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 반대로 그들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면 그 메시지가 인류에게 주는 효과는 참으로 놀랄 만할 것일 게다. 그들의 메시지는 과학과 기술, 미술과 음악, 정치와 윤리 그리고 철학과 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어 인간의 통찰력을 크게 키워 줄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는 우리를 우리의 고질적 편협성에서 근본적으로 탈피하게 할 수 있는 결정적 정보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아, 그 이외에도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보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 P621

622 그러나 정말로 어려운 문제는 해독이 아니라 외계 생명을 탐색하는 연구에 예산을 배정해 달라고 미국 의회나 (구)소련의 중앙 위원회를 설득하는 일이다. 문명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과학자들이 비과학자들을 설득하여 외계 생명의 탐색 사업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얻어 내기가 불가능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용 가능한 모든 자원을 내부에만 투자하고, 통념이 사회를 철저하게 지배하여 별 세계의 탐색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할 수도 없는 사회이다. 다른 하나는 외계 문명과 접촉해 보고 싶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으며, 또 시민 전체가 위대한 이 꿈을 공유하여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위한 대규모의 연구가 실행될 수 있는 사회이다. - P622

622-3 외계 문명의 탐색이야말로 실패해도 성공하는 사업이다. 인류사에서 절대 밑지지 않는 사업은 흔하지 않다. 우리가 외계로부터 오는 신호를 잡기 위해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별들을 모두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조사했지만 아무런 신호도 검출할 수 없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은하에서 문명의 발생이란 것이 참으로 드문 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주에서 우리의 존재에 대하여 적어도 하나의 확고부동한 척도가 마련되는 셈이다. 따라서 지구 생명의 고귀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 한 명 한 명이 개체로서 반드시 존중돼야 할 존재가 된다.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외계 문명이 발견된다면 인류사와 지구 행성의 의미는 그 근본에서부터 변혁을 겪게 될 것이다. - P622

629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고 노예 제도의 야만성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별 세계의 비밀을 캔다는 일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까?
- 몽테뉴에 따르면 아낙시만드로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던진 힐문이라고 한다. - P629

629 지구 도처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끝없는 바다를 정복한다고 법석을 떨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우리가 그런 짓을 하면 할수록 지구의 모습은 바깥 세상의 천체들에 비해서 더욱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제왕과 왕자 들은 반성할지어다. 그대들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그래서 어쩌면 불쌍해 보이기조차 하는 보잘것없는 한구석의 주인이 되고자 그렇게도 많은 인명을 희생시켜야만 하는가?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천상계의 발견』, 1690년경 - P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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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미국 정부는 ‘정부를 만들 줄 알거나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통치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통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쪽에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무용지물로 판명 난 아이디어들은 다른 쪽에서 계속 폐기되도록 허락받은 시스템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가 발명해 낸 ‘미국 정부‘는 바로 그런 시스템이다. 미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의심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시절에도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가능성과 잠재력,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린 태도의 가치를 존중할 만큼 과학은 이미 충분히 발전해 있었다. 우리의 과학이 불확실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언젠가 다른 방법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가능성을 열어두면 언젠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의심과 토론은 진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 정부는 매우 혁신적이고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시스템이다. 모든 게 썩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상원의원들은 그들의 주에 댐을 건설하겠다며 환심성 공약으로 표를 사고, 토론은 감정적인 싸움판이 되기 일쑤이며, 전방위적인 로비는 소수 의견이 받아들여질 기회를 앗아가지만 말이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긴 해도, 나는 미국 정부가 (영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정부들 중 가장 만족스러우며 가장 현대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지 좋은 정부라는 생각은 안들지만.
소련은 퇴보하는 국가다. 아,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앞서 있다. 지난 강연에서 과학과 기술의 차이점에 대해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억압하는 시스템 하에서도 기술적 진보는 방해받지 않는 것 같다. 히틀러의 시대에도 새로운 과학은 발전하지 못했지만 로켓은 만들어졌으며, 소련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과학의 응용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은 자유가 없어도 진행될 수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소련을 ‘퇴보하는 국가‘ 라고 단언한 이유는 그들이 정부의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앵글로–색슨의 위대한 발견이다. 물론 그들이 그걸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기나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쟁취했다. 소련에선 사상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얘기를 주고받던데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만, 일정한 형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반스탈린주의를 논해 보면 어떨까? 스탈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목조목 따져 보면 어떨까? 소련 정부가 직면하게 될 위험이 어떤 것들이 될지 얘기해 볼까? 소련 내부에서 현재 비판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의 모순과 현재 그들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행태들 사이에 유사점은 없는지 지적해 볼까? 음, 그래, 그래, 이제 됐어 됐어・・・.
자, 나도 잠시 흥분했었다. 지금 보았듯이 이건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뤄야지, 이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내가 굉장히 합리적이고, 과학적 논증을 하듯 ‘선입견 없는 태도‘로 이 문제를 대하기 전까지 여러분은 내 말에 별 확신을 가지지 못할 테니까. - P72

