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스 카플란이 신념 변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한 그의 의견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습니다. 우주는 결정론적이에요. 우리는 스스로의 행동을 써내려 가는 주체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보다 226 앞선 무언가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니까요."
그는 이런 경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결정은 부분적으로 감정 상태에 의해 조절되고,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에게 자유의지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는 것을 우울하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믿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인지과학 종사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최근의 수많은 연구들은 자유의지에 대한 개인의 믿음이 약해지면 자기중심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이 늘어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대체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회의 규칙을 무시하고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성향이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신념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사회가 매끄럽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매끄럽게 돌아가는 인생을 위해서도). - P225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더 열린 마음을 향해, 더욱 깊어진 연민과 이타주의를 향해 나아가도록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2017년 말에 『연민의 과학 옥스퍼드 핸드북』이라는 환상적인 책이 발표됐다. 이 책은 이 신흥 분야에서 나온 연구 결과들을 리뷰하는 책이다. 나는 이것이 내리고 있는 주요 결론을 다섯 가지 팁으로 요약해서 모두가 연민과 향상된 소통 능력을 일상 속으로 통합하는 데 사용할 수 있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배워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타인과 소통하는 행위는 자신의 감정을 지각하는 방식에 신체적인 변화 320 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 ‘나 화가 났어‘라고 차분하게 말하는 행위는 뇌 속의 원시적인 감정적 분노 반응을 누그러뜨려 고등 인지 회로로 활동을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 분노에 따르는 감정적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운이 따라 준다면 당신이 이런 감정을 표출했던 사람이 연민의 감정을 가지고 반응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표현하기만 해도 당신의 뇌 속에서는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긍정적이고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와 비슷하게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몸짓, 얼굴표정, 행동 등을 관찰함으로써 명확한 언어적 단서 없이도 그 사람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법을 훈련하는 것에서 도움을 얻는다. 이런 기술을 익히면 우정을 가꾸는 데 도움이 되고, 더욱 연민 어린 관점이 자랄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얼굴에 감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읽는 연습을 해 봐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즐거운 저녁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연민의 명상 연습하기
이것을 하려면 자기가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에 방점을 찍고 자아 성찰을 할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이 행동의 목적은 자신의 결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에게 연민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주의를 돌려 그들을 자신의 연민과 감사의 마음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삶에서 대하기 어려웠던 사람들, 당신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321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 목적은 그들 역시 사랑과 친절, 평화로 채워지기를 빌어 주는 것이다. 연민의 명상은 마음챙김mindfulness, 행복, 자신과 타인에 대한 연민의 감정, 걱정의 감소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명상은 잠재적으로 부정적이거나 괴로운 사건도 거기에 압도당하지 않을 새로운 방식으로 틀 잡을 수 있게 해서 그런 사건을 잘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이 명상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두려움과 쾌락이 들쭉날쭉 불안정한 보상경로 중심의 생활과 거리를 두고 좀 더 안정된 마음 상태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3. 타인의 연민에 감사하기
다른 사람의 이타적인 행동을 목격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감정을 품을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자기도 타인을 돕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해 준다. 이것은 도덕성을 고양해 준다. 도덕성 고양은 경외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강력한 감정이다. 이 감정은 투쟁-도피 반응을 담당하는 좀 더 원시적인 감정 회로에 대한 앞이마겉질의 통제력을 높여 주기 때문에 좀 더 집행력 있는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도덕성 고양은 또한 옥시토신 수치를 높이고, 코르티솔 수치를 낮추고, 신경가소성을 높여 예상치 못했던 경험을 더욱 잘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게 해 준다. 종합해 보면 도덕성 고양이라는 이 긍정적인 감정은 ‘선행 나누기‘ 정신을 고양해 준다. 사람들의 친절한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사회 322 전반에 연민을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4. 감사의 마음 갖기
우리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만 혼자서 자급자족할 수 있게 진화하지는 않았다. 인간이 친사회적인 뇌를 발달시키게 된 것은 서로 의존할 때 생기는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가 성립되면 생존에 도움이 된다. 타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는 단순한 행위도 그런 지지를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된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그날 하루 감사했던 세 가지 일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이렇게 하면 그런 일을 있게 해 준 사람에게 잊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하루에 긍정의 마침표를 찍고, 나 자신도 친절한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이런 감정을 유도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5. 연민에 초점을 맞추는 부모가 되기
연민을 강화하는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우면 나중에 자기만의 긍정적인 지지 네트워크를 발전시키고 세대를 가로질러 이타주의를 더 널리 퍼뜨리는 데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보호자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어떤 감정이 용인되는 감정인지, 그런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는지 배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느린 호흡 같은 기술을 이용해서 감정을 통제해서 분노를 가라앉히는 행동은 당신 자신이나 자식 모두에게 이롭다. 연구에 따르면 시간을 내어 자기관리를 323 하는 부모를 둔 아동도 그와 유사하게 장기적으로 그에 따른 혜택을 입는다고 한다. 건강하게 잘 먹고,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라. 그리고 취미생활을 통해 긴장을 풀고 명상을 실천하라.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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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도태
생물학자에게 있어 사상의 진화와 생물권의 진화를 비교하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추상의 왕국‘이 생물권을 초월하고 있는 정도는 생물권이 비생물권을 초월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한층 클 것임에 틀림없지만, 사상은 생물에 특성의 몇 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구조를 영속화하며 증식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사상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각각 융합, 재결합, 분리시킬 수가 있으며 더욱이 생물과 마찬가지로 진화한다. 그리고 이 진화에 있어서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도태가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다. 나로서는 사상 도태의 이론을 제시하는 따위의 난폭한 짓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 도태에 있어서 주요 역할을 맡고 있는 몇 가지의 인자에 대하여서만이라도 정의하여 보고자 한다. 이 도태는 필연적으로 정신 자체의 레벨과 성능의 레벨이라는 두 개의 레벨에서 작용할 것이다.
어떤 사상의 성능 가치는 그것을 채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그 사상이 가져다주는 행동의 변화에 의거하고 있다. 어떤 사상을 채용한 인간 집단이 보다 많은 단결, 야심, 자신 등을 부여받는다고 하면, 이 사실로써 그 집단은 이러한 사상에 의해서 종래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할 힘을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힘 때문에 사상 자체의 지위 향상이 보증된다. 그 향상의 정도는, 사상이 얼마나 객관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반드시 필연적인 관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한 사회의 강력한 방패로 되어 있을 경우에 이 방패의 세기는 그 이데올로기의 구조 자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받아들여지고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상의 침투력과 그 성능을 발휘하는 힘과는 좀처럼 분리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침투력은 그 자체로써는 훨씬 분석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정신 속에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제구조ㅡ그 속에는 문화에 의하여 이미 침투되어 있던 여러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ㅡ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의 선천적 구조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선천적 구조를 동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고의 침투력을 가진 사상은 인간이 점할 지위를 내재적인 운명 ㅡ그 품에 안기면 인간의 불안은 가셔진다ㅡ 속에 지정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 P207

신화적 개체 발생과 형이상학적 개체 발생
인간의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한편으로는 진정시키면서 규율을 확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설명(신화적·종교적 설명)‘은 어느 것이나 ‘이야기(역사라는 의미도 된다)‘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체 발생적인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시적 신화는 거의 모두가 신적인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위업이 집단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되고, 집단의 사회 구조를 불가침의 전통이라는 기초 위에 구축하는 것이다. 역사는 개작되는 일이 없다. 위대한 종교는 모두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두 영감을 받은 예언자의 생애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예언자는 그 자신이 만물의 창시자는 아니더라도 만물의 창시자를 대표하며, 그를 위해 말하고 또 인간들의 역사를, 나아가서 인간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 중에서 유태·그리스도교는 그 역사주의적 구조로 보아 아마도 가장 ‘원시적‘일 것이다. 그것은 베드윈 부족의 위업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마침내 그 위업이 한 사람의 신성한 예언자에 의하여 풍부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이에 반하여 보다 고도로 분화되어 있으나 그 당초 형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개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월적 법칙인 업(業, 카르마)에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영혼의 역사인 것이다.
