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 미국 정부는 ‘정부를 만들 줄 알거나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가정 하에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다시 말해 통치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통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쪽에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무용지물로 판명 난 아이디어들은 다른 쪽에서 계속 폐기되도록 허락받은 시스템이어야 한다. 현재 우리가 발명해 낸 ‘미국 정부‘는 바로 그런 시스템이다. 미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들은 ‘의심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시절에도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을 통해 가능성과 잠재력,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린 태도의 가치를 존중할 만큼 과학은 이미 충분히 발전해 있었다. 우리의 과학이 불확실하다고 믿는다는 것은 언젠가 다른 방법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가능성을 열어두면 언젠가 새로운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의심과 토론은 진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 정부는 매우 혁신적이고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시스템이다. 모든 게 썩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상원의원들은 그들의 주에 댐을 건설하겠다며 환심성 공약으로 표를 사고, 토론은 감정적인 싸움판이 되기 일쑤이며, 전방위적인 로비는 소수 의견이 받아들여질 기회를 앗아가지만 말이다. 이처럼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긴 해도, 나는 미국 정부가 (영국 정부를 제외하고는 현재 지구상에 있는 정부들 중 가장 만족스러우며 가장 현대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지 좋은 정부라는 생각은 안들지만.
소련은 퇴보하는 국가다. 아, 분명히 ‘기술적으로는‘ 앞서 있다. 지난 강연에서 과학과 기술의 차이점에 대해 묘사한 적이 있었는데, 불행히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억압하는 시스템 하에서도 기술적 진보는 방해받지 않는 것 같다. 히틀러의 시대에도 새로운 과학은 발전하지 못했지만 로켓은 만들어졌으며, 소련에서도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과학의 응용이라 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은 자유가 없어도 진행될 수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내가 소련을 ‘퇴보하는 국가‘ 라고 단언한 이유는 그들이 정부의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앵글로–색슨의 위대한 발견이다. 물론 그들이 그걸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기나긴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것을 쟁취했다. 소련에선 사상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얘기를 주고받던데요."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만, 일정한 형태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도 이 자리에서 반스탈린주의를 논해 보면 어떨까? 스탈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목조목 따져 보면 어떨까? 소련 정부가 직면하게 될 위험이 어떤 것들이 될지 얘기해 볼까? 소련 내부에서 현재 비판하고 있는 스탈린주의의 모순과 현재 그들 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행태들 사이에 유사점은 없는지 지적해 볼까? 음, 그래, 그래, 이제 됐어 됐어・・・.
자, 나도 잠시 흥분했었다. 지금 보았듯이 이건 순전히 감정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좀 더 과학적인 방식으로 다뤄야지, 이런 식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내가 굉장히 합리적이고, 과학적 논증을 하듯 ‘선입견 없는 태도‘로 이 문제를 대하기 전까지 여러분은 내 말에 별 확신을 가지지 못할 테니까. - P72

94 잘 알든 모르든 대답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대답을 한 사람이 대답을 하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대중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엔 그 반대이기가 쉽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답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로, 정치적인 약속은 절대로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내뱉어진 공약들이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P94

94-5 그래서 결국 아무도 선거 공약을 믿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치를 대체로 얕보게 되었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잃게 되었다. 결국 문제는 제일 첫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건 엄밀한 분석의 결과는 아니니 ‘그럴 수도 있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대중이 답에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을 찾으려는 대신,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P94

101-2 소위 진리인지 아닌지를 테스트하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과학 분야에서 이미 많이 적용되어 왔으며 아마 다른 분야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어떤 것이 정말로 진리라면 계속된 관찰을 통해 효율을 증가시키면 그 효과가 관찰 결과에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방법이다. 점점 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런데 유리에 수증기가 서려 잘 볼 수 없다면, 그 유리를 닦고 더 분명하게 관찰하면 거기에 존재하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볼 수 있지 여전히 뿌옇게 보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 P101

104-5 심적 텔레파시나 비슷한 종류의 현상들은 19세기 신비주의 심령론과 유사한 속임수에 기원을 두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편견은 어떤 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결국엔 그 편견을 깨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여기에 알맞은 재미있는 예는 바로 최면 현상이다. 최면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될 때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중략) 이렇게 시작된 최면 현상은 사람들이 많은 실험을 수행할 만큼 충분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운 좋게도 최면 현상은 수많은 편견을 이겨 내고 그 존재가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시작이 좀 이상하더라도, 충분한 연구가 진행된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비슷한 아이디어에서 나온 또 하나의 원리가 있는데, 그것은 묘사되는 효과가 일종의 영원성 또는 불변성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현상이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힘든 경우라면 여러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거의 같은 어떤 측면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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