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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염천 -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서영 옮김 / 명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여행을 준비하며 여행 사이트에 가보면 대게 하는 말이 아는 만큼 보인다. 공부하고 떠나라는 소리다. 여행이 그렇고, 독서도 읽는 사람이 느낀 만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와닿는것 같다.
그리스, 터키는 나의 첫 출장지였다. 유달리 독서에 탐닉하고, 지식에 대해 욕심이 많았던 상무님이 전에 대학교에서 일했다는 말에 내가 무지 똑똑할거라고 오해를 하셨던것 같다. 그래서 입사한지 2달 밖에 안된 나를 따로 방에 불러 세계 각국으로 갈 출장 화일을 쭈욱 펼쳐 놓고는 고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들어간지 얼마 안되는 직원이, 게다가 출장 지역 선택의 권한까지...
그러나 난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지식도 없었던 그리스, 터키 지역을 덥썩 골랐다. 한마디로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가보겠어"라는 심사였고, 예상 그대로 그 이후 다시 가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그 총애(?) 덕에 같은 나이에 나보다 2달 먼저 입사해 들어 온 녀석은 날 따로 불러 회사 나가라고 협박할 지경이었지만, 출장 당일은 무거운 트렁크 까지 들어주며 배웅을 해주고 내가 무사히 출장을 마친 이후로는 내게 마음을 열었다. 출장 다녀오고 얼마 안되서 IMF 위기로 회사는 부도가 났고, 그 녀석은 그 길로 지방으로 내려가서 연락도 안되지만 나중에 부장님이 날 보고 상무님과 어떤 인연인지를 물은걸 보면 자존심 강하던 그 녀석이 아마도 부장님께 자기의 고통을 토로한것 같았다.
그 당시에는 날 괴롭히던 녀석 탓에 매일 매일 머리털이 꽤나 빠졌는데, 그런 고통을 겪으며(?) 다녀온 그리스, 터키인지라 짧은 출장이었지만, 내게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것같다.
하루키 책은 매번 나오기가 무섭게 사서 봤어도, 이책은 출간후에 많이 망설였다.
갑자기 88년도 여행기가 뒤늦게 튀어 나오는지라 "먼북소리"의 짜집기는 아닌가 괜히 의심하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간혹 책을 읽으며 깊이 빠져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하루키의 아토스 여행이 내겐 그랬던것 같다. 아토스 섬 구석구석의 수도원을 보는 여행인지라 읽는 나마저 그 까다로운 아토스 섬에 대한 그리고, 수도승에 대한 예의로, 책장 넘기기조차 조심스러워졌는데, 하루키 특유의 유머 앞에서는 그런 긴장감이 풀려버린다. 미슐렝 가이드 북처럼 별점을 매긴다거나.....수도원 음식 앞에서 꿍시렁대는 모습....
그리스에는 선원이 많다는 하루키의 말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을 가봤다는 선원 출신의 수도원의 급사 아저씨 - 나도 이런 아저씨를 만난적이 있다. 내가 묵던 호텔의 엘리버이터 안에서 만난 아저씨, 아니 할아버지에 가까웠던 그리스인도 나에게 어디서왔냐? 나도 너네 나라 가봤다. 인천, 부산, .....
그런 선원 출신이 많다는건 나중에 알았지만...그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한국을 다녀온 대단한 사람을 만난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보면 쓰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많은 특색이 있다. 역사를 위주로 쓰는 사람, 문학 작품을 위주로 쓰는 사람....가는 방법(route)을 위주로 쓰는 사람, 사진이 매 페이지마다 있는 사람....
하루키의 책을 보면 이건 어떤 형식은 없다. "먼 북소리" 처럼 자신이 느낀 바와 먹은 이야기를 그냥 풀어간다.
우리가 그걸 읽으며 터키의 어느 지역을 가는 방법을 정확히 배울 수는 없고. 역사 부분에서는 이런게 아닐까 하는 의견만 얻을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가 느낀 건 알수있다. 마치 책을 읽는 내가 그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아토스 섬의 산을 넘는 듯하고, 그 뜨거운 햇살을 다 받는 듯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힘들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이젠 여행후의 따뜻한 샤워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