플라톤에서 헤겔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위대한 철학 체계는 모두 설명적임과 동시에 규범적인 개체 발생을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플라톤의 경우에는 개체 발생이 역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데아적인 형태가 점차적으로 부패하여 가는 것밖에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공화국‘에서 타임 머신을 운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나 마르크스에 있어서나 역사는 필연적이며 은혜를 베푸는 내재적 계획에 따라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당시 사람들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단지 그것이 인간의 해방을 약속한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개체 발생적 구조와 거기에 서술되어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에 대한 완전하며 상세한 설명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은 인류의 역사에 한정되어 있으며 과학이 갖는 확실성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정신이 요구하는 전면적 해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에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거기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가 하나의 영원한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결합되어야 했던 것이다.

물활론적 ‘구약‘과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과의 단절
만약 인간이 완전한 설명을 구하는 일이 선천적인 것이고, 또 그 설명이 결여된 데서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이 솟아난다는 것이 사실이며,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라는 것이 전역사 ㅡ자연의 계획서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정립함으로써 인간이 지니는 의의를 명백히 보여주는 역사ㅡ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면, 또 만약 이 ‘설명‘이라는 것이 진실하고 깊은 의미가 있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물활설적 전통 속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때에 비로소, 객관적 지식이 참다운 진실의 유일한 것으로서 사상의 왕국 속에 나타나기까지 수천 수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준엄하고 냉정한 사상은 어떠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으며 또 온갖 영적인 양식에의 욕망을 금하고 단념시키는 것이므로 도저히 선천적인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더 그것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인간성 자체 속에 용해되어 있던 수십만 년 이래의 전통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활설적 구약을 고발하고 이 귀중한 기반 대산에 차갑고 고독한 우주 속에서의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한 탐색을 뒤에 남겨두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에 동조하는 자에게서는 청교도적인 오만스러움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데, 대체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것이 위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단지 비범한 성능을 발휘할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공준을 기초로 하는 과학은 3세기 동안에 사회 안에서 그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것은 응용면에서의 이야기며 영혼 속까지 정복한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풍요성과 강력성 그리고 하려고만 들면 훨씬 큰 부와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과학 덕분에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종의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 최초의 ‘선택‘이 그 자손 전체의 미래를 구속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그 기원에 있어 무의식적이었던 과학적 응용의 선택은 문화의 진화로 하여금 일방 통행의 길을 돌진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주의는 이 도정의 행선이 틀림없이 인류의 비범한 개화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오늘날 우리의 앞길에는 암흑의 나락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발견하여 준 부와 힘을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이 사회는 과학이 갖다준 가장 심오한 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에는 거의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ㅡ 전언이란 새롭고 또 유일한 진실의 원천을 정의하는 일이며, 윤리의 기초의 전면적 재검토와 물활설적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을 요구하는 일이며, ‘구약‘을 결정적으로 폐기하는 일이며, 신약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논하는 일이었다. 현대 사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의 혜택으로 얻은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모든 부를 향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과학에 의하여 이미 붕괴되어 버린 낡은 가치 체계에 따라서 생활을 계속하고 그 체계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경험한 일이 없다. 원시 문화에 있어서나 고전 문학에 있어서나, 지식의 원천과 가치의 원천과는 물활설의 전통에 따라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식과 진실의 원천인 물활설의 전통을 포기하여 버리고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여 이 전통에 매달려서 자기의 수립을 기도하는 분열된 문명이 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서구 제국의 ‘자유주의‘ 사회는 그 도덕의 기초로서 유태·그리스도교적 종교성과 과학주의적 진보주의와 인간의 ‘타고난‘ 권리에의 신념과 공리적 실용주의를 혼합시킨 구토가 날 듯한 것을 아직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사회는 여전히 유물 변증법적 사관이라는 종교를 공언하고 있다. 그 정신적 구조는, 외양만은 자유주의 사회보다도 견고해 보이지만 지금은 그 강점이기도 하였던 경직성 때문에 도리어 이쪽이 더욱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이 체계들은 모두 물활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느 것이나 객관적 지식과 진실의 영역 밖에 있고 과학과 무연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적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체계들은 과학을 이용하려 하면서도 이것을 존중하거나 이에 봉사할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절연이 그토록 심하고 허위가 그토록 공공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양과 지성을 몸에 지니고 모든 창조의 원천인 그 가슴을 죄는 듯한 정신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절연과 허위에 번민하며 또 양심을 찢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다. 인류 중에 진화의 도상에 있는 사회와 문화적 책임을 지고 있거나 또는 장차 지게 될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은 도덕적·사회적 존재의 근원을 침식하고 있는 이러한 허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질환은 다소 막연히나마 진단을 내릴 수는 있다. 이 질환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과학 문명에 대한 증오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외포의 감정을, 적어도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혐오감이 공공연히 나타나는 것은 과학의 공업 기술적 부산물에 대해서다. 즉 폭탄, ‘자연‘ 파괴, 위협적인 인구 증가 등이다. 물론 공업 기술은 과학이 아니라든지, 자연 파괴에 의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은 공업 기술이 불충분하다는 것이지 그 과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든지, 인구의 폭발적 증대는 해마다 수백만 명의 유아가 죽음에서 구제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또다시 그들의 죽음을 방관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든지 여러 가지로 변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피상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질환의 징후와 그 뿌리깊은 원인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과학의 근원적인 전언에 대한 거절이 있다. 사람들이 품는 두려움은 신성 모독에의 또 가치에 대한 침해에의 두려움인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두려움이긴 하다. 과학이 가치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가치의 판단을 내리지 않으며 가치를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서 유물 변증법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물활설의 전통은 가치, 도덕, 의무, 권리, 금지의 기초를 신화적 내지는 철학적 개체 발생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이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언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의의와 함께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마침내 고래로부터의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의 완전한 고독을, 스스로의 근원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비로소 그는 마치 집시처럼 자기가 살아가야 할 우주의 가장자리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우주는 그의 음악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의 고뇌와 범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희망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가 죄를 판정할 것인가, 누가 선악을 이야기할 것인가? 전통적인 체계는 모두 윤리와 가치를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두고 있었다. 가치는 그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치 쪽에서 강요하여 온 것이며, 인간 쪽이 가치에 속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가치가 자기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가치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가치가 우주의 무관심한 허망 속으로 용해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현대인은 과학 쪽으로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에 대적하여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과학이 가지고 있는, 단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까지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똑똑히 지켜보려 하고 있다. - P211

가치와 지식
의지할 곳은 어딘가? 객관적 진실과 가치의 이론이 서로 무연하며 상호간에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을 영구히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단호히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현대 사상가는, 작가거나 철학자거나 과학자거나 간에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믿는 바로는 그러한 태도가 절대 다수의 인간에게 수용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ㅡ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계속 품게 하고 또 그것을 부채질할 뿐이다ㅡ 아주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주요한 이유가 두 가지 있다.
