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60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지역 국가에 미친 영향
민주주의 찬미자들은 종종 민주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예 제도에 대한 태도로 보아 이 고매한 주장이 그다지 들어맞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것도 증명된 차에, 명백한 해악인 전쟁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한층 더 나쁘게 만드는 영향을 미쳤는가? 그 대답은 민주주의가 전쟁이라는 제도에 부닥치기 전에 지역 국가라는 제도에 맞닥뜨린 사실로 알 수 있다.
민주주의와 산업주의라는 새로운 추진력이 지역 국가라는 낡은 기구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경제적 내셔널리즘이라고 하는 쌍둥이 죄악을 만들어 냈다. 민주주의의 고매한 정신이 이질적인 매체를 통과하여 이처럼 거칠고 천한 형태로 변해 버렸기에 민주주의는 전쟁을 방지하는 대신 오히려 부채질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도 서유럽 사회는 18세기에 내셔널리즘이 출현하기 전보다 행복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두 가지의 주목할 만한 예외는 별도로 하고 당시 서유럽 세계의 지역 국가는 국민 전체의 의지를 수행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실상 왕가의 사유 재산이었다. 왕가 사이의 전쟁과 혼인은 재산의 일부를 하나의 가문으로부터 다른 가문으로 이양하는 방법이었으며, 이 두 가지 방법 중 분명히 왕가 사이의 혼인이 즐겨 쓰였다.
합스부르크가의 외교 정책을 칭찬한 유명한 말ㅡ전쟁은 다른 이들에게 맡겨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하라ㅡ이 탄생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18세기 전반의 주요 전쟁의 세 가지 명칭 자체ㅡ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ㅡ는 혼인의 협정이 뒤얽혀서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전쟁이 일어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결혼 외교에는 분명히 야비하고 치사한 점이 있었다. 왕가 사이의 협약에 의해 영토와 주민을 마치 토지와 가축을 함께 양도하듯이 한 사람의 소유자로부터 다른 소유자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민주주의 시대의 감각으로 보면 실로 혐오할 일이다. 그러나 18세기적 방식에는 그것을 합리화할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애국심에서 빛나는 의미를 빼앗았으나 그와 함께 생명을 위협하는 독침도 뽑아 버렸다.
스턴의 「감상 여행」의 잘 알려진 구절 가운데 영국과 프랑스가 7년 전쟁을 하고 있는 중에 저자가 전쟁 중임을 깜빡 잊고 프랑스로 가는 이야기가 있다. 프랑스 경찰과 약간의 옥신각신이 있은 후 초대면의 프랑스 귀족의 알선으로 스턴은 그 이상 조금도 불쾌한 꼴을 당하지 않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40년 후 아미앵 조약이 결렬됐을 때 나폴레옹은 당시 마침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18세에서 60세까지의 영국인을 모조리 억류하도록 명령했다. 그의 이런 행위는 코르시카 인의 야만성의 실례가 되었고, 뒤에 웰링턴이 말한 "그는 신사가 아니다"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예증이 되었다. 또한 실제로 나폴레옹도 자기가 취한 조치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아무리 인도적이고 관대한 정부에서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일로서 취하는 조치에 불과하다. 이제 전쟁은 ‘총력전‘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지역 국가들이 민족주의적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이라는 것은 전투원이 육·해군이라는 이름의 선택된 ‘장기 말‘뿐 아니라, 당사국의 국민 전체가 전투원으로 간주되는 그러한 전쟁이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독립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를 얻은 영국계 미국인 개척자들이 모국 영국 편을 든 자들에 대해 취한 조치가 아마도 그 시초라고 생각된다.
이들 ‘영국 충성파‘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남자·여자·아이들 할 것 없이 그들의 집에서 추방되었다. 그들이 받은 이 조치는 20년 이전에 정복된 프랑스계 캐나다 인에 대해 영국이 취한 조치와 대단한 차이가 있다. 프랑스계 캐나다 인은 그들의 집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법제도와 종교 조직을 보전할 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 ‘전체주의‘의 최초의 예는 의미 깊은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를 얻은 미국 정착자들이야말로 우리 서유럽 사회 최초의 민주화된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내셔널리즘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해악이 된 경제적 내셔널리즘 역시 같은 지역 국가의 비좁은 틀 속에서 왜곡된 산업주의가 작용하여 탄생한 것이다.
