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헤아려 보니 월드컵이 임박했던 5월과 월드컵이 개막했던 6월, 이 두 달 동안에는 특히 축구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던 것 같다. 사놓고 계속 쌓아두기만 했던 <축구장을 보호하라>를 마침내 읽었고, 꽤 만만치 않은 값을 치르고 <월드컵 1930-2010>을 사 보았으며, 계속해서 관심만 두고 있던 <일본인과 천황>(이 책은 사실 '축구'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도 드디어 사 보았다. 게다가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심지어 두 권을 사기까지 했으니ㅡ물론 그 이유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기보다는 들고 간 이 책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 가방에 넣은 채 홀연히 작별을 고하고 돌아 온데다, 다행히 책값이 비싸지 않았기 때문이지만ㅡ확실히 이런 자세는 월드컵을 맞이하는 축구팬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자평할 만하다(와중에 박상의 야구소설 <말이 되냐>를 읽은 것은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일단 물량으로 압도하는 형국이니 지난 두 달 간 읽은 몇 안 되는 책들 중에서 탁월했던 건 역시 축구 관련 서적으로, 정윤수의 <축구장을 보호하라>와 헤르만 악셀의 <월드컵 1930-2010>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정윤수의 책 같은 경우에는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책이 월드컵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을까 짐작했었는데, 정작 이 책은 몇몇 월드컵의 비순수성을 지적하기는 해도 대체로 여전히 계속되는 월드컵의 순수성을 예찬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이것은 기존의 내 마음마저 바꾸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월드컵을 꽤나 못마땅해 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 태도에서 벗어나, 월드컵을 마음껏 즐기되 비판의 시선을 놓지 않는 쪽으로 선회했고, 이것은 결국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의외로 월드컵이 훨씬 즐거워지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알려준 건, '월드컵은 일단 즐길 만한 세계적인 이벤트다'라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책은 2002년 월드컵을 다양한 문화적,역사적 관점으로 해석해내며 2002년 월드컵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재생해 놓고 있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풍성한 수사에 대한 약간의 강박관념과 환원주의적 오류(비록 저자가 이를 경계함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이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감히 말하건대 2002년 월드컵에 관한 책들 중에서는 세계를 둘러봐도 이보다 더 나은 책을 찾기란 어렵지 않을까 싶다.

한편, <축구장을 보호하라>가 다양한 스펙트럼과 세심히 쓴 듯한 문장으로 즐거움을 주었다면, <월드컵 1930-2010>은 흥미로운 시선과 재기 넘치는 그림으로 즐거움을 주었다. 특히 이 책의 출판사에서는 책을 사자마자 곧 책 가격이 떨어진 걸 조금 억울해 하던 내게, 알지도 못했던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박지성 사인본'으로 한 권을 더 주겠다고 연락을 해 와서 나를 기쁘게 했는데,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박지성 사인본을 받게 되는 것과 책값이 2분의 1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점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욱 마음에 드는 건지는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이건 실제로 사인본 책을 받아봐야 알겠는데, 불행히도 이후 출판사에서는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가타부타 말이 없고, 들리는 소식으로는 박지성이 한국에 들어왔다지만 그게 내가 받을 책에 사인을 해주기 위한 목적은 아닌 것 같으니, 과연 내가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출판사에서는 박지성의 사인을 이제부터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를 고민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는데, 만약 정말로 그렇다고 한다면 아무쪼록 그 일에 행운이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장원재의 <유럽축구에 길을 묻다>는 책보다도 저자가 <100분 토론>에 나온 것이 더욱 인상 깊었다. 장원재는 지난 6월 10일, "다시 월드컵! '광장'을 말하다"를 주제로 한 <100분 토론>에서 패널로 출연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어퍼컷>의 저자인 정희준이 함께 출연하면서 나는 당시 근자에 읽었던 두 책의 저자의 모습과 육성을 TV로 확인하는 셈이 되었다. 그런데 장원재는 정희준과 나란히 앉은 진중권의 반대편에 앉아서 꽤나 유감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중권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반대편에 앉은 사람은 '언제나' 악당이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그 토론에서 장원재는 악당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악당이군 하는 생각이 드는 발언을 하기도 했고, 덕분에 장원재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사라져버렸다. 물론 저자의 정치적 성향(그것도 극히 부분적인)으로 저자의 책을 예단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이후에 장원재의 신간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가 나온 걸 알았을 때 나는 간단히 그 책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실은 알라딘에서는 그 책의 저자를 '정원재'라고 잘못 표기해 놓고 있었는데, 나는 이걸 결코 신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다!). 장원재든 정원재든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이다(하지만 내가 앞으로 장원재의 책을 절대로 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는 제법 많은 축구 관련 서적의 저자다).