1.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치와 지식은 행동에 있어서나 담론에 있어서나 항상 필연적으로 서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특히 ‘참다운‘ 지식이라는 정의 그 자체가 끝까지 분석하여 간다면 윤리적 차원의 공준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두 가지 점에 대해서 각각 간단하게나마 부연할 필요가 있다. 윤리와 지식과는 행동 속에서 또 행동을 통해서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행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지식과 가치가 아울러 문제된다. 모든 행동은 윤리를 의미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에 봉사하거나 혹은 해를 입히거나 한다. 행동은 또한 가치를 선택하거나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행동을 일으킬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지식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행동은 지식의 두 개의 필요한 원천 중의 하나다.
물활설적 체계에 있어서는 윤리와 지식과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상호 침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활설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일을 일체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ㅡ 물활설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동일한 하나의 실재의 두 측면으로 보고 있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상정한 다음에 이것을 기초로 하여 구축한 사회 윤리 사상은, 그러한 구분 회피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을 해명하려고 할 경우에는 훨씬 조직적이며 확고한 형태로 나타난다.
참다운 지식에 필요한 조건으로서 객관성의 공준을 제시하였을 때부터 윤리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진실 자체의 탐구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지식 자체는 모든 가치 판단(‘인식론적 가치‘에 관한 판단을 제외하고)을 배제한다. 한편, 윤리는ㅡ본질적으로 비객관적인 것이므로ㅡ 영구히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공리로서 설정된 이 근본적인 구분이 궁극적으로는 과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즉 문화사 속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이 사건이 다른 문명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서구에서 생겨난 것은, 아마도 한 가지로는 ‘교회‘가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 사이의 근본적 구분을 인정하고 있었따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이 구분에 의해서 과학은 자기가 나갈 길을 탐구할 것을(성스러운 영역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용받았을 뿐 아니라, 이 구분 덕분에 인간의 정신은 객관성의 원리가 제시하는, 훨씬 근원적인 구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다른 몇 개의 종교의 경우에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과의 구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었던 것인데 이것은 서구인에게는 좀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힌두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성스러운 영역에 속해 있다. 거기에서는 ‘세속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해를 초월한 것이다.
이상은 지엽적인 일에 불과하다. 본도로 돌아가자. 객관성의 공준은 ‘구약‘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지식 판단과 가치 판단 사이의 모든 혼동을 금지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두 개의 범주는 행동 ㅡ 담론도 포함하여 ㅡ 속에서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원리에의 충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즉 일체의 담론 또는 행동은 그것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결부시키고는 있지만 양자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또 그 구분이 보유되어 있을 때에만(또는 그 정도에 따라서) 비로소 의미 있는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와 같이 정의할 경우에 진정이라는 말의 개념은 윤리와 지식이 서로 만나는 공통의 영역이 된다. 그 영역에서는 가치와 진실이 결합되면서도 혼동되지 않고, 이 양자의 공명을 깨닫고 있는 주의 깊은 사람에게 그 완전한 의의를 개시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진정하지 않은 담론 ㅡ 거기에서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혼합되어 얽혀 있다 ㅡ 의 도달점은 비록 무의식적이긴 해도 가장 유해한 넌센스와 가장 범죄적인 허위일 뿐이다.
특히 ‘정치적‘ 서설에 있어서는(나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서설‘[디스쿠르, 연설이라는 뜻도 있다]이라는 단어를 데카르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이 위험스런 혼합이 끊임없이 그리고 가장 조직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은 직업적 정치가뿐만이 아니다. 과학자 자신도 그들의 영역 밖으로 나가면 가치의 카테고리와 지식의 카테고리를 구별할 능력이 흔히 위험하리만큼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나 지금 서술한 것도 역시 지엽 말단의 일이었다. 지식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자.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불활설은 인식의 명제와 가치 판단과의 절대적 구별을 수립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사실 수립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우주‘ 속에 어떤 의도가 ㅡ 그것이 아무리 교묘히 은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ㅡ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구별을 세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에 반해서 객관적 체계에 있어서는 지식과 가치와의 혼동은 일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본질적인 점이며 지식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논리적인 결절점인 것이다) 이 혼동의 금지라고 하는 ‘제1계율‘은 객관적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은 아니며, 또 객관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ㅡ 그것은 도덕적 규칙이며 규율이다. 참다운 지식은 가치를 무시하지만 참다운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려면 가치 판단, 또는 오히려 가치에 대한 공리가 필요하다. 객관성의 공준을 참다운 지식의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지 지식에 의한 판단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공준 자체에 따르면 이 심판자적인 선택에 선행하는 ‘참다운‘ 지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떄문이다. 지식의 규범을 수립하기 위하여 객관성의 공준은 어떤 가치를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가치는 객관적 지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성의 공준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떤 윤리, 즉 지식의 윤리의 기초적 명제를 명료히 표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 P217

지식의 윤리
지식의 윤리에 있어서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원시적 가치의 윤리적 선택이다. 그 점에서 이 윤리는 모든 물활설적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활설적 윤리는 모두 저편에서 인간에게 강요하는 듯한 종교적 또는 ‘생래적‘인 내재적 법치겡 대한 ‘지식‘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의 윤리는 저편에서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 편이 이 윤리를 모든 담론 내지는 행동의 진정한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공리처럼 자기 자신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방법서설》은 어떤 규범적 인식론을 제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도덕적 성찰로서, 정신의 금욕으로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는 진정한 서설이 과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손에 절대적인 힘을 다시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힘들은 인간을 부유하게 함과 동시에 위협을 주고, 인간을 해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속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에 의해서 조직되고 과학의 소산으로 살고 있지만 또 그 반면에는 마약 중독 환자가 마약에 매달려 있듯이 과학에 매달리게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으로 강대한 것은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이 윤리 덕분이며, 또한 그것이 도덕적으로 약한 것은 지식 자체에 의하여 붕괴되어 버렸는데도 현대 사회가 아직도 의지하려는 낡은 가치 체계 때문이다. 이 모순은 죽음에 이르는 마물이다. 우리의 발밑에 나락이 입을 열고 있는데 그것을 파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순인 것이다. 현대 세계의 창조자인 지식의 윤리만이 현대 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일단 그것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오직 그것만이 현대 세계의 진화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 P222

지식의 윤리와 사회주의자의 이상
마지막으로 지식의 윤리는, 참다운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기초가 될, 이성적임과 동시에 단호한 이상주의적인 유일한 태도다. 19세기의 이 커다란 꿈은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 지금도 여전히 통절하게 살아남아 있다. 통절하다는 것은 이 이상이 입어온 숱한 배반 때문이며 또 이 이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범죄 때문이다. 이 영혼의 오저에서 발하여진 염원이 물활설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밖에는 그 철학적 이론을 발견할 수 없이 지내왔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아마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적 예언주의는 그 탄생 이래로 숱한 협위(=위협)를 품고 있었음은 용이하게 간취할 수가 있다. 과연 그러한 협위들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다른 수많은 물활설보다도 사적 유물론이 더 한층 가치의 카테고리와 지식의 카테고리와의 전면적 혼동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이비한 서술 속에서 역사 법칙을 ‘과학적‘으로 확립하였다고 선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만약 허무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면 이 법칙에 복종하는 이외에는 의지할 곳도,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단호히 이러한 환상을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유치하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조매라고도 할, 근본적으로 사이비한 이데올로기 위에 어떻게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 자신은 매우 진지하고 과학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유일한 희망은 1세기 동안에 걸쳐 그것을 지배하여 온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그것을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의 원천을 그리고 참으로 과학적인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도덕적 영감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과학 자체의 원천에서 구할 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그것은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고 지식을 자유 선택하며 그에 최고의 가치 ㅡ다른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며 그것을 보증하고 있는ㅡ를 부여한 윤리 속에서 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회적·정치적 제도의 기초로서, 즉 이러한 제도가 갖는 진정성과 가치를 측량하는 것으로서 지식의 윤리를 받아들인다면 이 윤리만이 훌륭히 우리를 좋은 사회로 인도해 줄 것이다. 사상, 지식, 창조 등의 초월적 ‘왕국‘의 방위와 확장과 풍부화를 지향하는 제도들이 이 윤리에 의해서 불가불(하지 않을수 없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왕국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으며 거기에서 인간은 물질의 구속으로부터도 물활설에의 거짓 예속으로부터도 점차 해방되어 마침내 진정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그를 지켜온 제도들은 인간이 왕국의 신민임과 동시에 창조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 가장 유례 없는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본질을 위하여 봉사해 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꿈은 아니다. 이 사상은 논리적으로 수미일관된 힘에 의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진정성의 탐구는 필연적으로 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구약은 깨어졌다. 인간은 마침내 자기가 이전에 그 속에서 우연히 출현하였던 무관심하며 광대 무변한 ‘우주‘ 속에서 단지 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의무는 어느 곳에도 쓰여져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왕국‘과 암흑의 나락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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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질문은 "어떻게 느끼십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였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점이야말로 사람들의 공통된 오해다. 국민투표와 선거는 언제나 인간의 느낌에 관한 것이지 이성적 판단에 관한 것이 아니다. 만약 민주주의가 이성적인 의사 결정의 문제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혹은 그 어떤 투표권을 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박식하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는 충분하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관한 한 확실히 그렇다. 브렉시트 투표가 있고 난 후에 저명한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을 포함한 영국 대중의 대다수는 (이 문제를 두고) 국민투표에서 투표하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면서, 그들에게는 경제학과 정치학의 필요한 배경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차라리 아인슈타인이 대수학을 맞게 풀었는지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조종사가 어느 활주로에 착륙해야 할지를 두고 승객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이 낫겠다."