물론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국제 정치에 있어서도 경제적 야심과 경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8세기의 ‘상업 중심주의(중상주의)‘ 가운데 경제적 내셔널리즘의 전형적인 실현을 볼 수 있고, 또한 스페인령을 통한 미국 식민지의 노예 매매 독점권을 영국에게 내어준 유트레히트 조약의 저 유명한 조항이 가리키듯, 이 시장과 독점권의 획득이라는 것이 18세기의 전쟁 목적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의 경제적 투쟁이 영향을 미친 대상은 소수 계급과 한정된 업자뿐이었다. 나라마다, 아니 마을마다 생활 필수품의 거의 전부를 생산하고 있던 농업을 주로 하는 시대에 있어서는 영국이 행한 시장 획득 전쟁은 대륙의 영토 획득 전쟁을 ‘국왕들의 유희‘라고 불러 무방했듯이 ‘상인들의 유희‘로 불러도 무방할 만한 것이었다.
규모가 작고, 긴장이 적었던 이 경제적 평형의 일반적 상태를 심히 교란시킨 것은 산업주의의 출현이었다. 그것은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작용이 본질적으로 전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민주주의의 참된 본질이 프랑스 혁명의 기만적인 선언대로 우애의 정신이라면, 산업주의가 그 잠재 세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한 불가결의 요건은 전세계적인 협력이다.
산업주의가 요구하는 사회 체제는 18세기의 새로운 기술 개척자들이 외친 저 유명한 표어 "자유롭게 만들게 하라, 자유롭게 통과시켜라"ㅡ즉 제조의 자유와 교환의 자유ㅡ는 말 가운데 정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세계가 작은 경제 단위로 분할되어 있는 것을 보고, 산업주의는 150년 전에 다같이 세계적 통일의 방향으로 향하던 두 가지 방식으로 세계의 경제 구조를 개조하는 일에 착수했다. 산업주의는 경제 단위의 수를 적게 나눔으로써 규모를 크게 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장벽을 낮게 하도록 노력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역사를 바라보면 지난 세기의 60년대와 70년대쯤에 하나의 전환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즈음까지의 산업주의는 민주주의의 도움을 받아 경제 단위의 수를 감소시키고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그 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는 다같이 정책을 역전시켜 반대 방향으로 실행시켰다.
우선 첫째로 경제 단위의 크기를 고찰하면, 18세기 말에는 영국이 서유럽 세계 최대의 자유 교역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해서 산업혁명이 다른 어느 나라도 아닌 영국에 처음으로 일어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788년에 북아메리카의 옛 영국령 식민지들이 필라델피아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각 주 간의 모든 통상상의 장벽을 완전히 철폐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자연히 팽창을 거듭하였고 세계 최대 자유 교역지역이 된다. 따라서 그 직접적 결과로서 가장 강대한 공업국이 될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로부터 수 년 뒤에 이번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그때까지 프랑스의 경제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던 지방 간의 관세 경계가 전부 철폐되었다. 19세기의 제 2·4분기에는 독일이 ‘관세 동맹‘의 형태로 경제적 통일을 실현하여 그것이 정치적 통일의 선구가 되었다. 제 3·4분기에는 이탈리아가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고 그와 동시에 경제적 통일을 획득했다.
다음으로 계획의 나머지 절반, 즉 국제 간의 교역을 방해하고 있는 관세와 그 밖의 지방적인 장벽을 낮게 하는 노력 쪽을 보면, 아담 스미스의 제자라고 자처한 피트가 자유 무역 촉진의 운동을 개시하였고, 그것이 19세기 중엽에 필·코브던·글래드스턴 등의 손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또한 미합중국도 고관세 정책을 시험해 본 뒤 1832년에서 1860년에 걸쳐 착실하게 자유 무역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루이 필립과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프랑스, 비스마르크 이전의 독일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 후 형세가 일변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선 다수의 소국이 통일되어 하나의 민주주의에 의한 내셔널리즘이 되었고, 이 즈음부터 합스부르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따위의 다민족 국가를 해체시키기 시작했다.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본디 하나의 자유 교역권이었던 도나우 왕국이 각각 경제적 아우타르키(자급 자족)를 지향하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몇 개의 후계 국가로 분열해 버린 동시에 다같이 영토를 잘려서 작아진 독일과 러시아의 사이에 새로운 경제적 구획이 끼어들게 되었다.
