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
이혜영 지음 / 한국방송출판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지리산 둘레길'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제주 올레길'을 걷고 난 이후였다. 제주 올레길에 환호했던 나는, 곧 새로운 걷기여행의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는 지리산 둘레길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고,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 걷기여행>이라는 이 책이 나왔을 때에는 적잖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었다. 제주 올레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가득할 지리산 둘레길을, 과연 이 책은 어떻게 펼쳐낼지 무척이나 기대되고 궁금하였더랬다. 하지만 그렇게 적지 않은 기대로 집어든 이 책은, 솔직히 말해서 조금 아쉬웠다.

일단 이 책은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살이 땅살이 보듬은 산채비빔밥 같은 길"이라는,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책표지의 수사처럼 책도 지리산길 위의 '사람살이'와 '땅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버무려낸, 꼭 '산채비빔밥' 같은 느낌이다. 이를테면 길 위를 걷는 와중에 만난, 길 위에 사시는 분들의 삶이 조명되고, 지리산의 역사적 사실들이 언급되고, 지리산을 읊었던 문학작품이 인용되며, 또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졌던 비극을 되살려 내기도 하는 식이다. 물론,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상세한 정보 역시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리산을 둘러싼, 이러한 많은 역사와 문학과 삶과 정보가 버무려지는 와중에 정작 '걷기여행의 즐거움'은 잘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매력에 조금씩 빠지려다가도 곧바로 언급되는, 만만치 않은 '무게'를 지닌 서술들에 경쾌한 발놀림은 이내 무거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지리산 둘레길을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탓인 듯도 하지만, 저자가 딛고 있는 공간을 내가 따라가기가 꽤 버거웠고, 당연히 그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머릿속에서 생경하게 흩날리기 일쑤였다. 좀 더 경쾌하고 즐거운 '걷기여행'을 기대했던 내게, 이 책은 쉬이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아픈 상처까지 불쑥 선물마냥 휙 던져주고는 내내 담담한"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소문'의 굴레에 갇힌 길까지 고민하자니 여행자는 어렵다고 뒤통수만 긁적거린다."고 말할 때에는 속으로 뜨끔했음을 밝혀 두어야겠다. 즐거운 길을 걸으며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빨치산과 민간인 집단 학살, 제주 4. 3 등)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지만,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오고가고, 기억하고, 묻다보면 언젠가 진실 또한 밝혀지겠지."라는 저자의 믿음 앞에서는, 어쩐지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그저 내 탓인 듯 미안해진다.

4. 3을 기억하지 않아도 제주여행에는 사실 지장이 없다. 굳이 상기하면서 다니더라도 제주의 목가적 풍경이 그 역사를 거짓말처럼 여기게 만든다. '잃어버린 마을' 터에 자못 무거운 걸음을 했다가도 비석 뒤편 푸른 초원에 마음을 훌렁 뺏기고 만다. 아무래도 제주는 어제의 사실과 오늘의 감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여행자를 시험에 들게 하는 섬이다. 그래도 '역사의 기억'이라는 후대의 일차적인 의무론은 진부하지만 유효한 것 같다. (p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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