그렇지만 좋든 나쁘든, 선거와 국민투표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게 아니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를 묻는 것이다. 느낌에 관한 한 아인슈타인과 도킨스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느낌이 신비롭고 심오한 ‘자유 의지’를 반영하고, 이 ‘자유 의지’가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이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자유롭다고 가정한다. 아인슈타인,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문맹의 가정부 또한 자유 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선거일에는 그녀의 느낌ㅡ투표로 표시되는ㅡ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계산된다.
느낌에 이끌리는 것은 유권자뿐 아니라 지도자도 해당된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탈퇴 캠페인을 이끈 지도자는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였다. 데이비드 캐머런이 사임한 후 고브는 처음에 존슨을 총리로 지지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고브는 존슨이 부적격자라고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다. 존슨의 기회를 날려버린 고브의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적인 정치적 암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고브는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느낌에 호소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정치 인생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무엇이 옳은 일인가? 너의 마음은 네게 뭐라고 하는가?’ 고브에 따르면, 그가 브렉시트를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운 이유도, 그때까지 동지였던 보리스 존슨의 등에 칼을 꽂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이 우두머리 자리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즉, 그의 마음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대한 이러한 의존은 자유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이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누군가가 인간의 마음을 해킹해서 조작하는 기술력을 얻게 되면, 민주 정치는 감정의 인형극으로 돌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 P82

개인의 느낌과 자유 선택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권위는 인간의 마음보다는 신법에서 오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자유보다 신의 말씀을 신성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불과 지난 수 세기 동안 권위의 원천은 천상의 신에게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이동했다.
조만간 권위는 다시 이동할지 모른다. 이번에는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말이다. 과거 신적 권위를 종교적 신화로 정당화한 것처럼 인간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은 자유주의 이야기였다. 따라서 다가오는 기술 혁명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바로 개인의 자유라는 생각의 기반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과학적 통찰이 우리 뇌와 몸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제시하는 견해는, 우리의 감정은 인간만의 어떤 독특한 영적 특성이 아니며 어떤 유의 ‘자유 의지’도 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 감정은 모든 포유류와 조류가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재빨리 계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생화학적 기제라고 말한다. 감정은 직관이나 영감, 자유가 아니라 계산에 기반을 둔 것이다.
원숭이나 쥐, 인간은 뱀을 보면 두려움이 일어난다. 곧바로 뇌 속의 수백만 개 뉴런이 관련 데이터를 계산해서 죽을 확률이 높다고 결론짓기 때문이다.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다른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인근 개체와의 짝짓기와 사회적 결속의 가능성과 그 외 다른 갈망하는 목적을 이룰 확률이 높다고 계산했을 때다. 분노나 죄책감, 용서 같은 도덕적 감정은 집단 협력이 가능하도록 진화한 신경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이 모든 생화학적 알고리즘은 수백만 년에 이르는 진화를 거치면서 연마된 것이다. 만약 어떤 고대의 선조가 실수를 했다면 이런 감정을 구성하는 유전자들은 다음 세대에 전수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감정은 합리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이 체화한 것이 진화적 합리성이다.
우리는 대체로 감정이 사실은 계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산의 과정이 자각의 문턱 훨씬 아래에서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존과 재생산의 확률을 계산하고 있는 뇌 속의 수백만 개 뉴런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뱀에 대한 공포나 성관계 상대의 선택 혹은 유럽연합에 관한 의견이 어떤 신비한 ‘자유 의지’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비록 자유주의가 우리의 감정이 자유 의지를 반영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감정에 의존해 살아가는 방식은 여전히 현실적으로 잘 통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에 마법 같거나 자유로운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무엇을 공부할지, 누구와 결혼할지, 어느 당에 투표할지 결정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감정이 우주에서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외부의 어떤 시스템도 나보다 내 감정을 더 잘 이해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었다. 스페인 종교 재판관이나 소련 KGB가 매 순간 나를 감시한다 해도, 그들에게 내 욕망과 선택을 형성하는 생화학적 과정을 해킹하는 데 필요한 생물학적 지식과 컴퓨팅 능력은 없었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내게 자유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내 의지는 주로 내부 힘들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었고, 이것은 외부에서는 아무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은밀한 내부 영역을 지배한다는 환상을 즐길 수 있었던 반면, 외부인들은 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어떻게 결정을 내리는지 실제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사람들에게 어떤 사제나 당 기관원의 지시보다 자기 마음을 따르라고 조언한 것은 옳았다. 하지만 조만간 컴퓨터 알고리즘은 인간의 감정보다 더 나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종교재판관과 KGB가 구글과 바이두에 길을 내줌에 따라 ‘자유 의지’는 신화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고, 자유주의는 현실적 이점을 잃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두 가지 혁명이 합쳐지는 지점에 와 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자들이 인간 신체, 특히 인간의 뇌와 감정의 신비를 해독하고 있다. 동시에 컴퓨터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유례없는 데이터 처리 능력을 선사하고 있다. 생명기술 혁명과 정보기술 혁명이 합쳐지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것은 내 감정을 나보다 훨씬 더 잘 모니터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권위는 아마도 인간에게서 컴퓨터로 이동할 것이다. 지금까지 접근 불가였던 나의 내부 영역을 제도와 기업, 정부 기관이 이해하고 조작하는 것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자유 의지에 대한 나의 환상은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의료 분야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료 결정을 내릴 때 근거로 삼는 것은 아프다거나 괜찮다는 우리의 느낌 혹은 주치의가 내리는 식견 있는 예측이 아니다. 우리 몸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하는 컴퓨터의 계산이다. 수십 년 내에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입력되는 생체측정 데이터를 토대로 우리의 건강을 쉴 새 없이 모니터할 것이다. 우리가 몸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 훨씬 전에,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독감이나 암,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이 발병하는 첫 순간부터 감지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의 독특한 체격과 DNA, 인성에 맞춰 처방된 적절한 치료법과 식단, 식이요법을 추천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늘 환자 신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몸 어딘가에는 늘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무언가 개선될 것이 있게 마련이다. 과거에는 몸에 고통을 느끼거나 절름발이처럼 눈에 보이는 장애로 고생하지 않는 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2050년이면 생체측정 센서와 빅데이터 알고리즘 덕분에 질병이 고통이나 장애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진단과 처방이 내려질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늘 어떤 ‘의료가 필요한 상태’에 놓이고, 이런저런 알고리즘 추천을 따르게 될 것이다. 거절하면 의료보험 효력이 정지되거나 상사가 당신을 해고할지도 모른다. 왜 당신이 고집 부린 대가를 그들이 지불해야 하나?
