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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ㅣ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엄마와 누나가 나를 붙잡고 뭔가에 대해 하소연을 할 때, 이성과 객관을 유지한 채 자못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결코 현명한 대처법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지난 경험에서 터득한 다분히 훈련된 깨달음으로, 무심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대꾸를 했다가 원망과 탄식이 뒤섞인 한소리를 듣기가 일쑤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채 마냥 넋놓고만 있어도 곤란하긴 마찬가지여서, 가령 "뭐 그런 어이없는 경우가 다 있대!"랄지 혹은 "그거 정말 웃기는 짬뽕이군!"과 같은, 상대의 말에 감정적으로 완벽히 동조하는 모습을 입으로나마 적극적으로 웅변하지 않는 한, 역시 한소리를 들을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한소리'란 이 책의 제목과 사뭇 유사해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하긴 해도 핵심은 언제나 같다. "인간수컷은 필요없어!" 아, 필요 없어서 슬픈 짐승, 그 이름은 인간수컷이어라!
그런데 '인간수컷'이라는 생태계 내의 한 종으로서 내가 그 무용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얄밉게도 종종 그 존재 자체만으로 매력을 인정받는 종이 있다. 이견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으나 바로 고양이가 그렇다. 온몸으로 주인에 대해 충성과 애정을 표현하는 개와는 달리, 그 도도한 몸짓과 시크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사랑받는 고양이는 실로 얼마나 축복받은 종인지. 하느님이 있다면 찾아가 한바탕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의 신빙성 있는 가설에 따르면 고양이는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녀의 명쾌하고 유쾌한 분석에 따르면, 고양이는 페리네 혹성인들이 지구를 정복할 목적으로 지구인들이 매료될 만한 종으로 변신한 것. 과연 인간이 고양이의 매력에 굴복한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이 대목에서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고마운 마음을 표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거나, 덕분에 아직 지구가 정복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인간과 개와 고양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고양이가 주연인 건,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버려진 새끼 고양이 무리와 도리의 조그마한 행동 하나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들을 만나자마자 대책 없이 꼬리를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그러다가 낯선 존재를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얻어맞아 피를 보고도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개, 겐도 역시나 주연이라 하기엔 약하다. 사랑과 질투와 반항과 우정에서부터 심지어 가출과 공주병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감정상태와 행동양태를 표출하며 요네하라 마리의 집에 이런 저런 에피소드들을 선사하는 고양이야말로 이 책의 주연으로 손색이 없고, 그렇듯 손쉽게 집 하나를 점령한 자타공인 서열 1위 고양이 도리는 아마도 자신을 파견한 페리네 혹성에 이렇게 교신을 보냈을 게 틀림없다. "고양이 제176524839호, 임무완료!" 그리고, 어쩌면 이렇게 덧붙였을지도. "추신. 멍청한 개 하나 포함"
하지만 비록 이 책에서 고양이에게 주연 자리를 기꺼이 내어 주었을지라도,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의 '행복함'은 무엇보다도 그 모습을 항시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인간'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함'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콘크리트 바닥 위의 개집에 언제나 개를 묶어두기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고, 유기견을 손쉽게 살 처분하는 일본의 유기견 관리 시스템에 날 선 비판을 하기도 하며, 버려진 동물들의 처지에 진심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그러다가는 또 재미있는 발상을 떠올리는 등의 재기 넘치는 유머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모든 모습들의 기저에는 언제나 따뜻함이 넘치도록 느껴진다. 특히 냉소와는 거리가 먼 요네하라 마리 특유의 유머 감각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일찍이 이처럼 따뜻한 유머가 있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요네하라 마리를 두고 시인 황인숙은 "의롭고 명민하고 온화하고, 무엇보다도 그 싱싱한 유머감각!"이라고 평하는데, 나는 시인의 언어가 표현하는 그 적확함을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따뜻함은 전염되는 까닭인지, 아니면 요네하라 마리의 시선이 따뜻함만을 바라보는 까닭인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서 요네하라 마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따뜻하다. '잡종'이라는 말에 정색하며 '비순종'이라는 말로 정정해주는 수의사가 있고(그는 밥먹듯이 동물병원의 상호를 바꾸는데,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게 사기나 의료사고와 같은 어두운 사건과 연루되어서는 아니다), 요네하라 마리의 고양이들에게서 죽은 자신의 고양이들을 떠올리고는 펑펑 우는 중년의 사내가 있고(다만, 그의 며느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악독한데, 이건 비단 지구 정복을 꿈꾸는 고양이들의 시선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시선에서도 그러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아픈 고양이들을 위해서 함께 문을 연 동물병원을 찾아나서주는 이웃이 있으며, 불쑥 찾아 온 개에게 기꺼이 먹을 것을 챙겨주며 그 개의 안위를 염려해 주는 친구가 있다. 그리고 동물에 대한, 나아가 생명에 대한 이들의 따뜻함은, 미국인과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고양이의 잠든 모습을 보며 "행복해 보여"라고 일제히 말한 것을 굳이 통역해 줄 필요가 없었다고 요네하라 마리가 적고 있듯, 독자에게도 오롯이 전달되는 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는 아무 어려움 없이 '따뜻함'과 '행복함'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던 게 그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요네하라 마리가 처음에 그러했던 것처럼, 반려동물과의 필연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 새로운 동물을 입양하는 일은 이제 의식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두려움이 많이 희석된 것 같다. 동물들과 함께 하는 삶에서 겪는 슬픔과 고달픔과 어떤 소동들의 난처함은 이 책에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조차도 결국 요네하라 마리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행복한 일상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느끼는 덕분일 테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개와는 함께 살아봤으니 이제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는데,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인간수컷의 위치는 더욱 위험해지겠지만 그 이유가 고양이 때문이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고양이에게 정복되어 모두가 고양이와 함께 사는 지구란,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행복한 행성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 책 속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아무튼 뭐 그런 이유로, 나는 고양이의 지구정복 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빠른 페리네 혹성인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