는 듯.


요런 시리즈들이 검색해보면 꽤 많이 나와 있다.













또한 이 의사들은 오후에는 의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실습하는 선생이 된다. 대도시의 비싼 의대 역시 존재하지만, 이와 별개로 평생교육처럼 문턱이 낮은, 그러나 과정과 수료가 어려운 의학교가 곳곳에 생겨나 바리오 아덴트로의 공중보건의 자리를 채워 줄 의사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초기에는 쿠바의 의사들이 베네수엘라의 바리오 아덴트로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후학을 재생산하고, 임무를 다한 쿠바의 의사들은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평화의 군대"라고 부른다.


지역 통합 의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시골 지역에 살든 도시 빈민가에 살든 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필요가 없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자기가 사는 곳에서 의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담장 없는 대학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지역 통합 의학교를 독특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역 통합 의학교가 "맨발의 의사"라 불리는 의료 보조원 양성을 위한 단기 연수 시스템인 것은 아니다. 지역 통합 의학교는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형의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베네수엘라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독특한 정책이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바리오 아덴트로에 나가 진료하는 의사를 도우면서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공공 보건 의료에 대한 포괄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오후에는 일반적인 의과대학에서 받는 수업과 같은 의학 수업을 받는다.

-p.18


가정 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 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선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무료 의학 교육 제공, 보편적이고 평등 지향적인 건강보험 마련, 도시 빈민가와 농촌 지역에 적절한 보건 의료 시설 구축이 그 조건이다.

-p.336



이 책은 쿠바 식의 의료 시스템에 반발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는 의사가 있다는 점, 턱없이 적은 봉급에 베네수엘라의 보건의들이 불만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다는 점을 담담하게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라틴아메리카 의과대학의 문을 두드리고, 졸업한 뒤에 보건의가 되어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동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의사의 특권이 높은 소득과 과시적 소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사들이 봉사하는 지역사회로부터 받는 존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지역사회는 이타적 정신으로 무장하고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모든 환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지역사회 주민의 건강과 "안녕"을 증진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의사를 존경한다.

-p.322



자본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사하는 과정에서 희생해야 할 것도 있었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제1세계가 누리는 수준의 물질적인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이었다. 아벨 프리에토 쿠바 문화 장관은 2004년 알레한드로 마시아 기자, 훌리오 오테로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쿠바 정부가 부유한 자본주의 소비사회가 누리는 물질적 부를 모든 국민에게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모든 가정에 수영장이 딸린 집과 별장, 자동차 2대씩을 줄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대신 쿠바는 정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품위 있는 생활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쿠바는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이 가능한 문화를 조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질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쿠바는 소비주의와 정반대되는 문화, 즉 물건 구입이 행복을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맞서는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p.263


'존경'을 먹고산다니, 얼마나 이상적인 이야기인가.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미국처럼 빚을 떠안고 시작하게 되거나, 한국처럼 돈이 없으면 점점 입학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과는 분명 시작 자체가 다를 것이다.


남의 제도가 더 좋아보이기도 하고, 이 책과 내가 놓치고 있는 어두운 면도 분명 많겠지만... 적어도 진주의료원이나 카프병원처럼 국공립 의료원이 문닫고 있는 한국에 살면서 '왜 우리는?'하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었다(물론 노답).


보면서 엘 시스테마도 떠올랐다. 역시 베네수엘라의 공공 음악교육 사업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교육과정에 흥미를 갖게 한 사업이다. 바리오 아덴트로와는 다르게 차베스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호세 안토니오 아브라우 박사의 노력으로 베네수엘라에 자리를 잡고 큰 성공을 이룬 사례. 이 또한 공공영역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명료하게 보여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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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7-22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권을 누리도록 한다면
교육이 아닐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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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 의학도 철학도 문학도 예술도
가르치면서 배우리라 느껴요.

브륀 2013-07-23 11:48   좋아요 0 | URL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함께 살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