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어느덧 선의를 주고받는 공간보다는 선의를 돈으로 구매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선의 상실‘이라는 말이 그토록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순수한 선의를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산다. 모든 선의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계산이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결국 ‘더 큰 이익‘을 위해 행하는 ‘계산적 선의‘라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벗어난 선의를 좀처럼 상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발비를 지불하고 여느 때처럼 선 의상실 앞을 지나다, 문득 내가 삶 전체를 통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수한 선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집요하게 묻다보면 그 종착지에는 어떤 종류의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은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도,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인들과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어떤 미래, 그런 선의로 가득한 삶을 꿈꾸며 사는 건 아닐까?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선의를 전하고, 또 그로부터 선의를 받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닐까? 나아가 사랑에서 늘 하는 고민 역시 이 사람이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나를 대하는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삶이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 P237
늘상 보던 거리가 어느 순간 낯설게 보였던 것은 나 역시 한 명의 젊은이로서 익숙하게 된 그런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지런히 다녔던 거리 어디에도 나의 역사는 머물 곳이 없다. 이 낯선 도시에 내가 새겨진 곳은 그나마 내가 몸담았던 누추하고 허름한 골목들이다. 나는 복고지향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처럼 늘 새롭고 세련된 것에 매혹되는 소비사회의 현대인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는 삶에서, 종종 마주하는 기억들에서, 자주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무엇이 내 삶을 내 삶이게 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지 이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해답이나 진리를 알 리 없지만, 그 단서가 내가 잃어가는 것들이나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 P243
늘 바라는 게 있었다면 삶을 정확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정확하게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간다. 나는 내가 사는 거리를, 또한 내가 살게 될 거리를 보다 정확하게 응시하며 나아가고 싶다. 이 거리에 무엇이 있고, 또 앞으로의 거리에 무엇이 있을지를 알고 싶다.이곳이든 저곳이든 내가 있는 곳에서 보는 것이 그저 화려하고 달콤한 이미지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깊고 오래된 선의를 보고 싶다. 흩어지거나 사라지지도, 소비되거나 소모되지도 않는 삶의 선의를 말이다. - P244
세상에 사람은 넘쳐난다. 그 모든 이들이 관심과 사랑, 선의를 갈구한다. 그들은 일말의 인정과 사랑을 얻고자, 삶을 지탱하게 해줄 선의를 붙잡고자 분투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자 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만들고자 한다. 삶이란 때론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한없이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저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그로부터 한 줌의 행복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간다. 삶이 복잡해지는 건 단지 지금 내 곁에 그 한 줌의 선의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랑조차 손해와 이익의 계산속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계산이란 당최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일까? 선의 대신 계산이 자리 잡은 삶, 그러한 사회가 정말로 더 행복한 삶이고 더 발전된 사회일까? - P247
진실이란 단순하다. 삶의 정답이라는 것도 그리 어려운 게 아닐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강물 같은 선의를 서로에게 보낼 수 없어서, 그토록 단순한 삶을 살 수 없어서 인생에 복잡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의 조건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많아진다. 땅바닥을 지나가는 개미 행렬이나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화지 한 장, 슈퍼마켓에서 파는 아이스크림 하나면 행복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 뒤로하고, 온갖 부가적인 결핍들이 더해진다. 내가 속한 공간이 불만스럽고, 소비하지 못한 것이 아쉽고, 미디어에서 비추는 각종 화려한 이미지들이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쌓아가는 과정 같지만, 실은 더 많은 결핍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 결핍의 홍수 속에서, 누가 더 자신을 가까스로 유지하는가 하는 경쟁이다. - P248
정신없이 삶을 살아가다보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얻으려 이렇게 발버둥치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다들 열심히 머리를 굴려 인생을 고민한다지만, 사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 나 자신에 대한,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선의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극복해야 할 것은 선의를 미루고 있는 현재일 뿐이다. 나를 채우는 온갖 변명거리를, 악마의 속삭임 같은 언어의 함정을, 복잡한 논리를 만드는 데 열중하는 관념을 극복하고 마음을 앞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 P249
한 사회에 만연한 ‘감정‘은 그 사회의 내적인 문제들을 드러내는 징후다. 우리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감정적 표현 중 단연 ‘분노‘가 으뜸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내부가 균열되고 왜곡되어 더 이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도지어 주니어의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Why We Hate》에 따르면,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봤을 때 분노는 "생존과 번식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공격 또는 도피를 나타내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삶의 한계상황이나 위기상황에서 분노를 느낀다.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 즉 사회환경이 우리를 온전히 지탱해줄 수 없다고 느낄 때 분노는 만연해진다. 원초적 본능으로서 분노는 우리 내부의 균열 속에서 나타난다. 진화심리학적 전제에서 생존과 생존에 대한 위협은 가장 큰 대립 요소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내면에서 발생할 때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이러한 동물적 본능은 현대사회에 이르러 정신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당위‘와 ‘사실‘의 분열이다. 친구가 약속을 어겼을 때, 연인이 나를 배신했을 때, 내가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 내면은 당위와 사실의 균열에 처하게 된다. 실현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관념이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 표류하며 분노를 일으킨다. 부정당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정신이 무너지며 발생하는 253 것이 분노다. 이러한 분노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을 찾게 된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면, 첫째는 나를 배신한 애인을 계속 증오하는 것이다. 증오란 어떤 것에 지속적으로 집착하며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 분노가 특정 대상에 고정된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관념을 세움으로써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다. 애인이 나를 배신하긴 했지만 알고 보면 나 자신의 오래된 잘못이 원인이 되었다는 식으로 후회의 관념을 구축하는 것이다. 셋째는 또 다른 정당한 관념을 통해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때 정당한 관념이란, 애인은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사랑할 만한 존재가 아니고 내게는 더 좋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 같은 것이다. 세 번째 경우처럼 분노가 정당성과 결합한다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확실한 변화와 갱신의 기회를 제공한다. - P252
"옳음과 친절함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친절함을 택하라." 올바르기란 쉽다. 하지만 친절하기는 어렵다. 올바름은 언제나 정해진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과 삶을 맞추면 달성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올바름의 기준을 부단히도 고쳐온 과정이자 올바름이라는 폭력 아래 무수한 타자들을 굴복시켜온 시간이기도 하다. ‘올바른 것을 행한다‘는 명분 아래, 그에 대한 손쉬운 복종 아래, 눈앞의 타인에 공감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사라졌다. 그 올바름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부드러운 마음, 타인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순간 편견과 차별 없이 일어나는 공명은 늘 올바름 앞에 힘을 잃는다. 친절은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달리 말해 환대는 타인을 향한 내 안의 ‘올바름의 기준‘이 무너진 폐허에서 피어오른다. 진정으로 친절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무너져 있어야 하고, 열려 있어야 한다. 내 안에 쌓아 올린 편견의 성벽을 따라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매순간 살아 있는 채로, 매번 새로운 영혼으로, 갓 알에서 태어난 어린 새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해야 한다. 친절 안에서 가치의 기준은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내가 환대한 자, 내가 사랑하는 자, 나와 시선과 육성을 있는 그대로 마주한 자가 새로운 기준이 된다. 그래서 친절은 역동성의 다른 이름이고 새로움의 징표이며 어려운 일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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