94 잘 알든 모르든 대답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대답을 한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엔 그 반대이기가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답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정치적인 약속은 절대로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내뱉어진 공약들이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P94

94-5 그래서 결국 아무도 선거 공약을 믿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치를 대체로 얕보게 되었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제일 첫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엄밀한 분석의 결과는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대중이 답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으려는 대신,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P94

101-2 소위 진리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과학 분야에서 이미 많이 적용되어 왔으며 아마 다른 분야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것이 정말로 진리라면 계속된 관찰을 통해 효율을 증가시키면 그 효과가 관찰 결과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방법이다. 점점 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런데 유리에 수증기가 서려 잘 볼 수 없다면, 그 유리를 닦고 더 분명하게 관찰하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지 여전히 뿌옇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 P101

104-5 심적 텔레파시나 비슷한 종류의 현상들은 19세기 신비주의 심령론과 유사한 속임수에 기원을 두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편견은 어떤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결국엔 그 편견을 깨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여기에 알맞은 재미있는 예는 바로 최면 현상이다. 최면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될 때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략) 이렇게 시작된 최면 현상은 사람들이 많은 실험을 수행할 만큼 충분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운 좋게도 최면 현상은 수많은 편견을 이겨 내고 그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시작이 좀 이상하더라도, 충분한 연구가 진행된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또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묘사되는 효과가 일종의 영원성 또는 불변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현상이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경우라면 여러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의 같은 어떤 측면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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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60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지역 국가에 미친 영향
민주주의 찬미자들은 종종 민주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예 제도에 대한 태도로 보아 이 고매한 주장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것도 증명된 차에, 명백한 해악인 전쟁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한층 더 나쁘게 만드는 영향을 미쳤는가? 그 대답은 민주주의가 전쟁이라는 제도에 부닥치기 전에 지역 국가라는 제도에 맞닥뜨린 사실로 알 수 있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새로운 추진력이 지역 국가라는 낡은 기구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 쌍둥이 죄악을 만들어 냈다. 민주주의의 고매한 정신이 이질적인 매체를 통과하여 이처럼 거칠고 천한 형태로 변해 버렸기에 민주주의는 전쟁을 방지하는 대신 오히려 부채질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도 서유럽 사회는 18세기에 내셔널리즘이 출현하기 전보다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예외는 별도로 하고 당시 서유럽 세계의 지역 국가는 국민 전체의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왕가의 사유 재산이었다. 왕가 사이의 전쟁과 혼인은 재산의 일부를 하나의 가문으로부터 다른 가문으로 이양하는 방법이었으며, 이 두 가지 방법 중 분명히 왕가 사이의 혼인이 즐겨 쓰였다.
합스부르크가의 외교 정책을 칭찬한 유명한 말ㅡ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하라ㅡ이 탄생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8세기 전반의 주요 전쟁의 세 가지 명칭 자체ㅡ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ㅡ는 혼인의 협정이 뒤얽혀서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결혼 외교에는 분명히 야비하고 치사한 점이 있었다. 왕가 사이의 협약에 의해 영토와 주민을 마치 토지와 가축을 함께 양도하듯이 한 사람의 소유자로부터 다른 소유자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의 감각으로 보면 실로 혐오할 일이다. 그러나 18세기적 방식에는 그것을 합리화할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애국심에서 빛나는 의미를 빼앗았으나 그와 함께 생명을 위협하는 독침도 뽑아 버렸다.
스턴의 「감상 여행」의 잘 알려진 구절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가 7년 전쟁을 하고 있는 중에 저자가 전쟁 중임을 깜빡 잊고 프랑스로 가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경찰과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은 후 초대면의 프랑스 귀족의 알선으로 스턴은 그 이상 조금도 불쾌한 꼴을 당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후 아미앵 조약이 결렬됐을 때 나폴레옹은 당시 마침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18세에서 60세까지의 영국인을 모조리 억류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코르시카 인의 야만성의 실례가 되었고, 뒤에 웰링턴이 말한 "그는 신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이 되었다. 또한 실제로 나폴레옹도 자기가 취한 조치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아무리 인도적이고 관대한 정부에서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로서 취하는 조치에 불과하다. 이제 전쟁은 ‘총력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지역 국가들이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이라는 것은 전투원이 육·해군이라는 이름의 선택된 ‘장기 말‘뿐 아니라, 당사국의 국민 전체가 전투원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전쟁이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독립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를 얻은 영국계 미국인 개척자들이 모국 영국 편을 든 자들에 대해 취한 조치가 아마도 그 시초라고 생각된다.
이들 ‘영국 충성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남자·여자·아이들 할 것 없이 그들의 집에서 추방되었다. 그들이 받은 이 조치는 20년 이전에 정복된 프랑스계 캐나다 인에 대해 영국이 취한 조치와 대단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계 캐나다 인은 그들의 집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법제도와 종교 조직을 보전할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 ‘전체주의‘의 최초의 예는 의미 깊은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를 얻은 미국 정착자들이야말로 우리 서유럽 사회 최초의 민주화된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해악이 된 경제적 내셔널리즘 역시 같은 지역 국가의 비좁은 틀 속에서 왜곡된 산업주의가 작용하여 탄생한 것이다.
물론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국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적 야심과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8세기의 ‘상업 중심주의(중상주의)‘ 가운데 경제적 내셔널리즘의 전형적인 실현을 볼 수 있고, 또한 스페인령을 통한 미국 식민지의 노예 매매 독점권을 영국에게 내어준 유트레히트 조약의 저 유명한 조항이 가리키듯, 이 시장과 독점권의 획득이라는 것이 18세기의 전쟁 목적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의 경제적 투쟁이 영향을 미친 대상은 소수 계급과 한정된 업자뿐이었다. 나라마다, 아니 마을마다 생활 필수품의 거의 전부를 생산하고 있던 농업을 주로 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이 행한 시장 획득 전쟁은 대륙의 영토 획득 전쟁을 ‘국왕들의 유희‘라고 불러 무방했듯이 ‘상인들의 유희‘로 불러도 무방할 만한 것이었다.
규모가 작고, 긴장이 적었던 이 경제적 평형의 일반적 상태를 심히 교란시킨 것은 산업주의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작용이 본질적으로 전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민주주의의 참된 본질이 프랑스 혁명의 기만적인 선언대로 우애의 정신이라면, 산업주의가 그 잠재 세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건은 전세계적인 협력이다.