한편 약 30년 전부터 자유 무역으로의 음직임은 후계 국가로 한 나라 한 나라 분열하는 식으로 역행을 다시 시작하여, 1931년에는 마침내 ‘상업중심주의(중상주의)‘의 역류가 영국 자체에까지 미쳤다.
이 자유 무역 정책 포기의 원인은 쉽사리 규명할 수가 있다. 자유 무역은 ‘세계의 공장‘이었던 당시의 영국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1832~1860년에 걸쳐 합중국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여러 주의 면화수출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였다. 같은 시기의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좋은 기회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각국이 차례차례로 산업화되어감에 따라 단기적으로는 이웃 모든 나라와 격렬한 산업 경쟁을 하는 것이 각 지역 국가 이익에 맞는 것 같았다. 지역 국가가 각각 주권을 쥐고 있는 체제 아래서 과연 누가 그것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코브던과 그 신봉자들은 대단한 오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세계의 여러 국민과 여러 국가가 영국을 중심으로 하여 산업주의의 젊은 에너지를 투입해 맹목적으로 형성해 가는 새로운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경제 관계의 거미줄에 의해 단일 사회로 끌려들어올 것을 기대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자유 무역 운동을 단순히 총명한 이기주의가 낳은 걸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배격하는 것은 코브던 일파에게는 공평하지 못한 견해일 것이다.
그 운동은 또한 하나의 도덕적 관념의 표현이자 건설적인 국제 정책의 표현이었다. 가장 존경해야 할 그 운동의 대표자들은 영국을 세계 시장의 지배자로 만든다는 목적 이상의 것을 지향하고 이썼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적 세계 질서가 번영할 수 있는 그러한 정치적 세계 질서가 차차 발전할 수 있도록 촉진할 것을 바랐다. 전세계적인 물질과 무의 교환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행해지는 정치적 분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더욱 더 안전을 증대함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생활 수준을 한 단계 높여갈 것을 바랐던 것이다.
코브던의 오산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의 힘이 지역 국가 상호간의 경쟁을 촉진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데에 있다. 그는 이 두 거대한 시스템이, 18세기와 마찬가지로 19세기에도 가만히 얌전하게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현재 부지런히 세계적인 산업주의 거미줄을 치고 있는 인간이 두 거대한 시스템을 완전히 거미줄로 묶어 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우애를 대표하고 산업주의가 협력을 대표하는 본래의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낳을 효과에 기대를 걸었다. 그것은 속박되지 않은 민주주의와 산업주의가 비로소 이룰 수 있는 통일과 평화의 기대이다.
그는 이 같은 2개의 힘이 그 새로운 ‘증기압‘을 지역 국가라고 하는 낡은 기계 속에 막무가내로 침입시켜 분열과 세계적 무정부 상태를 야기시킬 가능성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대변자가 가르치는 우애의 복음이 근대 최초의 커다란 민족주의 전쟁을 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이 이런 종류의 전쟁이 처음일 뿐 아니라 마지막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18세기라는 한정된 상업 중심주의적 시기에 거대한 두 시스템의 지배가 당시 국제 통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던 비교적 중요성이 적은 사치품의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고 하면, 산업혁명이 국제 통상을 사치품의 교환에서 생활 필수품의 교환으로 바꾸는 시대에는 한층 더 민주화된 여러 국민이 경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철저하게 싸우게 될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요컨대 맨체스터 학파(자유 방임주의와 자유 무역 주장)는 인간의 본성을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제적 세계 질서라고 해도 단순히 경제적 기반 위에만 구축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참된 이상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이상주의의 궁극의 원천인 그레고리우스 대교황과 그 밖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회의 창시자들은 결코 그러한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초현세적인 목적에 전심을 바친 이러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나의 세계 질서를 건설하려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현세적인 목적은 난파한 사회(헬라스 사회)의 살아남은 생명을 살리자는 좀더 소극적인 물적 양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와 그의 무리들이 성가시고 짐스러운 필요물로서 세운 경제 구조는 분명히 임시 방편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 구조를 건설함에 있어 그들은 경제라는 모래 위가 아니라, 종교라는 바위 위에 세우려고 힘썼다. 그래서 그들이 힘쓴 덕으로 서유럽 사회의 구조는 견고한 종교의 기초 위에 안정을 찾았고, 1400년도 못 되는 동안에 처음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서 대수롭잖게 발족한 경제 사회 구조가 세계의 곳곳에 퍼진 오늘날의 대사회로 성장한 것이다.
