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도태
생물학자에게 있어 사상의 진화와 생물권의 진화를 비교하는 일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추상의 왕국‘이 생물권을 초월하고 있는 정도는 생물권이 비생물권을 초월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한층 클 것임에 틀림없지만, 사상은 생물에 특성의 몇 개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의 구조를 영속화하며 증식시키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사상은 생물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을 각각 융합, 재결합, 분리시킬 수가 있으며 더욱이 생물과 마찬가지로 진화한다. 그리고 이 진화에 있어서는 의심할 나위도 없이 도태가 커다란 역할을 담당한다. 나로서는 사상 도태의 이론을 제시하는 따위의 난폭한 짓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 도태에 있어서 주요 역할을 맡고 있는 몇 가지의 인자에 대하여서만이라도 정의하여 보고자 한다. 이 도태는 필연적으로 정신 자체의 레벨과 성능의 레벨이라는 두 개의 레벨에서 작용할 것이다.
어떤 사상의 성능 가치는 그것을 채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그 사상이 가져다주는 행동의 변화에 의거하고 있다. 어떤 사상을 채용한 인간 집단이 보다 많은 단결, 야심, 자신 등을 부여받는다고 하면, 이 사실로써 그 집단은 이러한 사상에 의해서 종래 이상으로 세력을 확장할 힘을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 힘 때문에 사상 자체의 지위 향상이 보증된다. 그 향상의 정도는, 사상이 얼마나 객관적 진실을 내포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반드시 필연적인 관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한 사회의 강력한 방패로 되어 있을 경우에 이 방패의 세기는 그 이데올로기의 구조 자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데올로기의 구조가 받아들여지고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상의 침투력과 그 성능을 발휘하는 힘과는 좀처럼 분리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침투력은 그 자체로써는 훨씬 분석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정신 속에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제구조ㅡ그 속에는 문화에 의하여 이미 침투되어 있던 여러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ㅡ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의 선천적 구조에도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선천적 구조를 동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고의 침투력을 가진 사상은 인간이 점할 지위를 내재적인 운명 ㅡ그 품에 안기면 인간의 불안은 가셔진다ㅡ 속에 지정함으로써 인간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 P207

신화적 개체 발생과 형이상학적 개체 발생
인간의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한편으로는 진정시키면서 규율을 확립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설명(신화적·종교적 설명)‘은 어느 것이나 ‘이야기(역사라는 의미도 된다)‘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개체 발생적인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시적 신화는 거의 모두가 신적인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위업이 집단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되고, 집단의 사회 구조를 불가침의 전통이라는 기초 위에 구축하는 것이다. 역사는 개작되는 일이 없다. 위대한 종교는 모두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며 모두 영감을 받은 예언자의 생애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예언자는 그 자신이 만물의 창시자는 아니더라도 만물의 창시자를 대표하며, 그를 위해 말하고 또 인간들의 역사를, 나아가서 인간들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 중에서 유태·그리스도교는 그 역사주의적 구조로 보아 아마도 가장 ‘원시적‘일 것이다. 그것은 베드윈 부족의 위업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마침내 그 위업이 한 사람의 신성한 예언자에 의하여 풍부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불교는 이에 반하여 보다 고도로 분화되어 있으나 그 당초 형태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개인의 운명을 지배하는 초월적 법칙인 업(業, 카르마)에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영혼의 역사인 것이다.
플라톤에서 헤겔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위대한 철학 체계는 모두 설명적임과 동시에 규범적인 개체 발생을 제시하고 있다. 확실히 플라톤의 경우에는 개체 발생이 역방향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데아적인 형태가 점차적으로 부패하여 가는 것밖에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는 ‘공화국‘에서 타임 머신을 운전하려 하였던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나 마르크스에 있어서나 역사는 필연적이며 은혜를 베푸는 내재적 계획에 따라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당시 사람들의 정신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은, 단지 그것이 인간의 해방을 약속한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개체 발생적 구조와 거기에 서술되어 있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역사에 대한 완전하며 상세한 설명에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은 인류의 역사에 한정되어 있으며 과학이 갖는 확실성을 가장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었다. 정신이 요구하는 전면적 해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에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거기에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역사가 하나의 영원한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결합되어야 했던 것이다.