산업주의가 요구하는 사회 체제는 18세기의 새로운 기술 개척자들이 외친 저 유명한 표어 "자유롭게 만들게 하라, 자유롭게 통과시켜라"ㅡ즉 제조의 자유와 교환의 자유ㅡ는 말 가운데 정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세계가 작은 경제 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산업주의는 150년 전에 다같이 세계적 통일의 방향으로 향하던 두 가지 방식으로 세계의 경제 구조를 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산업주의는 경제 단위의 수를 적게 나눔으로써 규모를 크게 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장벽을 낮게 하도록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역사를 바라보면 지난 세기의 60년대와 70년대쯤에 하나의 전환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즈음까지의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아 경제 단위의 수를 감소시키고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그 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는 다같이 정책을 역전시켜 반대 방향으로 실행시켰다.
우선 첫째로 경제 단위의 크기를 고찰하면, 18세기 말에는 영국이 서유럽 세계 최대의 자유 교역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해서 산업혁명이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영국에 처음으로 일어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788년에 북아메리카의 옛 영국령 식민지들이 필라델피아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각 주 간의 모든 통상상의 장벽을 완전히 철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자연히 팽창을 거듭하였고 세계 최대 자유 교역지역이 된다. 따라서 그 직접적 결과로서 가장 강대한 공업국이 될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수 년 뒤에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그때까지 프랑스의 경제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던 지방 간의 관세 경계가 전부 철폐되었다. 19세기의 제 2·4분기에는 독일이 ‘관세 동맹‘의 형태로 경제적 통일을 실현하여 그것이 정치적 통일의 선구가 되었다. 제 3·4분기에는 이탈리아가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고 그와 동시에 경제적 통일을 획득했다.
다음으로 계획의 나머지 절반, 즉 국제 간의 교역을 방해하고 있는 관세와 그 밖의 지방적인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 쪽을 보면, 아담 스미스의 제자라고 자처한 피트가 자유 무역 촉진의 운동을 개시하였고, 그것이 19세기 중엽에 필·코브던·글래드스턴 등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미합중국도 고관세 정책을 시험해 본 뒤 1832년에서 1860년에 걸쳐 착실하게 자유 무역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루이 필립과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프랑스, 비스마르크 이전의 독일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 후 형세가 일변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선 다수의 소국이 통일되어 하나의 민주주의에 의한 내셔널리즘이 되었고, 이 즈음부터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따위의 다민족 국가를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디 하나의 자유 교역권이었던 도나우 왕국이 각각 경제적 아우타르키(자급 자족)를 지향하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몇 개의 후계 국가로 분열해 버린 동시에 다같이 영토를 잘려서 작아진 독일과 러시아의 사이에 새로운 경제적 구획이 끼어들게 되었다.
한편 약 30년 전부터 자유 무역으로의 음직임은 후계 국가로 한 나라 한 나라 분열하는 식으로 역행을 다시 시작하여, 1931년에는 마침내 ‘상업중심주의(중상주의)‘의 역류가 영국 자체에까지 미쳤다.
이 자유 무역 정책 포기의 원인은 쉽사리 규명할 수가 있다. 자유 무역은 ‘세계의 공장‘이었던 당시의 영국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1832~1860년에 걸쳐 합중국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주의 면화수출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였다. 같은 시기의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각국이 차례차례로 산업화되어감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이웃 모든 나라와 격렬한 산업 경쟁을 하는 것이 각 지역 국가 이익에 맞는 것 같았다. 지역 국가가 각각 주권을 쥐고 있는 체제 아래서 과연 누가 그것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코브던과 그 신봉자들은 대단한 오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국민과 여러 국가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산업주의의 젊은 에너지를 투입해 맹목적으로 형성해 가는 새로운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경제 관계의 거미줄에 의해 단일 사회로 끌려들어올 것을 기대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자유 무역 운동을 단순히 총명한 이기주의가 낳은 걸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배격하는 것은 코브던 일파에게는 공평하지 못한 견해일 것이다.
그 운동은 또한 하나의 도덕적 관념의 표현이자 건설적인 국제 정책의 표현이었다. 가장 존경해야 할 그 운동의 대표자들은 영국을 세계 시장의 지배자로 만든다는 목적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이썼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적 세계 질서가 번영할 수 있는 그러한 정치적 세계 질서가 차차 발전할 수 있도록 촉진할 것을 바랐다. 전세계적인 물질과 무의 교환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행해지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증대함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생활 수준을 한 단계 높여갈 것을 바랐던 것이다.
코브던의 오산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힘이 지역 국가 상호간의 경쟁을 촉진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데에 있다. 그는 이 두 거대한 시스템이, 18세기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도 가만히 얌전하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재 부지런히 세계적인 산업주의 거미줄을 치고 있는 인간이 두 거대한 시스템을 완전히 거미줄로 묶어 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우애를 대표하고 산업주의가 협력을 대표하는 본래의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낳을 효과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은 속박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비로소 이룰 수 있는 통일과 평화의 기대이다.
그는 이 같은 2개의 힘이 그 새로운 ‘증기압‘을 지역 국가라고 하는 낡은 기계 속에 막무가내로 침입시켜 분열과 세계적 무정부 상태를 야기시킬 가능성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대변자가 가르치는 우애의 복음이 근대 최초의 커다란 민족주의 전쟁을 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이 이런 종류의 전쟁이 처음일 뿐 아니라 마지막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18세기라는 한정된 상업 중심주의적 시기에 거대한 두 시스템의 지배가 당시 국제 통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던 비교적 중요성이 적은 사치품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고 하면, 산업혁명이 국제 통상을 사치품의 교환에서 생활 필수품의 교환으로 바꾸는 시대에는 한층 더 민주화된 여러 국민이 경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철저하게 싸우게 될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요컨대 맨체스터 학파(자유 방임주의와 자유 무역 주장)는 인간의 본성을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세계 질서라고 해도 단순히 경제적 기반 위에만 구축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참된 이상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이상주의의 궁극의 원천인 그레고리우스 대교황과 그 밖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창시자들은 결코 그러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초현세적인 목적에 전심을 바친 이러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나의 세계 질서를 건설하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현세적인 목적은 난파한 사회(헬라스 사회)의 살아남은 생명을 살리자는 좀더 소극적인 물적 양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무리들이 성가시고 짐스러운 필요물로서 세운 경제 구조는 분명히 임시 방편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구조를 건설함에 있어 그들은 경제라는 모래 위가 아니라, 종교라는 바위 위에 세우려고 힘썼다. 그래서 그들이 힘쓴 덕으로 서유럽 사회의 구조는 견고한 종교의 기초 위에 안정을 찾았고, 1400년도 못 되는 동안에 처음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대수롭잖게 발족한 경제 사회 구조가 세계의 곳곳에 퍼진 오늘날의 대사회로 성장한 것이다.
만약 그레고리우스의 자그마한 경제적 건물에 견고한 종교적 기초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건설할 임무를 지고 있는 훨씬 거대한 세계 질서라는 건물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이라는 안정감 없는 기초 위에서는 도저히 안전하게 설 가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P355