일반적 통계상 흡연이 폐암과 상관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21 그런 결과를 피하려면 인공지능 개선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만큼, 인간 의식을 증진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는 인간 의식을 연구하고 개발하기 위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인간 능력을 연구하고 개발할 때조차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장기적 필요에 따르기보다 주로 경제와 정치 시스템의 즉각적인 필요에 좌우된다. 나의 상사는 이메일에 되도록 빨리 답하기를 바라지만, 내가 음식을 맛보고 음미하는 능력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 결과 나는 식사 중에도 이메일을 확인하지만 나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능력은 잃어간다. 경제 시스템은 나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늘리고 다변화하는 쪽으로 나를 내모는 반면, 나의 연민을 확장하고 다변화할 동기는 조금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증권 거래소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고통의 깊은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축화한 다른 동물과 비슷하다. 우리는 온순한 젖소를 사육해서 엄청난 양의 우유를 생산하지만 이들은 다른 면에서 보면 야생 조상에 비해 훨씬 열등하다. 민첩하지도 않고 호기심도 떨어지고 기지도 모자란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데이터 처리 메커니즘 안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산하며, 아주 효율적인 칩으로 기능하는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젖소는 좀처럼 인간적인 잠재력을 극대화할 줄은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데는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터넷 연결 속도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한다. 앞으로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다운그레이드된 인간이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를 오용하여 자신과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흡연을 계속하는 것과, 생체측정 센서가 좌상부 폐에서 암세포가 17개 감지됐다고 구체적으로 경고하는 것을 듣고도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설령 당신은 센서를 무시할 의향이 있다 해도, 센서가 보험 대리점과 직장 매니저, 어머니에게 경보를 전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모든 질병들을 처리할 시간과 에너지가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십중팔구, 우리는 이런 문제 대부분을 다루는 데 적합해 보이는 건강 알고리즘에 지시만 내릴 수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알고리즘은 우리 스마트폰에 수신되는 주기적인 업데이트를 통해 "17개의 암세포가 감지돼 제거되었다"는 사실이나 알려줄 것이다. 건강 염려증이 있는 사람은 이런 업데이트들을 충실하게 읽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중 대다수는 컴퓨터에 성가시게 뜨는 바이러스 퇴치 통지문처럼 무시하고 말 것이다._자유 - P85

드라마
의료 분야에서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핵심 발명품은 생체 측정 센서인데 몸에 착용할 수도 있고 체내에 이식할 수도 있다. 생물학적 과정을 전자 정보로 전환해서 컴퓨터가 저장하고 분석할 수 있다는 장치다. 생체측정 데이터와 컴퓨팅 능력만 충분하면 외장 데이터 처리 시스템은 당신의 모든 욕망과 결정 그리고 의견까지 해킹할 수 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잘 모른다. 나는 스물한 살 때 비로소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부인하면서 몇 년을 살고 난 뒤였다. 동성애자 대부분이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동성애 남성 다수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 채 10대 시절을 겪는다. 이제 2050년이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자. 그때는 알고리즘이 모든 10대에게 그가 동성애/이성애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 (그리고 그 지점이 얼마나 가변적인지조차) 정확히 알려줄 수 있다. 아마 알고리즘은 매력적인 남성과 여성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주고 안구 움직임과 혈압, 뇌 활동을 추적한 다음, 5분 이내에 킨제이 척도상의 수치를 출력할 것이다. 그런 알고리즘이 있었다면 나도 수년간을 좌절감 속에 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당신은 개인적으로 그런 테스트를 해볼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에 당신은 미셸의 따분한 생일 파티에 친구들과 함께 있다가 누군가 이 멋진 새 알고리즘으로 돌아가면서 테스트를 해보자고 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다. (결과를 보려고, 그리고 그에 대해 한마디씩 하려고 모두 주변에 둘러서 있다.) 당신은 그 자리를 떠날 텐가?
당신이 그 자리를 떠난다 해도, 그 후로도 계속 자신과 친구로부터 숨는다 해도, 아마존이나 알리바바, 비밀경찰의 눈까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이 웹을 서핑하고 유튜브를 보고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읽을 때, 알고리즘은 용의주도하게 당신을 모니터하고 분석해서, 어떤 탄산음료를 당신에게 팔고 싶다면 셔츠를 입지 않은 소녀보다 웃통을 벗은 사내가 주인공인 광고를 사용하는 게 나을 거라고 코카콜라 측에 알려줄 것이다. 당신은 그런 사실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알 것이다. 그런 정보야말로 수십억의 가치가 있을 테니까.
이번에도 역시, 아마 모든 것이 공개돼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정보를 공유해서 좀 더 나은 추천을 받으려 할 것이고, 결국에는 알고리즘이 자신을 위한 결정까지 내려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것, 가령 어떤 영화를 볼지 결정하는 일 같은 것으로 시작된다. 친구들과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 아늑한 저녁을 보내려면 우선 무엇을 볼지 골라야 한다. 50년 전만 해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지금은 온디맨드on-demand 서비스 덕분에 시청할 수 있는 영화가 수천 편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의 의견 통일이 꽤 어려울 수 있다. 당신은 SF 스릴러를 좋아하는 반면, 잭은 로맨틱 코미디를 선호하고, 질은 프랑스 예술 영화를 추천한다. 결국 절충하다 보면 모두가 실망하는 그저 그런 B급 영화를 보게 되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알고리즘이 해결사가 될 수 있다. 당신과 친구들 각자가 과거에 재미있게 본 영화를 알고리즘에 알려주면, 통계에 근거한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알고리즘은 그 집단에 꼭 맞는 영화를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저급한 알고리즘은 속아 넘어가기 쉽다. 무엇보다 셀프리포팅은 사람들의 진짜 선호를 알려주는 척도로는 믿을 수 없기로 악명 높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어떤 영화를 걸작이라고 칭찬하는 것을 듣고, 나도 봐야겠다 싶어서 보다가 중간에 잠이 들었는데도, 교양 없는 속물처럼 보이기는 싫어서 모두에게 대단한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런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의심스런 셀프 리포트에 의존하는 대신, 알고리즘이 우리가 실제로 영화를 볼 때 나타나는 실시간 데이터를 수집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된다. 우선 알고리즘은 우리가 끝까지 본 영화와 도중에 중단한 영화를 모니터할 수 있다. 우리가 온 세상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야말로 사상 최고의 영화라고 말하긴 해도, 사실은 전반 30분을 넘긴 적이 없고 애틀란타가 불타는 장면은 실제로 본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리즘은 알 것이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현재 엔지니어들은 우리 눈과 얼굴 근육의 움직임을 토대로 인간 감정을 감지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다. 텔레비전에 카메라를 장착하면 그런 소프트웨어가 어떤 장면에서 우리가 웃고 슬퍼하고 지루해하는지 알 것이다. 그다음 그런 알고리즘을 생체측정센서에 연결하면 각 프레임이 우리 심장 박동과 혈압, 뇌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알 것이다. 가령 우리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을 관람하는 동안, 강간 장면에서는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성적 기미를 보였고, 빈센트가 우연히 마빈의 얼굴에 총을 쐈을 때는 웃으면서도 죄책감을 느꼈으며, 빅 카후나 버거에 관한 농담은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멍청해 보이지 않으려고 웃었다는 사실을 알고리즘은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억지로 웃을 때는, 진짜로 우스워서 웃을 때와는 다른 뇌 회로와 근육을 사용한다. 인간은 보통 그 차이를 감지할 수 없지만 생체측정 센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텔레비전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텔레tele’에서 나왔는데 ‘멀리’라는 뜻이다. 라틴어 ‘비지오visio’는 시야를 뜻한다. 원래 텔레비전은 우리가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기기로 인식됐다. 하지만 조만간 텔레비전은 멀리서부터 우리를 보이게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상상한 것처럼,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텔레비전도 우리를 감시할 것이다. 우리는 타란티노의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대부분을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넷플릭스나 아마존 혹은 티브이 알고리즘을 소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의 인성 유형과, 우리의 감정 유발 버튼을 누르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데이터들 덕분에 넷플릭스와 아마존은 기괴할 정도로 정확히 우리에게 맞는 영화를 골라줄 것이다. 나아가 우리를 위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까지 내려줄 것이다. 이를테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어디서 일해야 하는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도.