물활론적 ‘구약‘과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과의 단절
만약 인간이 완전한 설명을 구하는 일이 선천적인 것이고, 또 그 설명이 결여된 데서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이 솟아난다는 것이 사실이며,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라는 것이 전역사 ㅡ자연의 계획서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위를 정립함으로써 인간이 지니는 의의를 명백히 보여주는 역사ㅡ에 대한 설명이라고 한다면, 또 만약 이 ‘설명‘이라는 것이 진실하고 깊은 의미가 있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물활설적 전통 속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이 때에 비로소, 객관적 지식이 참다운 진실의 유일한 것으로서 사상의 왕국 속에 나타나기까지 수천 수만 년이라는 긴 세월이 소요되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준엄하고 냉정한 사상은 어떠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으며 또 온갖 영적인 양식에의 욕망을 금하고 단념시키는 것이므로 도저히 선천적인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더 그것을 부채질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인간성 자체 속에 용해되어 있던 수십만 년 이래의 전통을 한꺼번에 쓸어버리려 하였다. 그것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활설적 구약을 고발하고 이 귀중한 기반 대산에 차갑고 고독한 우주 속에서의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한 탐색을 뒤에 남겨두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상에 동조하는 자에게서는 청교도적인 오만스러움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데, 대체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것이 위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단지 비범한 성능을 발휘할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공준을 기초로 하는 과학은 3세기 동안에 사회 안에서 그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그것은 응용면에서의 이야기며 영혼 속까지 정복한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풍요성과 강력성 그리고 하려고만 들면 훨씬 큰 부와 힘을 획득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과학 덕분에 얻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 종의 생물학적 진화에 있어서 최초의 ‘선택‘이 그 자손 전체의 미래를 구속하는 일이 있는 것처럼, 그 기원에 있어 무의식적이었던 과학적 응용의 선택은 문화의 진화로 하여금 일방 통행의 길을 돌진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19세기의 과학주의적 진보주의는 이 도정의 행선이 틀림없이 인류의 비범한 개화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에 반해서 오늘날 우리의 앞길에는 암흑의 나락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발견하여 준 부와 힘을 받아들여왔다. 그러나 이 사회는 과학이 갖다준 가장 심오한 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에는 거의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ㅡ 전언이란 새롭고 또 유일한 진실의 원천을 정의하는 일이며, 윤리의 기초의 전면적 재검토와 물활설적 전통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연을 요구하는 일이며, ‘구약‘을 결정적으로 폐기하는 일이며, 신약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논하는 일이었다. 현대 사회는 한편으로는 과학의 혜택으로 얻은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모든 부를 향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이 과학에 의하여 이미 붕괴되어 버린 낡은 가치 체계에 따라서 생활을 계속하고 그 체계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이와 같은 분열을 경험한 일이 없다. 원시 문화에 있어서나 고전 문학에 있어서나, 지식의 원천과 가치의 원천과는 물활설의 전통에 따라 혼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식과 진실의 원천인 물활설의 전통을 포기하여 버리고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하여 이 전통에 매달려서 자기의 수립을 기도하는 분열된 문명이 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였다. 서구 제국의 ‘자유주의‘ 사회는 그 도덕의 기초로서 유태·그리스도교적 종교성과 과학주의적 진보주의와 인간의 ‘타고난‘ 권리에의 신념과 공리적 실용주의를 혼합시킨 구토가 날 듯한 것을 아직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사회는 여전히 유물 변증법적 사관이라는 종교를 공언하고 있다. 그 정신적 구조는, 외양만은 자유주의 사회보다도 견고해 보이지만 지금은 그 강점이기도 하였던 경직성 때문에 도리어 이쪽이 더욱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튼 이 체계들은 모두 물활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어느 것이나 객관적 지식과 진실의 영역 밖에 있고 과학과 무연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적대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체계들은 과학을 이용하려 하면서도 이것을 존중하거나 이에 봉사할 생각은 하고 있지 않다. 절연이 그토록 심하고 허위가 그토록 공공연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교양과 지성을 몸에 지니고 모든 창조의 원천인 그 가슴을 죄는 듯한 정신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절연과 허위에 번민하며 또 양심을 찢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있다. 인류 중에 진화의 도상에 있는 사회와 문화적 책임을 지고 있거나 또는 장차 지게 될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생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영혼의 질환은 도덕적·사회적 존재의 근원을 침식하고 있는 이러한 허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질환은 다소 막연히나마 진단을 내릴 수는 있다. 이 질환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과학 문명에 대한 증오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외포의 감정을, 적어도 소외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혐오감이 공공연히 나타나는 것은 과학의 공업 기술적 부산물에 대해서다. 즉 폭탄, ‘자연‘ 파괴, 위협적인 인구 증가 등이다. 물론 공업 기술은 과학이 아니라든지, 자연 파괴에 의하여 드러나고 있는 것은 공업 기술이 불충분하다는 것이지 그 과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든지, 인구의 폭발적 증대는 해마다 수백만 명의 유아가 죽음에서 구제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또다시 그들의 죽음을 방관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든지 여러 가지로 변명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피상적인 논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질환의 징후와 그 뿌리깊은 원인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과학의 근원적인 전언에 대한 거절이 있다. 사람들이 품는 두려움은 신성 모독에의 또 가치에 대한 침해에의 두려움인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두려움이긴 하다. 과학이 가치를 침해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가치의 판단을 내리지 않으며 가치를 무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에서 유물 변증법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물활설의 전통은 가치, 도덕, 의무, 권리, 금지의 기초를 신화적 내지는 철학적 개체 발생에서 구하고 있었던 것인데 과학은 이 모든 것들을 파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언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의의와 함께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마침내 고래로부터의 꿈에서 깨어나 스스로의 완전한 고독을, 스스로의 근원적인 이상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비로소 그는 마치 집시처럼 자기가 살아가야 할 우주의 가장자리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우주는 그의 음악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의 고뇌와 범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희망에 대해서도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누가 죄를 판정할 것인가, 누가 선악을 이야기할 것인가? 전통적인 체계는 모두 윤리와 가치를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두고 있었다. 가치는 그에 속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치 쪽에서 강요하여 온 것이며, 인간 쪽이 가치에 속하여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가치가 자기만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가치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에 가치가 우주의 무관심한 허망 속으로 용해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현대인은 과학 쪽으로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에 대적하여 얼굴을 돌리는 것이다. 그는 이제 비로소 과학이 가지고 있는, 단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까지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을 똑똑히 지켜보려 하고 있다. - P211

가치와 지식
의지할 곳은 어딘가? 객관적 진실과 가치의 이론이 서로 무연하며 상호간에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을 영구히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단호히 용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대부분의 현대 사상가는, 작가거나 철학자거나 과학자거나 간에 그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믿는 바로는 그러한 태도가 절대 다수의 인간에게 수용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ㅡ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슴을 죄는 듯한 불안감을 계속 품게 하고 또 그것을 부채질할 뿐이다ㅡ 아주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주요한 이유가 두 가지 있다.