361-2 산업주의가 사유 재산제에 준 영향
사유 재산제란 개개의 가족이나 세대 단위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회에 설립되는 경향이 있는 제도로서, 그런 사회에서는 아마도 그런 사유 제산제가 부의 분배를 지배하는 가장 적합한 제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활동에서 현실적인 단위는 이미 단일한 가족이나 단일한 마을, 단일한 민족 국가도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인류‘ 전체인 것이다. 산업주의가 출현한 이래 현대의 서유럽 사회 경제는 사실상 가족 단위를 초월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족 단위의 사유 재산 제도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 오랜 가족 단위의 제도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산업주의는 사유 재산제에 강대한 추진력을 주게 되어 재산가의 사회적 세력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그 사회적 책임을 감소시켰다. 그 결과, 산업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이익을 가져왔던 사유 재산 제도가 여러 가지 점에서 노예 제도에 이어 또 다시 사회적 해악의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오랜 사유 재산 제도를 새로운 산업주의의 힘과 조화되도록 조정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은 국가의 힘으로 사유 재산을 계획적·합리적으로 또한 공정하게 관리해서 재분배하는 것을 통해 산업주의가 불가피하게 야기하는 사유 재산의 편재를 방지하는 것이다. 기간 산업을 관리함으로써, 국가는 그런 사유 재산의 편중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활에 지나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억제하는 한편 부자에 대한 높은 과세로 경비가 조달되는 각종 사회 산업을 벌임으로써 빈곤의 비참한 결과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 방법은 국가를 전쟁 만드는 기계ㅡ이제까지 그것이 국가의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이었다ㅡ에서 사회 복지를 증진시키는 기관으로 바꾼다는 부수적인 사회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만일 이 평화적인 정책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대신 혁명적인 방법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공산주의에 의해 사유 재산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확실한 일이다. 이것이 조정에 실패하는 경우 감수해야만 할 유일하고 실제적인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산업주의의 힘에 의한 사유 재산의 편재는 사회 사업과 고율 과세에 의해서 완화되지 않는 한 참을 수 없는 이상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실험이 보이고 있듯이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요법은 병 자체에 그치지 않고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될 염려가 있다. 사유 재산제는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사회적 유산 가운데 가장 좋은 제도 중 하나이다. 이를 함부로 폐지하게 되면 우리 서유럽 사회의 사회적 전통에 불행한 단절이 생기게 되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 - P361

