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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나를 키운 8할이 축구였다면, 나머지 2할 중 1할은 필히 무협지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수많은 시간들, 특히 고등학교 시절의 답답하고 억압된 시간 속에서 무협지는 구원이자 해방이었고, 무엇보다도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주옥같은 가르침은 언제나 남의 나라 언어나 복잡한 공식 속이 아니라, 오직 무협지 속에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하랴. 가령 "언제나 3푼은 감추어 두어라."라거나 "안심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라거나, 혹은 "칼에는 흑도 백도 없다."라는 가르침은 실로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 당시에 배웠던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었더라면, 아마도 내가 지금쯤 조그만 방파의 수장이 되는 일쯤은 우습지도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그렇듯 당시에 무협지의 세계를 신봉했던,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서로 이곳저곳의 책방에서 무협지를 빌려와서 돌려 읽는, 일종의 '무협 계'를 형성한 건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빌려온 무협지를 대체로 작가의 이름으로 통칭했고, 그것으로 그날 하루의 운이 결정되곤 했다. 이를테면, 거의 빨간책을 방불케 하는 '와룡강'을 누군가 빌려오면 잠깐의 자극이야 있겠지만 대체로 식상한 하루를 보내야 했고, '금강'이라면 한편 웅장하지만 또 한편으로 전형적인 하루를 보내야 함을 의미했다. 그런가 하면 '설봉'이나 '용대운'을 누군가 빌려올 참이면 그날은 무협의 멋을 제대로 느낄 하루가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실험성이 두드러진 '좌백'은 꽤나 독특한 하루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제부터 말하려는 '진산'이라면, 그날의 운은 사뭇 유려하면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무협작가 '진산'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는 먼저 진산이 무협작가로서는 굉장히 드물게도 여성 작가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진산의 글은 무엇보다도 '유려'하고 '서정'적이다. 진산의 무협 속에는 여타의 무협에서 한결같이 되풀이되곤 했던 '협(俠)'의 이미지가 옅은 대신 '정(情)'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고, 그 무대는 '도산검림(刀山劍林)'이라기보다는 오히려ㅡ수록된 단편의 제목이기도 한ㅡ'청산녹수(靑山綠水)'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진산의 무협은, 칼과 검이 난무하는 호쾌한 영웅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산처럼 혹은 물처럼, 그렇듯 변함없거나 혹은 변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서정시인 셈이다.
아마도 유일한 무협 단편집일 거라는 이 책에서 '서정시'와 같은 진산의 스타일은 꽤나 맞춤한 듯 어울린다. 물론 단편의 태생적 숙명상, 기인이사들과 뭇 군웅들은 차치하고라도 주인공의 신세내력만 읊는 데에도 상당한 분량이 필요한, 장편이 지닌 광활한 강호의 호쾌한 매력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대신 개인과 가족 그리고 동료 혹은 연인 사이의 내용으로 범위를 좁히고 있는 각 단편은 소박하지만 응축된 테두리 안에서 정갈하고 단정한 이야기들의 매력을 뽐낸다. 그러면서도 가족애와 사랑 그리고 복수와 무인의 자기완성 등,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십분 녹여내는 솜씨는, 조금 과장하자면 가히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
더욱이 각 단편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각각의 소재를 변주하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가령, 역사적 소재를 가져와 노랫말과 이야기를 병치시킨다거나('청산녹수'), 한 단체 속 동료를 각기 주인공으로 삼는 연작을 쓴다거나('고기만두' 외 3편), 또는 2인칭 시점을 도입하는('잠자는 꽃') 등, 진산은 소재의 소소함과 형식의 다양함으로 이 단편집을 풍성한 매력으로 채워 넣고 있다. 뿐만 아니라, 책 뒤에 수록된 '작품해설'에서 진산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작품과 이 단편집의 의의에 대해 해설한 것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무엇보다도 한 문장을 떠올린 후 그 문장의 마침표에서 다음 문장을 이어나가는 식으로 글을 쓴다는 진산의 글은 실로 유려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저 문장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꽤나 오랜만에 강호로 돌아와 '진산'의 무협을 읽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유감스럽게도 여기저기에 발표했던 단편무협을 모은 이 책이 적어도 당분간은 진산의 마지막 무협이 될 것이라고 한다. 진산은 작품해설에서 수록된 단편 '날아가는 칼'의 마지막 문장, "그 후, 어떤 칼도 날지 않는다."가 작별 인사가 되었다고 전하며, 이러한 진산의 결심은 이 책의 제목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진산 무협의 팬들은, 역시 책 속 단편 '고기만두'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이렇게 화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 내가 등을 보이면서 떠날 수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소원인 모양이다. 그 불가능이 이렇게 기쁠 수가." 단편 '청산녹수'의 '희'처럼,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려는 '진산'이 그 불가능한 소원의 기쁨을 깨달아 언젠가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어느날 문득 강호를 추억하고 찾아오는 이들을 산처럼 굳건하게 맞아주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