만약 그레고리우스의 자그마한 경제적 건물에 견고한 종교적 기초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건설할 임무를 지고 있는 훨씬 거대한 세계 질서라는 건물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이라는 안정감 없는 기초 위에서는 도저히 안전하게 설 가망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 P355

361-2 산업주의가 사유 재산제에 준 영향
사유 재산제란 개개의 가족이나 세대 단위로 경제 활동을 하는 사회에 설립되는 경향이 있는 제도로서, 그런 사회에서는 아마도 그런 사유 제산제가 부의 분배를 지배하는 가장 적합한 제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 활동에서 현실적인 단위는 이미 단일한 가족이나 단일한 마을, 단일한 민족 국가도 아니고, 현재 살고 있는 ‘인류‘ 전체인 것이다. 산업주의가 출현한 이래 현대의 서유럽 사회 경제는 사실상 가족 단위를 초월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가족 단위의 사유 재산 제도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 오랜 가족 단위의 제도는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산업주의는 사유 재산제에 강대한 추진력을 주게 되어 재산가의 사회적 세력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그 사회적 책임을 감소시켰다. 그 결과, 산업주의 이전의 시대에는 이익을 가져왔던 사유 재산 제도가 여러 가지 점에서 노예 제도에 이어 또 다시 사회적 해악의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는 오랜 사유 재산 제도를 새로운 산업주의의 힘과 조화되도록 조정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방법은 국가의 힘으로 사유 재산을 계획적·합리적으로 또한 공정하게 관리해서 재분배하는 것을 통해 산업주의가 불가피하게 야기하는 사유 재산의 편재를 방지하는 것이다. 기간 산업을 관리함으로써, 국가는 그런 사유 재산의 편중으로 인해 어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활에 지나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억제하는 한편 부자에 대한 높은 과세로 경비가 조달되는 각종 사회 산업을 벌임으로써 빈곤의 비참한 결과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 방법은 국가를 전쟁 만드는 기계ㅡ이제까지 그것이 국가의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이었다ㅡ에서 사회 복지를 증진시키는 기관으로 바꾼다는 부수적인 사회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만일 이 평화적인 정책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대신 혁명적인 방법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공산주의에 의해 사유 재산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은 얼핏 생각해도 확실한 일이다. 이것이 조정에 실패하는 경우 감수해야만 할 유일하고 실제적인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산업주의의 힘에 의한 사유 재산의 편재는 사회 사업과 고율 과세에 의해서 완화되지 않는 한 참을 수 없는 이상 현상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실험이 보이고 있듯이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요법은 병 자체에 그치지 않고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될 염려가 있다. 사유 재산제는 산업주의 이전 시대의 사회적 유산 가운데 가장 좋은 제도 중 하나이다. 이를 함부로 폐지하게 되면 우리 서유럽 사회의 사회적 전통에 불행한 단절이 생기게 되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 - P361

362-5 민주주의가 교육에 준 영향
민주주의의 출현으로 실현된 최대의 사회적 변화 중 하나는 교육의 보급이었다. 선진 국가에서는 무상의 국민 초등의무교육제도가 채택되어 교육은 모든 아동의 기본 권리로 되었다. 이것은 교육이 소수의 특권 계급에 독점되어 있었던 민주주의 이전 시대의 교육의 역할과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이 새로운 교육 제도는 현대의 국제 사회에서 명예 지위를 획득하기를 염원하는 모든 국가에게 있어 주요한 사회적 이상의 하나였다.