362-5 민주주의가 교육에 준 영향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실현된 최대의 사회적 변화 중 하나는 교육의 보급이었다. 선진 국가에서는 무상의 국민 초등의무교육제도가 채택되어 교육은 모든 아동의 기본 권리로 되었다. 이것은 교육이 소수의 특권 계급에 독점되어 있었던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교육의 역할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이 새로운 교육 제도는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명예 지위를 획득하기를 염원하는 모든 국가에게 있어 주요한 사회적 이상의 하나였다.
국민 교육은 최초에 창시되었을 때 당시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정의와 개화의 승리로서 환영되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행복과 안녕의 새시대를 초래하는 것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러한 기대는 행복한 이상의 시대에 이르는 큰길 위에 몇 개의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도 그 밖의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견하지 못했던 요소가 가장 중대한 것이 되었다.
첫 번째 장애는, 전통적인 문화적 배경에서 따로 떼어놓는다는 희생을 치르면서 교육을 ‘대중화‘하는 데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교육 내용의 빈약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선한 의도라 하여도 빵과 물고기의 기적(<마태> 15:32~39)을 행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량 생산하는 지적 양식에는 좋은 맛이나 영양이 들어 있지 않다. 두 번째 장애는 교육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짐과 동시에, 그 성과가 자칫하면 공리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육이 사회적 특권으로서의 권리를 이어받았지만, 그 권리가 한정된 사회 체제하에서는, 교육이란 돼지에게 던져 준 진주(<마태> 7:6)든지, 아니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구하는 고가의 진주(<마태> 13:46) 중 어느 하나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교육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세속적인 야망 또는 경박한 오락의 도구는 아니다. 교육을 대중오락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따라서 또 그런 오락을 제공하는 기업가가 이윤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이 생긴 것은 의무 초등교육이 시작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가의 새로운 이윤추구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세 번째 최대 장애가 생기게 되었다. 보통 교육이라는 빵이 물 위에 던져(<전도서> 11:1)지자마자 바다 속으로부터 상어 떼가 떠올라와서 교육자의 눈 앞에서 아이들의 빵을 빼앗아 먹어 버린다. 초등보통교육제도는 대체로 1870년의 포스터법에 의ㅡㄴ해서 완성되었지만, 그로부터 약 20년 뒤ㅡ즉 초등교육이 시작된 초기의 어린 학생들이 충분한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ㅡ박애주의적 교육자의 사랑의 노고를 잘 이용한 기업가 신문왕(新問王)은 훌륭한 이익을 취하였고, 그런 사실을 재빨리 간취한 무책임한 인간은 뒤이어 천재적 수완으로 황색 신문을 발명하였다.
민주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 우려할 만한 대중적 반응이 현대의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국민국가의 지배자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출판왕이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에게 쓸데없는 오락을 제공함으로써 몇백만의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면, 착실한 정치가 역시 이러한 언론 경제의 대중화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설사 돈은 벌리지 않는다고 해도 권력을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신문왕 위에 군림하면서 강하고 저속한 개인적 오락 대신, 강하고 저속한 국가적 선전 조직을 만들어 냈다. 영국과 미국의 자유 방임 체제 하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해 발명된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이 집단적으로 노예화되었고, 정교하고 세밀한 기계를 국가 지배자가 그대로 접수해서 이들 지적인 기구를 영화나 라디오로 보강하여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노스클리프를 뒤이어 히틀러ㅡ이 방면에 첫 인물은 아니다ㅡ가 나타났다. 이와 같이 민주적 교육이 채용된 나라에서의 국민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든지 정부 당국에 의해 조종되는 지적인 전제 정치 체제하에 놓이는 위험에 부딪쳤다. 국민의 정신을 구출하려 한다면, 대중 교육의 수준을 높여 피교육자가 적어도 영리주의나 선전의 저급한 형태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방법은 못 된다. 다행하게도 오늘날의 서유럽 사회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개의 이해를 초월한 유력한 교육 기관이 존재하는 바, 영국의 노동자협회라든지, 영국방송협회(BBC) 등이 그것이다. - P362