물론 아마존의 답이 늘 옳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데이터 부족,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 삶의 근본적인 무질서 때문에 알고리즘은 반복해서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마존이 완벽해야 할 필요는 없다. 평균적으로 우리 인간보다 낫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도 끔찍한 실수를 저지를 때가 많다. 데이터 부족과 (유전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 오류, 목표 설정 혼란과 인생의 무질서로 인한 고충도 인간이 알고리즘보다 훨씬 더 크게 겪는다.
당신은 알고리즘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을 열거하고 나서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코 알고리즘을 신뢰하지 않을 거라고 결론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모든 결점들을 나열한 후에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런 체제는 지지하려 들지 않을 거라고 결론짓는 것과 비슷하다. 윈스턴 처칠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정치 체제다, 다른 모든 체제를 제외하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그런 판단이 옳든 그르든 똑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즉, 알고리즘은 장애도 많지만 더 나은 대안이 없다.
인간의 의사 결정 방식에 대한 과학자들의 이해가 깊어질수록 알고리즘에 의존하고 싶은 유혹은 점점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의사 결정을 해킹하면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신뢰도는 더욱 커지고, 그와 동시에 인간의 감정은 점점 더 의심받게 될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인간의 운영 체계를 해킹하는 데 성공하면서 우리는 정밀 유도된 조작, 광고와 프로파간다의 융단폭격에 노출될 것이다. 마치 버티고vertigo(공간 정위 상실-옮긴이) 상태에 빠진 조종사가 자기 감각이 말하는 것은 다 무시한 채 오로지 기계만 믿어야 하듯이, 앞으로 알고리즘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우리의 의견과 감정을 조작하기란 너무나 쉬워질 수 있다.
어떤 나라와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마지못해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른바 자유 사회에서도 알고리즘은 다시 권위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경험에서 얻는 학습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이슈들에 대해 알고리즘을 신뢰하게 되는 반면,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은 잃어가면서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불과 20년 사이에 일어난 과정만 돌이켜봐도 알 수 있다. 이제 수십억 명이 의미 있고 믿을 만한 정보를 찾을 때 구글 검색 알고리즘을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로 신뢰하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구글한다’. 우리가 어떤 답을 찾을 때 구글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우리 자신의 정보 검색 능력은 갈수록 감퇴한다. 오늘날 이미 ‘진실’은 구글 검색의 최상위 결과와 동의어다.
알고리즘 의존의 심화는 우리의 신체 능력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공간 속 길 찾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구글에 주변 안내를 부탁한다. 교차로에 이르렀을 때 육감은 ‘좌회전’을 말하는데 구글 지도는 ‘우회전’을 지시할 수 있다. 처음에는 육감을 믿고 좌회전을 하지만 교통 체증에 막혀 중요한 미팅을 놓친다. 다음번에는 구글 말을 듣고 우회전해서 정각에 도착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구글을 신뢰하게 된다. 1~2년 이내에 구글 지도가 알려주는 것이라면 무조건 따른다. 그러다 스마트폰이 불통되면 속수무책이다.
2012년 3월 일본 관광객 세 명이 호주 연안의 작은 섬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가다가 그대로 태평양에 뛰어들었다. 운전을 했던 21세 유주 노다 씨는 나중에 자신은 GPS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GPS가 우리한테 그쪽으로 곧장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길로 안내해줄 거라고 계속 말하더군요. 그러다 꼼짝없이 빠졌지요." 그와 비슷하게 사람들이 GPS 지시만 믿고 차를 몰고 가다가 호수에 빠지거나 철거된 다리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길 찾기 능력은 근육과 같다. 사용하지 않으면 잃는다. 배우자나 직업을 고르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매년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면서 그만큼 어려운 결정이다. 부모와 친구, 교사 들로부터 압력을 받기 마련이다. 더구나 이들의 관심과 의견도 다 다르다. 여기에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환상까지 더해진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답잖은 소설, 정교한 광고 캠페인까지 가세하면서 판단은 더욱더 흐려지고 이리저리 흔들린다. 특히나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이유는 각각 다른 직업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데다, 자신의 장단점을 자신이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변호사로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압박감 속에서 나는 어떻게 일을 해나갈까? 나는 팀워크가 좋은 사람일까?
한 학생이 처음에 법대 진학을 선택한 이유가 사실은 자신의 역량을 정확히 모르는 데다, 변호사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훨씬 왜곡된 견해를 가졌기 때문일 수 있다(변호사가 되었다고 해서 온종일 극적인 연설을 하고 "이의 있습니다, 재판관님!"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그녀의 친구는 어릴 적 꿈을 이루려고 전문적인 발레를 공부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발레리나가 되는 데 필요한 골격을 갖추었거나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둘은 자신의 선택을 깊이 후회한다. 미래에는 그런 결정을 내릴 때 구글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구글은 내게 법대나 발레 학교에 가면 시간 낭비가 될 거라고, 하지만 뛰어난 (게다가 아주 행복한) 심리학자나 배관공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해줄 수 있을 것이다.
AI가 직업과 심지어 인간관계에 대해서까지 우리보다 더 나은 결정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성과 인생의 개념도 바뀌어야만 할 것이다. 인간은 삶을 의사 결정의 드라마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각 개인을 끊임없이 세상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자율적인 주체로 본다. 예술 작품ㅡ셰익스피어의 희곡이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든 할리우드의 조악한 코미디물이든ㅡ은 어떤 특별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영웅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사느냐 죽느냐? 아내의 말을 듣고 덩컨 왕을 죽일 것인가, 양심의 소리를 듣고 살려줄 것인가? 결혼은 콜린스 씨랑 할까, 다시 씨랑 할까? 마찬가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학에서도 초점은 의사 결정의 드라마에 맞춰진다. 그리하여 이렇게 주장한다. 영원한 구원이냐 지옥이냐는 당신의 올바른 선택에 달렸다고.
