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슨 가족>> 에피소드 한 편을 제작하는 데 150만 달러가 들고 8개월간 300명이 매달려야"(p11) 할 만큼, <<심슨 가족>>은 다양하고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그래서 엮은이는 "<<심슨 가족>>에 대한 책 한 권을 쓰려면 몇 명의 철학자가 필요할까? 자신 있게 말하건대 쓰는 데 20명, 엮는 데 3명이다."(p11) 라고 말한다. 33년째 방영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 가족>을 소재로 철학자들이 쓴 글들을 엮은 철학 에세이집(혹은 대중문화비평서)이다. <심슨 가족>을 재미있게 본 독자라면 분명 좋아할 책이다. 만화에서 느낀 여운을 길게 할 뿐더러 윤리•반지성주의•종교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주제를 성찰할 기회를 준다. 다만 내용을 모르면 철학적 성찰이 크게 흥미롭지는 않을 것이고,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안 본 사람에게까지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나를 돌보는 시간 없이 늘 다른 사람만 챙기는 일상이 반복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마음챙김 강사 샤론 샐즈버그는 자기돌봄이나 자기 자비의 필요성은 망각한 채 다른 사람에게만 지나치게 관대할 경우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쌓인다고 지적한다. 샤론은 타인에 대한 관대함의 목적과 의도를 잘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화가 나는 감정을 품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 건 진정한 관용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주기만 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돌보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 P166
버릴 문장이 거의 없다.
세상은 어느덧 선의를 주고받는 공간보다는 선의를 돈으로 구매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선의 상실‘이라는 말이 그토록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순수한 선의를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산다. 모든 선의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계산이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결국 ‘더 큰 이익‘을 위해 행하는 ‘계산적 선의‘라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벗어난 선의를 좀처럼 상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발비를 지불하고 여느 때처럼 선 의상실 앞을 지나다, 문득 내가 삶 전체를 통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수한 선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집요하게 묻다보면 그 종착지에는 어떤 종류의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은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도,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인들과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어떤 미래, 그런 선의로 가득한 삶을 꿈꾸며 사는 건 아닐까?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선의를 전하고, 또 그로부터 선의를 받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나아가 사랑에서 늘 하는 고민 역시 이 사람이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나를 대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삶이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 P237
늘상 보던 거리가 어느 순간 낯설게 보였던 것은 나 역시 한 명의 젊은이로서 익숙하게 된 그런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지런히 다녔던 거리 어디에도 나의 역사는 머물 곳이 없다. 이 낯선 도시에 내가 새겨진 곳은 그나마 내가 몸담았던 누추하고 허름한 골목들이다. 나는 복고지향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처럼 늘 새롭고 세련된 것에 매혹되는 소비사회의 현대인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는 삶에서, 종종 마주하는 기억들에서, 자주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무엇이 내 삶을 내 삶이게 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지 이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해답이나 진리를 알 리 없지만, 그 단서가 내가 잃어가는 것들이나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 P243
늘 바라는 게 있었다면 삶을 정확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정확하게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간다. 나는 내가 사는 거리를, 또한 내가 살게 될 거리를 보다 정확하게 응시하며 나아가고 싶다. 이 거리에 무엇이 있고, 또 앞으로의 거리에 무엇이 있을지를 알고 싶다.이곳이든 저곳이든 내가 있는 곳에서 보는 것이 그저 화려하고 달콤한 이미지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깊고 오래된 선의를 보고 싶다. 흩어지거나 사라지지도, 소비되거나 소모되지도 않는 삶의 선의를 말이다. - P244
세상에 사람은 넘쳐난다. 그 모든 이들이 관심과 사랑, 선의를 갈구한다. 그들은 일말의 인정과 사랑을 얻고자, 삶을 지탱하게 해줄 선의를 붙잡고자 분투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고자 한다. 삶이란 때론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저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로부터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삶이 복잡해지는 건 단지 지금 내 곁에 그 한 줌의 선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손해와 이익의 계산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계산이란 당최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선의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삶, 그러한 사회가 정말로 더 행복한 삶이고 더 발전된 사회일까? - P247
진실이란 단순하다. 삶의 정답이라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강물 같은 선의를 서로에게 보낼 수 없어서, 그토록 단순한 삶을 살 수 없어서 인생에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조건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진다. 땅바닥을 지나가는 개미 행렬이나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 한 장, 슈퍼마켓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행복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온갖 부가적인 결핍들이 더해진다. 내가 속한 공간이 불만스럽고, 소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디어에서 비추는 각종 화려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쌓아가는 과정 같지만, 실은 더 많은 결핍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결핍의 홍수 속에서, 누가 더 자신을 가까스로 유지하는가 하는 경쟁이다. - P248
정신없이 삶을 살아가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얻으려 이렇게 발버둥치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인생을 고민한다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선의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극복해야 할 것은 선의를 미루고 있는 현재일 뿐이다. 나를 채우는 온갖 변명거리를, 악마의 속삭임 같은 언어의 함정을, 복잡한 논리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관념을 극복하고 마음을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 P249