369-70 공의회 운동은 봉건 시대에 이미 지방 자치로 중세 국왕들의 행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이 입증된 의회 제도를 본따서 교회의회 제도를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 설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임하는 교황이 권력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는 건설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공의회 운동이 무르익자 교황의 태도는 완전히 굳어졌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교황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성공했다. 즉, 공의회 운동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렇게 조정의 마지막 기회를 물리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전통적 유산인 세계주의와 새로운 지역주의적 경향 간의 심한 내부 불화로 분열되는 운명에 몰아넣었다.
그 결과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혁명과 사회악이 되풀이되었다. 전자(혁명)의 예로는, 교회가 몇몇의 적대적인 교회로 분열되어 서로 상대방편을 반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헐뜯으며 전쟁과 박해를 계속 일으킨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후자(사회악)의 예로서는, 교황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신성한 권리‘를 세속적 군주가 중간에서 빼앗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신성한 권리가 지금도 여전히 주권국민국가의 이교적인 숭배라고 하는 무서운 형태로 서유럽 세계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오려 한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으로서, 존슨(영국의 문인) 박사가 경향을 달리한 표현으로 ‘악당들의 마지막 은신처‘라고 부르고, 캐벌(영국의 간호사)이 좀 더 그 본질을 들추어내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 애국심이 서유럽 세계의 종교로서, 거의 그리스도교를 대신해 들어앉아 있다. 어쨌든, 지역주의가 서유럽 그리스도교회에 가한 압력의 결과 생긴 애국주의라는 이 괴물만큼,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ㅡ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역사적 고등 종교의 가르침과는 확실히 모순 되는 점ㅡ을 생각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 P369

374-5 문명이 분업에 끼친 영향(일부)
미개 사회에 분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대장간이나 음영 시인, 승려, 주술사 등의 전문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문명의 힘이 분업에 작용하면, 일반적으로 분화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가, 분업에 의한 사회적 이익이 오히려 감소되기 시작할 뿐 아니라 반대로, 반사회적인 작용을 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창조적 소수자와 비창조적 다수자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생활에서 나타난다. 창조자들끼리는 비밀주의에 빠지게 되고, 일반 대중은 불균형에 빠지게 된다.
비밀주의라는 것은 창조적 개인의 생애에 나타나는 실패의 징조로서, 예의 은퇴와 복귀의 리듬적 운동이 전반 부분만 강조되어, 전체 과정을 복귀까지 완료하는 데 실패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리스 인은 이런 형태로 실패한 인간을, ‘이디오테스‘라 부르며 비난했다. 이디오테스라는 것은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어 용법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그 재능을 공공의 복지에 유용하게 쓰지 않고, 자기 혼자만 만족하는 행동을 하는 사회적 죄과를 저지른 인간을 가리켰다. 그런 행동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어떤 눈으로 보였는지를, 오늘날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이디움트‘(그리스 어에서 유래된 단어)가 백치를 의미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대강의 짐작은 간다. 그러나 현대 서유럽 사회의 참된 ‘이디오타이‘(이디오테스의 복수형)는 정신박약자 수용 시설에서 볼 수 없다. 그들 가운데 하나의 집단은 특수화되고 타락해서 ‘호모 이코노믹스(경제인)‘가 된 ‘호모 사피엔스‘로서 디킨스가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상이다. 그리고 그래드그라인드의 상대를 제공한다. 또 다른 창조적 개인은 자신은 그것과는 반대쪽 끝에 있으며 ‘빛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같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친구들로서, 자기들의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아니꼬운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는 지적 예술적 인텔리 즉 길버트가 풍자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번손의 무리들이 그것이다. 디킨스와 길버트의 연대의 차이는 아마도 전자의 집단이 빅토리아조 초기에 영국에 눈에 띄게 나타난 존재들이고 후자의 집단은 빅토리아 왕조 후기에 더 드러난 자들인 것으로 알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북극과 남극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르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북극과 남극은 사실상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후적으로 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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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2 외계인과 외계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아무리 복잡한 문양이나 보잘것없는 징조일지라도 그들이 남겼다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이 바람을 주체하기 힘들다. 이 바람 안에는 인간이 과거부터 품어 왔던 소박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 P582

590 과연 성간 공간에도 ‘로제타석‘이 있을까? 우리는 성간 로제타석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다른 문명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 공통의 언어는 바로 과학과 수학이다. 자연의 법칙은 우주 어디를 가든 동일하다. 멀리 있는 별이나 은하의 스펙트럼을 찍어 보면 태양의 스펙트럼과 비슷할 뿐 아니라 지구에서 적절히 설계한 실험 상황에서 만들어 낸 스펙트럼과도 일치한다. - P590