국민 교육은 최초에 창시되었을 때 당시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정의와 개화의 승리로서 환영되었다. 그리고 인류를 위한 행복과 안녕의 새시대를 초래하는 것으로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러한 기대는 행복한 이상의 시대에 이르는 큰길 위에 몇 개의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도 그 밖의 다른 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견하지 못했던 요소가 가장 중대한 것이 되었다.
첫 번째 장애는, 전통적인 문화적 배경에서 따로 떼어놓는다는 희생을 치르면서 교육을 ‘대중화‘하는 데서 생기는 피할 수 없는 교육 내용의 빈약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선한 의도라 하여도 빵과 물고기의 기적(<마태> 15:32~39)을 행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량 생산하는 지적 양식에는 좋은 맛이나 영양이 들어 있지 않다. 두 번째 장애는 교육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짐과 동시에, 그 성과가 자칫하면 공리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교육이 사회적 특권으로서의 권리를 이어받았지만, 그 권리가 한정된 사회 체제하에서는, 교육이란 돼지에게 던져 준 진주(<마태> 7:6)든지, 아니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구하는 고가의 진주(<마태> 13:46) 중 어느 하나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교육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세속적인 야망 또는 경박한 오락의 도구는 아니다. 교육을 대중오락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따라서 또 그런 오락을 제공하는 기업가가 이윤을 올리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가능성ㅡ이 생긴 것은 의무 초등교육이 시작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업가의 새로운 이윤추구 수단으로 이용됨으로써 세 번째 최대 장애가 생기게 되었다. 보통 교육이라는 빵이 물 위에 던져(<전도서> 11:1)지자마자 바다 속으로부터 상어 떼가 떠올라와서 교육자의 눈 앞에서 아이들의 빵을 빼앗아 먹어 버린다. 초등보통교육제도는 대체로 1870년의 포스터법에 의ㅡㄴ해서 완성되었지만, 그로부터 약 20년 뒤ㅡ즉 초등교육이 시작된 초기의 어린 학생들이 충분한 구매력을 획득하자마자ㅡ박애주의적 교육자의 사랑의 노고를 잘 이용한 기업가 신문왕(新問王)은 훌륭한 이익을 취하였고, 그런 사실을 재빨리 간취한 무책임한 인간은 뒤이어 천재적 수완으로 황색 신문을 발명하였다.
민주주의가 교육에 미친 영향에 대한 이 우려할 만한 대중적 반응이 현대의 전체주의를 표방하는 국민국가의 지배자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출판왕이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에게 쓸데없는 오락을 제공함으로써 몇백만의 큰 돈을 벌어들였다고 한다면, 착실한 정치가 역시 이러한 언론 경제의 대중화를 이용하려 들 것이다. 설사 돈은 벌리지 않는다고 해도 권력을 끄집어 낼 수는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신문왕 위에 군림하면서 강하고 저속한 개인적 오락 대신, 강하고 저속한 국가적 선전 조직을 만들어 냈다. 영국과 미국의 자유 방임 체제 하에서 개인적 이익을 위해 발명된 어중간한 교육을 받은 인간이 집단적으로 노예화되었고, 정교하고 세밀한 기계를 국가 지배자가 그대로 접수해서 이들 지적인 기구를 영화나 라디오로 보강하여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이용하였다. 노스클리프를 뒤이어 히틀러ㅡ이 방면에 첫 인물은 아니다ㅡ가 나타났다. 이와 같이 민주적 교육이 채용된 나라에서의 국민은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든지 정부 당국에 의해 조종되는 지적인 전제 정치 체제하에 놓이는 위험에 부딪쳤다. 국민의 정신을 구출하려 한다면, 대중 교육의 수준을 높여 피교육자가 적어도 영리주의나 선전의 저급한 형태에 걸려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전적으로 의지할 방법은 못 된다. 다행하게도 오늘날의 서유럽 사회에는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개의 이해를 초월한 유력한 교육 기관이 존재하는 바, 영국의 노동자협회라든지, 영국방송협회(BBC) 등이 그것이다. - P362

369-70 공의회 운동은 봉건 시대에 이미 지방 자치로 중세 국왕들의 행동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유효하다는 것이 입증된 의회 제도를 본따서 교회의회 제도를 전 세계적 규모로 확대 설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임하는 교황이 권력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려는 건설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공의회 운동이 무르익자 교황의 태도는 완전히 굳어졌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교황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성공했다. 즉, 공의회 운동은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렇게 조정의 마지막 기회를 물리침으로써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를 전통적 유산인 세계주의와 새로운 지역주의적 경향 간의 심한 내부 불화로 분열되는 운명에 몰아넣었다.