우리가 내려야 할 결정을 점점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생을 보는 우리 관점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현재 우리는 영화를 고를 때는 넷플릭스의 추천을, 길에서 좌/우회전을 선택할 때는 구글 지도를 신뢰한다. 하지만 무엇을 공부할지, 어디에서 일할지, 누구와 결혼할지를 선택할 때도 AI에 기대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은 더 이상 의사 결정의 드라마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민주 선거와 자유 시장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와 예술 작업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남편 카레닌 곁에 머물러야 할지, 돌진해 오는 브론스키 백작과 달아나야 할지 페이스북 알고리즘에 묻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혹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셰익스피어 희곡 속의 모든 결정적인 의사 결정을 구글 알고리즘이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햄릿과 맥베스는 훨씬 편안한 인생을 누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이란 정확히 어떤 인생일까? 그런 인생을 의미 있게 해줄 모델이 우리에게 있는가?
권위가 인간에게서 알고리즘으로 이동함에 따라, 우리는 더 이상 세계를 자율적인 개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분투하는 장으로 보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 대신 온 우주를 데이터의 흐름으로,, 생화학적 알고리즘과 다름없는 유기체로 보고, 인간의 우주적 소명이란 모든 것을 포괄하는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만든 다음 그 속으로 통합되는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이미 지금 우리는 그 전모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대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 속의 작은 칩이 되어가고 있다. 매일 나는 이메일과 트윗, 기사 들을 통해 수없이 많은 데이터 조각들을 빨아들이고, 그 데이터들을 처리하고, 더 많은 이메일, 트윗, 기사 들을 통해 새로운 조각들을 반송한다. 그 거대한 사물의 체계 속에서 나는 어디에 들어맞는지, 또 나의 데이터 조각들이 수십억의 다른 인간들과 컴퓨터들이 생산하는 조각들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정말 모른다. 알아낼 시간도 없다. 모든 이메일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 P90

하지만 현실에서 인공지능이 의식을 얻을 거라고 가정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능과 의식은 상이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 데 반해 의식은 고통, 기쁨, 사랑, 분노처럼 어떤 것을 느끼는 능력이다. 이 둘을 우리는 혼동하기 쉽다. 왜냐하면 인간과 다른 포유동물의 경우 지능이 의식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포유류는 느낌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컴퓨터가 문제를 푸는 방식은 아주 다르다. - P118

그런 결과를 피하려면 인공지능 개선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만큼, 인간 의식을 증진하는 데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행히도 현재 우리는 인간 의식을 연구하고 개발하기 위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인간 능력을 연구하고 개발할 때조차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장기적 필요에 따르기보다 주로 경제와 정치 시스템의 즉각적인 필요에 좌우된다. 나의 상사는 이메일에 되도록 빨리 답하기를 바라지만, 내가 음식을 맛보고 음미하는 능력에는 조금의 관심도 없다. 그 결과 나는 식사 중에도 이메일을 확인하지만 나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는 능력은 잃어간다. 경제 시스템은 나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늘리고 다변화하는 쪽으로 나를 내모는 반면, 나의 연민을 확장하고 다변화할 동기는 조금도 부여하지 않는다. 나는 증권 거래소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도, 고통의 깊은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축화한 다른 동물과 비슷하다. 우리는 온순한 젖소를 사육해서 엄청난 양의 우유를 생산하지만 이들은 다른 면에서 보면 야생 조상에 비해 훨씬 열등하다. 민첩하지도 않고 호기심도 떨어지고 기지도 모자란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데이터 처리 메커니즘 안에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생산하며, 아주 효율적인 칩으로 기능하는 길들여진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데이터-젖소는 좀처럼 인간적인 잠재력을 극대화할 줄은 모른다. 실제로 우리는 완전한 인간적 잠재력이 무엇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 정신을 탐구하는 데는 별로 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터넷 연결 속도와 빅데이터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집중한다. 앞으로 우리가 조심하지 않는다면, 다운그레이드된 인간이 업그레이드된 컴퓨터를 오용하여 자신과 세계에 재앙적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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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인간이 작업장에서는 AI와 경쟁할 수 없더라도 소비자로서는 늘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사회와 무관한 존재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래 경제가 우리를 소비자로서조차 필요한 존재로 여길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그 역할도 기계와 컴퓨터가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런 경제도 충분히 가능하다. 광산 기업이 철을 생산해서 로봇 기업에 팔고, 로봇 기업은 로봇을 만들어 광산 기업에 팔고, 다시 광산 기업은 더 많은 철을 생산하고, 이렇게 생산된 철은 다시 더 많은 로봇을 만드는 데 쓰이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런 기업은 은하계 멀리까지 성장하고 확장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고는 로봇과 컴퓨터뿐이다. 자신들의 생산물을 인간이 사주는 일조차도 필요하지 않다.
실제로 이미 컴퓨터와 알고리즘은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고객으로도 작동하고 있다. 가령, 증권거래소에서 알고리즘은 채권, 주식, 상품의 가장 중요한 매입자가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광고 사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객은 사람이 아닌 일개 알고리즘, 즉 구글 검색 알고리즘이다. 사람들은 이제 웹페이지를 디자인할 때 어떤 사람의 취향보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의 취향에 더 신경을 쓴다.
알고리즘에는 의식이 없는 게 확실하다. 인간 소비자와 전혀 달리 자신이 구매한 것을 즐길 수도 없고, 자신의 감각과 감정에 따라 구매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은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없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내부 계산과 내장된 선호를 기반으로 대상을 고른다. 이런 선호가 점점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규정할 것이다. 구글 검색 알고리즘은 아이스크림 판매자의 웹페이지 순위를 매기는 데 관한 한 대단히 정교한 취향을 갖고 있다. 가장 크게 성공하는 아이스크림 판매자는 가장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글 알고리즘이 최상위에 올려놓는 사람이다.
나는 이 사실을 직접 겪어봐서 안다. 책을 출간할 때 출판사는 내게 온라인 홍보에 쓸 짧은 글귀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출판사에는 그 분야의 특별한 전문가가 있어서 내가 써준 것을 구글 알고리즘의 취향에 맞춰 다듬는다. 이 전문가는 내가 쓴 문장을 검토한 후에 이렇게 말한다. "이 단어는 쓰지 마세요. 대신 저 단어를 쓰세요. 그러면 구글 알고리즘에서 주목을 더 많이 받을 테니까요." 우리는 알고리즘의 시선만 붙잡을 수 있다면 인간의 시선은 당연히 따라올 거라는 사실을 안다. - P69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보편 지원 구상 덕분에 2050년에는 빈곤층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전 지구에 불평등이 만연하고 사회적 이동성이 사라진 것에 극도로 분노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조작돼 있고, 정부는 초부유층에만 봉사하며, 미래는 자신과 자녀들에게 더욱 나빠질 거라고 느낄 것이다. - P77

호모 사피엔스는 만족을 위해서만 설계되지는 않았다. 인간의 행복은 객관적 조건보다는 우리 자신의 기대에 더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기대는 조건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의 조건도 포함된다. 상황이 좋아지면 기대는 높아지며, 그 결과 여건이 극적으로 좋아진 후에도 이전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보편 기본 지원이 2050년 평균인의 객관적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꽤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관적으로 더 만족하는 것과 사회적 불만을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 P77

그 목표를 진정으로 달성하려면 보편 기본 지원은 스포츠에서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른 의미 있는 추구에 의해 보완돼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실험이 일-이후 세계에서 만족스런 삶을 사는 방법으로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의 약 50퍼센트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경을 공부하고 종교 의식을 수행하는 데 삶을 바친다. 그들과 가족이 굶어 죽지 않는 비결은 흔히 부인들이 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에 부족함이 없도록 정부가 보조금과 무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그런 말이 생기기도 전’의 보편 기본 지원이다.