610-2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이렇게 서술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이다. 그들의 활동과 행동거지는 거의 스페인에서 볼 수 있는 수준으로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하다. 이들이 기독교를 모르고 다른 문명 국가들과 교류를 하지 못했음에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것들을 지니게 됐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 P610

612 아스텍 황제 목테주마는 보고를 듣고 공포의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먹는다는 음식물의 정체도 황제에게는 수수께끼였지만, 롬바르드 대포의 위력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그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스페인 장교의 명령이 떨어지자 탄환이 대포에서 천둥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잃거나 까무러진 사람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대포 구멍에서 돌멩이 하나가 화염과 섬광을 내면서 튀어나와 멀리 날아갔다고 했다. 이때 뿜어져 나온 연기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구역질이 나게 했다. 날아간 탄환에 맞은 산은 산산조각 나 깨져 버렸다. 나무는 톱밥으로 변해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목테주마 황제는 이 모든 설명을 듣고 나자 정신은 몽롱해지고 심장은 멈추는 듯했다. 그는 충격과 공포에 질려 버릴 수밖에 없었다. - P612

613-4 유럽에서 데려온 400명의 군인과 일부 토착 협조자로 구성된 침략군은 아스텍 인들의 미신과 유럽이 누리던 기술적 우위에 힘입어 인구가 100만이나 되던 고도의 문명 사회를 지구상에서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때는 1521년이었다. 아스텍 인들은 그때까지 말을 본 적이 없었다. 신대륙에는 말이라는 동물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아스텍 인들은 철 공예를 전쟁에 사용할 줄 몰랐으며, 아직 화약을 발명하기 전이었다. 아스텍과 스페인의 기술 격차는 기껏해야 수세기에 불과했지만, 그 차이는 아스텍 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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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종교에 대한 이들 세 가지 측면은 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가장 먼저 우리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다. 도덕적 가치는 신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순간,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과 형이상학적 측면은 서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실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는데, 신의 뜻에 복종하고 신을 위해 봉사한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우주 전체와 연결돼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더 커다란 세계에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화적인 측면이다. 그러므로 이 세 측면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쉽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과학이 처음 두 측면, 즉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과 가끔 갈등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 P63

64-8 나는 방금 종교의 도덕적 가치들이 과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 말을 옹호하는 몇 가지 근거를 대야할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 도덕적 가치에 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주장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이유 하나를 찾지 못하는 경우에는 자질구레한 이유 여러 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내가 도덕적 가치가 과학의 범주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이유를 여기서 밝히겠다.
첫째, 앞서 기술한 대로, 과거에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과 과학적 사실 사이에 갈등이 몇 차례 존재했지만,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변한 후에도 도덕적 관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것은 그 둘이 독립적이라는 사실에 하나의 근거를 제공한다.
둘째로, 최소한 기독교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아, 그런데 내가 종교에 대해 언급할 때 아주 편협한 관점을 취할 거라는 말을 미리 했어야 했는데 그걸 깜빡 잊었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처럼 폭넓은 주제를 다룰 때에는 구체적인 예를 드는 편이 나을 것 같아 기독교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러분이 무슬림이거나 불교도거나 혹은 여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내 말을 그에 맞게 번역한 다음 어떤지 살펴보면 되겠다.
셋째는, 내가 아는 한, 과학적인 증거를 전부 모아도 황금률(마태복음 7:12, 누가복음 6:31 의 교훈, 흔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로 요약됨: 옮긴이)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해 알려 주는 근거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과학적 연구에 기초해서 어떤 문제에 대한 "도덕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좀 철학적인 논거를 펼쳐 보려고 한다. 이건 내가 잘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과학과 도덕적 가치가 왜 이론상 서로 독립적인가에 대해 약간의 철학적 논증을 해 보고 싶다. 보통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중요한 문제들은 대부분 "내가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문제이다. 행동에 대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까? 이걸 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편리하다. 하나는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부분인데, 그것만으로는 그 행동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그건 바로 "자, 나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길 원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첫 번째 부분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사실 이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결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과학은 아직 무척이나 초보적인 단계에 와 있다. 그렇지만 최소한 첫 번째 부분은 과학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문제를 다룰 방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시도해 보고 결과를 보라." 그리고 "정보를 수집해라." 등인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얘기를 했다. "만약 이걸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문제는 전형적인 과학적 질문인 반면, 그 다음 질문인 "나는 이 일이 일어나길 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으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음, 여러분은 만약 어떤 행동을 하면 모든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물론 난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아‘ 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는 것을 당신이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과학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최종적인 판단은 결국 과학을 벗어나 당신의 몫이 된다.
다른 예를 들겠다. "이 경제 정책을 따른다면 불경기가 발생하게 될 걸 나는 알아. 물론 불경기가 발생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라고 말할 수 있다. 잠깐만! 불경기가 발생할거란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곧바로 결론에 도달할 순 없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국가가 이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믿음, 불경기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더라도 그 희생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얻을수 있는지에 대한 고려, 내가 국가 경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자존감 등 여러 가지 측면을 함께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 하나의 경제 정책은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 사람과 고통받는 사람을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궁극적인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어떤 현상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한 논증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끝에 가선 "난 이걸 원해" 혹은 "아니, 그건 원하지 않아" 중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 질문은 과학적인 질문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는 것만으로, 다시 말해 첫 번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얻게 될 최종 결과들을 안다는 것만으로 결국 그것을 원하게 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인 방법만으론 도덕적 가치문제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둘은 서로 독립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 P64