한 사회에 만연한 ‘감정‘은 그 사회의 내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는 징후다. 우리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감정적 표현 중 단연 ‘분노‘가 으뜸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부가 균열되고 왜곡되어 더 이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도지어 주니어의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Why We Hate》에 따르면,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분노는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공격 또는 도피를 나타내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삶의 한계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 즉 사회환경이 우리를 온전히 지탱해줄 수 없다고 느낄 때 분노는 만연해진다. 원초적 본능으로서 분노는 우리 내부의 균열 속에서 나타난다. 진화심리학적 전제에서 생존과 생존에 대한 위협은 가장 큰 대립 요소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내면에서 발생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이러한 동물적 본능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신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당위‘와 ‘사실‘의 분열이다. 친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연인이 나를 배신했을 때, 내가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 내면은 당위와 사실의 균열에 처하게 된다.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관념이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표류하며 분노를 일으킨다. 부정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며 발생하는 253 것이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찾게 된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면, 첫째는 나를 배신한 애인을 계속 증오하는 것이다. 증오란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집착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 분노가 특정 대상에 고정된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관념을 세움으로써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애인이 나를 배신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나 자신의 오래된 잘못이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후회의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는 또 다른 정당한 관념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때 정당한 관념이란, 애인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고 내게는 더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세 번째 경우처럼 분노가 정당성과 결합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확실한 변화와 갱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 P252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올바르기란 쉽다. 하지만 친절하기는 어렵다. 올바름은 언제나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삶을 맞추면 달성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올바름의 기준을 부단히도 고쳐온 과정이자 올바름이라는 폭력 아래 무수한 타자들을 굴복시켜온 시간이기도 하다. ‘올바른 것을 행한다‘는 명분 아래, 그에 대한 손쉬운 복종 아래, 눈앞의 타인에 공감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사라졌다. 그 올바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부드러운 마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순간 편견과 차별 없이 일어나는 공명은 늘 올바름 앞에 힘을 잃는다. 친절은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달리 말해 환대는 타인을 향한 내 안의 ‘올바름의 기준‘이 무너진 폐허에서 피어오른다. 진정으로 친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무너져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쌓아 올린 편견의 성벽을 따라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살아 있는 채로, 매번 새로운 영혼으로, 갓 알에서 태어난 어린 새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친절 안에서 가치의 기준은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내가 환대한 자, 내가 사랑하는 자, 나와 시선과 육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자가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친절은 역동성의 다른 이름이고 새로움의 징표이며 어려운 일이다. - P295
4) 도성제(道聖諦) ‘도(道)‘란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간의 길이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상태의 길‘을 말한다. 「소나경(Sona經)」은 중도를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처럼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이다.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이다. 4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즉 고의 발생과 고의 소멸, 그리고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바르게 아는 것이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즉 바른 마음가짐이다. 구체적으로는 탐욕스러운 생각, 성내는 생각, 해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온화한 마음, 자비스러운 마음, 청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거짓말[妄語], 이간시키는 말[兩舌], 욕하는 말[惡口], 꾸며대는 말[綺語]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말, 성실한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이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위이다. 살생(殺生), 도둑질[偸盜], 음란한 짓[邪淫]을 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의 목숨을 구해 주고 보시(布施)하고 청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의 경우에는 재가신도의 바른 신앙에서 우러나는 보시를 받아 생활하는 것이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이다. 이미 생긴 선(善)은 더욱 자라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고 이미 생긴 악(惡)은 끊도록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기억이다. 자기 자신이나 그 주변의 것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기억해서 반성하고 바른 의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心一境性]을 말한다. 정(定, samadhi)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 dhyana)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禪定)이라고도 한다. 8정도는 그 순서대로 실천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견을 닦아야 정사가 생기게 되고 정사를 닦아야 정어를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항목[支]들도 마찬가지다. 8정도의 마지막 목표는 정정(正定)이다. 8항목 가운데서 앞의 7항목은 모두 정정에 이르기 위한 준비 단계이다. 정정을 닦아 지혜(prajna)를 얻게 되고, 지혜를 가짐으로써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