이 초정통파 유대교 남성들은 가난하고 직업도 없다. 하지만 설문조사를 해보면 삶의 만족도가 이스라엘 사회의 다른 어떤 분파보다 높게 나온다. 이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주는 결속력과 더불어, 성경 공부와 의례 수행에서 찾을 수 있는 깊은 의미 때문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로 가득한 대형 직물공장보다, 남성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공부하는 작은 방에서 더 큰 즐거움과 참여감과 통찰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삶의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상위권에 오르는 이유도 부분적으로 이런 무직의 가난한 사람들이 점수를 올려주기 때문이다. - P78

자유주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를 첫 번째 가치로 소중하게 여긴다. 모든 권위는 궁극적으로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며, 그것은 각 개인의 감정과 욕망, 선택으로 표현된다고 주장한다. 정치에서 자유주의는 유권자가 제일 잘 안다고 믿는다. 따라서 민주적인 선거를 옹호한다. 경제에서 자유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자유 시장 원리를 반긴다. 사적인 문제에서 자유주의는 자기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마음을 따르라고 권장한다. 다만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런 개인의 자유는 인권 속에 간직되어 있다._자유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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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주관적 시뮬레이션 과정에 의거하고 있다는 견해가 옳다면 인간의 이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 진화 과정에서 가공적인 상상상의 경험에 의하여 준비된 것이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짐에 있어 그 유효성ㅡ즉 그것이 뒤에까지 살아남는 가치다ㅡ이 도태에 의해 시험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먼 조상의 중추신경계에 깃들여 있던 시뮬레이션의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가 도달한 상태에까지 발전한 것은 구체적 경험에 의하여 확인된 인간의 적절한 표상 능력과 확실한 예견 능력에 의한 것이다. 아우스트랄란트로푸스나 피테칸트로푸스 나아가서는 크로마뇽인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이 다룰 수 있는 무기로 표(표범) 사냥이라도 나갈 경우에 주관적 모시 장치에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조로부터 계승한 선천적 논리 장치는 우리를 기만하는 일 없이 우리가 우주의 사상을 ‘이해‘하며ㅡ 즉 이들 사상을 표상적인 언어로 기술하며ㅡ 예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 요소가 시뮬레이트에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끊임없이 풍부해지는 예측 장치인 시뮬레이트는 발견과 창조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 주관적인 작용의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객관적 논리의 규칙을 정식화하기도 하고 수학과 같은 새로운 상징적 도구를 창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대사상가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수학이라는 존재가 조금도 경험의 힘을 입지 않고 자연을 그처럼 충실히 표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실제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에는 조금도 힘입고 있지 않지만 부지런히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든 경험으로 단련된 시뮬레이트에 모든 것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에 따라서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조립하고 있을 때에 실은 우리 조상들의 경험의 일체와 현실의 경험과를 조립시키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 P197

이원론적 환상과 정신의 존재
여기에 경계선이 있는 것이며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것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것을 넘어설 때까지는 우리의 활동 속에서 이원론이 계속 진실을 유지하는 것이다. 뇌라는 관념과 정신이라는 관념과는 17세기의 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실제 생활 체험 속에서 구별되고 있다. 객관적 분석에 의해서 우리 속에 있는 피상적인 이원론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원론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실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주관을 명백히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려 하거나 그것 없이 감정적·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여도 도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정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영혼 속에 비물질적인 ‘실체‘를 인정한다는 환상을 단념하는 일은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문화적 유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개인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풍부함·측량할 수 없는 깊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산과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라는 존재, 즉 자기에 대한 유일무이하며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P199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수십만 년 동안에 걸쳐서 문화적 진화가 신체상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동물의 경우 이상으로 인간의 경우에도 ㅡ 인간의 무한하며 고도한 자율성 때문에 ㅡ 행동이야말로 도태의 압력을 방향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이 주로 자동적이었던 단계를 지나 문화적으로 된 뒤로는 문화적 특징 자체가 유전 정보의 진화에 대하여 압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기까지의 일이며, 그 후로는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것과 유전 정보의 진화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 P204

현대 사회와 유전적 쇠퇴의 위험
현대 사회의 심층에서 이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거기에는 도태가 폐절되어 버리고 없다. 이 도태에는 다윈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스러운‘ 것은 이미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 속에서 도태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적자 생존‘이라는 사실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아이를 늘림으로써 ‘적자‘가 유전적으로 생존한다는 사실에 도태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능, 양심, 용기, 상상력 등은 확실히 현대 사회에 있어서 여전히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성공의 요인이지 유전적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그런데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유전적 성공뿐이다. 그러나 전혀 반대로 되어버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통계에 의하면 지능 지수(혹은 문화 수준)와 부부 사이의 아이들의 평균 인수와의 상관 관계는 마이너스다. 똑같은 통계가 한편으로는 부부의 지능 지수 사이에 높은 플러스의 상관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장 높은 유전적 포텐셜이 엘리트 쪽으로 흡수되고 그 엘리트는 상대적으로 자손을 만드는 일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도 신체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나 부적자의 배제는 자동적이며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춘기의 연령까지 살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들 유전적 장애자의 대부분이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연령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종의 쇠퇴 ㅡ자연 도태가 없어지면 쇠퇴는 불가피하다ㅡ를 지켜온 기구가 지식과 사회 윤리의 발달 덕분에 매우 중대한 결함을 지닌 경우 이외에는 거의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의 위험은 흔히 지적되어 온 것인데, 이에 대하여 분자 유전학의 최근의 진보는 기대할 수 있는 구제책을 때때로 제기하고 있다. 이 환상은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으로,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약간의 유전적 결함을 일시적으로 호전시킬 수는 있을 테지만, 단지 침해를 입은 개인에 관한 것에 불과하며 자손에 대해서까지는 불가능하다. 현대 분자유전학은 유전적 유산에 작용하여 새로운 특징을 추가하거나 유전적 ‘초인‘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희망의 공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 정보의 미시적 스케일은, 지금으로서는 ㅡ아마도 영구히ㅡ 그러한 조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 과학적인 환상을 잠시 덮어둔다면 인류를 ‘개량하는‘ 유일한 수단은 다만 깊이 생각한 다음에 엄격한 도태를 실행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러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비도태 또는 역도태라는 상태가 지배적인데, 이것이 위험을 수반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위험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일 뿐이다. 10 내지 15세대, 즉 수세기 후의 일이라 하여두자.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와는 또 다른 절실하고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P204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구 폭발이나 자연 환경의 파괴 또는 메가톤급의 핵의 위협이 아니고 훨씬 심각하며 중대한 질환, 즉 영혼의 질환에 대한 것이다. 관념 구성상의 진화 속에서 일어날 최대의 전기가 이 질환을 만들고 그것을 악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3세기 동안에 걸쳐 지식이 굉장히 발달하여 온 결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또 자기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하여 수만 년 동안 깊이 뿌리박고 있던 개념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영혼의 질환이라든지 메가톤의 위력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어떤 단순한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자연은 객관적인 것이고 참다운 지식은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맞춤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사상이다. 사상의 왕국 안에서도 이만큼 단순하고 또 명석한 사상이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지 10만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백일하에 나타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예컨대 중국 문명과 같은 몇 개의 최고 문명이 이 사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서구로부터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또한 그 서구에 있어서도 이 사상은 실용 위주의 기계 공학 속에 밀폐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마침내 두꺼운 껍질을 깨치고 풀려 나오기까지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서 갈릴레이, 데카르트, 베이컨까지의 2천5백여 년 간의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 모든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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