68-9 이제 종교의 세 번째 특징인 감화적인 측면으로 관심을 돌려 보고 싶다. 이 문제에 대해선 나도 답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모두에게 물어보려고 한다. 종교로부터 오는 의지력이나 안정감과 같이, 오늘날 우리를 감화시켜 주는 종교적 원동력들은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감화는 신을 위해 일하고 그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표현되는 감정적인 유대감이나 당신이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아주 작은 의심만으로도 약해질 수 있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해지면 때론 그런 감화를 얻는 데 실패하게 된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종교적 입장보다는 과학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의와 싸울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종교의 감화적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가능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여러분은 과학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 방식으로 종교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반영한 우주‘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과 같이 모험적이며 미지의 세계를 향해 끝없이 발전하는 분야에서 미리 질문에 대한 정답을 정해 놓고, 오랜 시간이 흘러도(혹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우리의 답들 중 일부가 틀렸다는 사실에 직면하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에 대해 종교가 절대적인 신뢰를 요구한다면, 과학과 갈등이 생기는 건 피할 수 없다. 종교 자체에 대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감화를 주는 종교의 실제적 가치를 유지해 나간다는 것도 나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문제이다. - P68

69-71 서구 문명은 두 가지 위대한 유산 위에 건설되었다. 하나는 과학적 정신으로서의 모험이다. 이는 진리를 향해 ‘미지의 세계‘ 를 탐험하는 모험이며 우주에 대해 답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은 답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도록 요구하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의심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인간 지성에 대한 겸허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다른위대한 유산은 기독교적 윤리인데, 여기에는 사랑의 실천, 모든 인류를 향한 형제애, 개인의 인간적 가치 등이 포함된다. 이는 ‘영적인 겸허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유산은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일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어떤 생각을 좇으려면 마음이 따라가야 하니까. 사람들이 종교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들은 무엇을 향해 가는 걸까? 현대 교회는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장소인가? 더 나아가 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면 현대 교회는 그런 의심의 가치를 인정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안식을 주며 장려해 주는 곳인가? 서구 문명을 지탱해 온 두 거대한 유산이 서로 일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그중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안식을 다른 유산의 가치를 공격하는 데서 얻어 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이런 불행한 역사를 피할 순 없을까? 서구 문명의 두 기둥이 모두 생동력 있게, 서로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함께 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감화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도덕적 규범의 근원이었으며 그 규범을 따르도록 감화를 주었던 종교를 위해, 그리고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위해, 내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인 것 같다. - P69

71-2 늘 그래 왔듯이, 우리는 요즘도 국가 간의 충돌을 경험한다. 특히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다(이 강연이 진행되던 1960년대는 미국과 소련이 심각한 냉전 상황에 놓여 있던 시절이었다: 옮긴이). 나는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람들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다. 만약 우리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들이 실상 불확실한 것이라면 이 갈등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 갈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시장 경쟁을 통한 자본주의와 정부의 규제를 통한 사회주의 중 어느 체제가 옳은가 하는 문제가 과연 확고하고 자명한 답을 가진 문제일까?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불확실하다는 경계를 유지해야 한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정부 규제를 통한 경제 관리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데 거의 확신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부 또한 규제를 하긴 한다. 엄밀히 말하면, 52퍼센트만큼 규제를 한다. 이 수치는 법인에 대한 소득세 규제를 근거로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미국을 상징하는 한쪽에 종교, 소련을 표현하는 반대편에 무신론을 놓고, 이분적으로 갈라놓은 상태에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있을 뿐 올바른 결정을 내릴 기준은 없다. 인간과 국가는 어떤 가치를 안고 있는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같은 문제들 역시 중요한 문제들이고 여러 해답들이 존재하겠지만 그들 역시 그저 불확실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갈등이 있긴 한 걸까? 아마도 통제적인 독재정부는 좀 더 혼란스런 민주주의 쪽으로, 또 혼란스런 민주주의는 좀 더 통제적인 독재정부 쪽을 향해 어느 정도 절충하며 진보하고 있는 것 같다.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연히 갈등은 없어진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믿지 않는다.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모든 개인적인 노력은 국가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소련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갈등의 위험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다양성, 심각한 사회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관점에 대한 열린 태도 등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이 바로 그 순간 소련이 국가적으로 제시한 해결책과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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