그 결과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혁명과 사회악이 되풀이되었다. 전자(혁명)의 예로는, 교회가 몇몇의 적대적인 교회로 분열되어 서로 상대방편을 반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헐뜯으며 전쟁과 박해를 계속 일으킨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후자(사회악)의 예로서는, 교황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신성한 권리‘를 세속적 군주가 중간에서 빼앗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신성한 권리가 지금도 여전히 주권국민국가의 이교적인 숭배라고 하는 무서운 형태로 서유럽 세계에 커다란 재앙을 가져오려 한다. 그것은 바로 애국심으로서, 존슨(영국의 문인) 박사가 경향을 달리한 표현으로 ‘악당들의 마지막 은신처‘라고 부르고, 캐벌(영국의 간호사)이 좀 더 그 본질을 들추어내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말한 애국심이 서유럽 세계의 종교로서, 거의 그리스도교를 대신해 들어앉아 있다. 어쨌든, 지역주의가 서유럽 그리스도교회에 가한 압력의 결과 생긴 애국주의라는 이 괴물만큼,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ㅡ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역사적 고등 종교의 가르침과는 확실히 모순 되는 점ㅡ을 생각해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 P369

374-5 문명이 분업에 끼친 영향(일부)
미개 사회에 분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고, 대장간이나 음영 시인, 승려, 주술사 등의 전문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러나 문명의 힘이 분업에 작용하면, 일반적으로 분화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아가, 분업에 의한 사회적 이익이 오히려 감소되기 시작할 뿐 아니라 반대로, 반사회적인 작용을 할 염려가 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창조적 소수자와 비창조적 다수자가 서로 교류하는 가운데 생활에서 나타난다. 창조자들끼리는 비밀주의에 빠지게 되고, 일반 대중은 불균형에 빠지게 된다.
비밀주의라는 것은 창조적 개인의 생애에 나타나는 실패의 징조로서, 예의 은퇴와 복귀의 리듬적 운동이 전반 부분만 강조되어, 전체 과정을 복귀까지 완료하는 데 실패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리스 인은 이런 형태로 실패한 인간을, ‘이디오테스‘라 부르며 비난했다. 이디오테스라는 것은 기원전 5세기경의 그리스 어 용법으로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그 재능을 공공의 복지에 유용하게 쓰지 않고, 자기 혼자만 만족하는 행동을 하는 사회적 죄과를 저지른 인간을 가리켰다. 그런 행동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에서는 어떤 눈으로 보였는지를, 오늘날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이디움트‘(그리스 어에서 유래된 단어)가 백치를 의미하게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대강의 짐작은 간다. 그러나 현대 서유럽 사회의 참된 ‘이디오타이‘(이디오테스의 복수형)는 정신박약자 수용 시설에서 볼 수 없다. 그들 가운데 하나의 집단은 특수화되고 타락해서 ‘호모 이코노믹스(경제인)‘가 된 ‘호모 사피엔스‘로서 디킨스가 풍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상이다. 그리고 그래드그라인드의 상대를 제공한다. 또 다른 창조적 개인은 자신은 그것과는 반대쪽 끝에 있으며 ‘빛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같은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친구들로서, 자기들의 예술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아니꼬운 태도로 거드름을 피우는 지적 예술적 인텔리 즉 길버트가 풍자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번손의 무리들이 그것이다. 디킨스와 길버트의 연대의 차이는 아마도 전자의 집단이 빅토리아조 초기에 영국에 눈에 띄게 나타난 존재들이고 후자의 집단은 빅토리아 왕조 후기에 더 드러난 자들인 것으로 알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북극과 남극의 차이처럼 현격하게 다르지만 그러나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북극과 남극은 사실상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기후적으로 같은 결점을 지니고 있다.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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