마지막으로, <맛의 달인>의 원작자인 카리야 테츠가 쓴 <일본인과 천황>은 솔직히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사실 이 책은 예전에 축구잡지에 소개되어 관심을 가졌었는데, 줄거리만 보자면 '축구 관련 서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더욱이 일단은 '만화책'이다.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일본 도토 대학 축구부의 스미카와 준이 전 일본 대학축구대회 결승전에서 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면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주인공도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의 역할은 주로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교 이사장의 말을 '들어' 주는 것으로, 가령 이사장이 "'교육칙어가 일본인을 속박해왔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마치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리라도 들은 듯이 깜짝 놀라서는 앵무새처럼 이사장의 말을 되풀이한다. 또한 질문은 언제나 이사장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질문만 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럴 바에야 그냥 이사장이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물론, 기실 이 책의 목적은 천황제의 해악에 대해 저자가 이사장의 입을 빌어 비판하는 것이고, 그러니 이런 방식인 건 한편으로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개성 없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스토리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만화에 재미를 기대하기란 확실히 어려운 것도 또한 당연하다. 더욱이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과 제도 등에 관련된 각주들도 대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만화책'이 맞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용의 진정성을 따지자면 이 책은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천황제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라고 썼다는 이 책은 천황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점들을 거듭 짚어주면서 최대한 독자들이 쉽게 그리고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는 게 느껴진다(그럼에도 그게 쉽지 않다고 느끼는 건 독자 탓도 있겠지만). 더욱이 기본적으로는 이 책의 대상이 당연히 일본인들, 특히 천황제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일본의 현 젊은 세대들이겠지만, 저자의 비판은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과 관련해서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준다. 가령, 사회 내에 만연한 엄격하고 기계적인 상하관계라든지, 인맥과 학연이 무시 못 할 힘으로 작용한다든지, 혹은 천황으로 대변되는 어떤 '상징'을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을 손쉽게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든지 등의 모습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만은 않거니와, 특히 '천황'을 '국가'로 대치해서 보자면 결국 그러한 시스템과 제도가 '개인'의 건강하고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을 의도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에서 이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추천사에서 김규항이 지적하듯이, "천황제의 특징은 천황을 신처럼 떠받들면서도 정작 천황이 누구인가는 상관이 없다는 데 있고", 따라서 "우리 안의 천황제"를 직시하고 경계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의문 하나는 왜 천황제가 없는 우리나라가 '천황제'의 해악을 그대로 답습하는가가 아닐까 싶은데, 이와 관련해서는 <포포투>의 한 구절을 곱씹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함께 해온 <포포투>는 이제 내게 마치 밥상의 김치와 비슷하고, 그런 이유로 <포포투>를 보았다고 굳이 언급하는 건 오늘 점심에 김치를 먹었다고 말하는 것만큼 불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포포투>를 읽고 나서도 가끔은 그 안의 몇몇 대목을 굳이 어딘가에 옮겨 적어 놓고 싶은 때가 있고, 바로 지금도 그러하다. <포포투>에 칼럼을 연재하는 사이먼 쿠퍼는 '왜 잉글랜드를 응원하나'라는 제하의 칼럼(<포포투> 6월호)에서 케냐의 작가 은구기와 티옹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그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나 또한 그의 말로 이 글을 끝내는 게 꽤나 적절할 듯하다. 물론, 그의 말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우리 안의 천황제"를 마주하는 데 있어서 티옹오의 말이 중요한 밑그림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정복이란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가치에 대해 칭송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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