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한 편견이 담긴 용어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저항 없이 지나치는 순간 우리는 그 단어를 태생시킨 거대한 차별 구조에 편입되고, 차별 행위를 조장한다. 기호 언어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언어는 파시스트"라는 말로 언어의 권력적 측면을 갈파했다. 그는 언어는 우리의 무의식을 만들고, 우리는 그 언어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특정 계급과 특정 언어의 밀착 관계에 의해 권력의 수직적 위계질서가 고착된다고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바르트는 언어가 권력을 행사하려 들 때마다 그 언어를 버리고 권력이 우리를 이용할 수 없는 다른 자리로 끊임없이 이동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언어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권력의 구조적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언어 표현을 끊임없이 따져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학자의 말]-6쪽
이러한 일상적 표현에 묻어 있는 정서는 교수님이 거론하신 '좌빨' 논쟁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즉 동일자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타자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배려가 담겨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물 안에 들어가 자신이 보는 하늘이 전부일 거라는 편견, 우물 안과 밖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틀을 고수하는 무지, '나'는 옳고 '그'는 틀렸다는 오만은 사실과 진실의 세계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지요. (중략) 그러나 우리가 유아론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비록 타자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내면적 경험을 통해 타자의 행위를 이해하는 역지사지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소통이 가능하려면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타자의 존재에 대한 몰인식은 타자에 대한 몰인정한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저는 속빈 강정 같은 '좌빨' 유의 무의미한 말이 유통기한 없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자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 문제가 여기에 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빨]-34~35쪽
없는 말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우리는 품위와 격을 갈망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보입니다. '국격'이라는 어휘의 순기능이 정말 있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정향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방향은 마갈릿이 언급한 바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 사회이며 사회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합당한 명예를 부여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국격]-76쪽
다양하게 존재하는 철학적 관점과 논란들이 나름의 깊은 근거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이슈에 대한 정답을 쉽게 구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답을 구하고 있는 이유가 있음도 겸허하게 인정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완벽히 옳고, 완벽히 틀린 것이 없다는 점에서 양시론과 양비론의 설득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실생활에서도 보면 이런 양시론과 양비론을 말하는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서 판단을 내려주는 듯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문제점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대안은 없습니다. 최선이나 최악은 사실 많지 않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떤 논란과 싸울 거리가 생겼을 때 최선과 최악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그 노력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려서 차선과 차악이라도 찾아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두고 흑백논리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권력에 의한 억압이 아닐까요? [양비론, 양시론]-102쪽
정의나 인권과 같이 공동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을 '권리 상호 간의 충돌'로 환원시키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버스나 철도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 문제를 시민들의 이동할 권리와 대립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파업이라는 사회적 쟁의의 근본적인 언인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문제 해결에 매우 중요한데, 그보다는 표면적인 두 권리의 충돌이라는 일종의 완곡어법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문제의 원인은 매몰되고 피차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력들 간의 다툼으로 왜곡됩니다. [권리]-105쪽
저는 인간 언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나치가 완곡어법의 상투어를 통해 아이히만 같은 사람들이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현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도록 세뇌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나치 정권은 학살을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 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 작업은 '재정착', '동부 지역 노동'등으로 불렀습니다. 말 자체는 행위이며, 말은 현실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말하기의 무능성을 생각과 판단의 무능력과 충분히 연관 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실]-192~194쪽
세사라니는 아이히만이 단순히 히틀러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또는 거대한 나치라는 전체주의 시스템 안에 있었기에 학살자가 되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두고 축적된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반감, 그리고 학습하고 연구하며 발전시켜온 인종주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이히만과 같은 학살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전체주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적인 결론을 던졌습니다. 집단 범죄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악행에 가담하거나 전혀 생각 없이 명령자들은 추종하는 것은 아니며, 특정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거나 자기 이익을 철저하게 계산한 후에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루시퍼 효과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로 인해 누구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악의 평범성에 동의하지만, 어렵지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의 양심과 의지도 작동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 같은 맥락으로 명령에 따라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 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맹목적으로 따라간 대중이라 하더라도 결코 무죄하지 않습니다. [평범]-205~206쪽
악의 평범성에 대한 과도한 주장은 책임 회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도 특별히 악한 상황을 만나면 약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집단에 가담했다면 개인이라도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식민지, 전쟁, 독재 안에서의 악행에서부터 최근 이명박 정권의 범죄까지, 열악한 시대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거나 상부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금물입니다. [평범]-207쪽
순수가 변질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능성 자체가 현재의 순수한 행동을 마비시키고 바람직한 결정과 선택을 미루고 회피하게 만든다면, 변질된 것은 현재의 순수가 아니라 바로 순수의 기표를 오용하고 있는 그 사람입니다. (중략) 그런 사람들에게 혹시 순수를 향한 동경과 응시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결코 순수를 경험하거나 맛볼 수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순수라는 기표(단어)로 가리키는 실상은 자신의 사적 욕망일 뿐 정작 아무것도 가리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심지어 사랑한다 말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보고 사랑하는(집착한다는 말이 더 적절하지요) 대상은 그 자신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허언은 존재의 기갈을 결코 채울 수 없습니다. 그 자신에게조차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광장에 목마름과 배고픔이 가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순수'를 가장한 '불순'한 허언이 가득합니다. [순수]-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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