1.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치와 지식은 행동에 있어서나 담론에 있어서나 항상 필연적으로 서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특히 ‘참다운‘ 지식이라는 정의 그 자체가 끝까지 분석하여 간다면 윤리적 차원의 공준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 두 가지 점에 대해서 각각 간단하게나마 부연할 필요가 있다. 윤리와 지식과는 행동 속에서 또 행동을 통해서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행동이 일어남과 동시에 지식과 가치가 아울러 문제된다. 모든 행동은 윤리를 의미하고 있으며 어떤 가치에 봉사하거나 혹은 해를 입히거나 한다. 행동은 또한 가치를 선택하거나 선택하려 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모든 행동을 일으킬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지식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행동은 지식의 두 개의 필요한 원천 중의 하나다.
물활설적 체계에 있어서는 윤리와 지식과는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상호 침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물활설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일을 일체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ㅡ 물활설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동일한 하나의 실재의 두 측면으로 보고 있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상정한 다음에 이것을 기초로 하여 구축한 사회 윤리 사상은, 그러한 구분 회피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이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을 해명하려고 할 경우에는 훨씬 조직적이며 확고한 형태로 나타난다.
참다운 지식에 필요한 조건으로서 객관성의 공준을 제시하였을 때부터 윤리의 영역과 지식의 영역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진실 자체의 탐구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지식 자체는 모든 가치 판단(‘인식론적 가치‘에 관한 판단을 제외하고)을 배제한다. 한편, 윤리는ㅡ본질적으로 비객관적인 것이므로ㅡ 영구히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공리로서 설정된 이 근본적인 구분이 궁극적으로는 과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즉 문화사 속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이 사건이 다른 문명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서구에서 생겨난 것은, 아마도 한 가지로는 ‘교회‘가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 사이의 근본적 구분을 인정하고 있었따는 사실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된다. 이 구분에 의해서 과학은 자기가 나갈 길을 탐구할 것을(성스러운 영역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용받았을 뿐 아니라, 이 구분 덕분에 인간의 정신은 객관성의 원리가 제시하는, 훨씬 근원적인 구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다른 몇 개의 종교의 경우에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과의 구분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또 존재할 수도 없었던 것인데 이것은 서구인에게는 좀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힌두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성스러운 영역에 속해 있다. 거기에서는 ‘세속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해를 초월한 것이다.
이상은 지엽적인 일에 불과하다. 본도로 돌아가자. 객관성의 공준은 ‘구약‘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지식 판단과 가치 판단 사이의 모든 혼동을 금지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두 개의 범주는 행동 ㅡ 담론도 포함하여 ㅡ 속에서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원리에의 충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즉 일체의 담론 또는 행동은 그것이 두 개의 카테고리를 결부시키고는 있지만 양자의 구분이 명확해지고 또 그 구분이 보유되어 있을 때에만(또는 그 정도에 따라서) 비로소 의미 있는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와 같이 정의할 경우에 진정이라는 말의 개념은 윤리와 지식이 서로 만나는 공통의 영역이 된다. 그 영역에서는 가치와 진실이 결합되면서도 혼동되지 않고, 이 양자의 공명을 깨닫고 있는 주의 깊은 사람에게 그 완전한 의의를 개시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진정하지 않은 담론 ㅡ 거기에서는 두 개의 카테고리가 혼합되어 얽혀 있다 ㅡ 의 도달점은 비록 무의식적이긴 해도 가장 유해한 넌센스와 가장 범죄적인 허위일 뿐이다.
특히 ‘정치적‘ 서설에 있어서는(나는 여기에서도 여전히 ‘서설‘[디스쿠르, 연설이라는 뜻도 있다]이라는 단어를 데카르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이 위험스런 혼합이 끊임없이 그리고 가장 조직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은 직업적 정치가뿐만이 아니다. 과학자 자신도 그들의 영역 밖으로 나가면 가치의 카테고리와 지식의 카테고리를 구별할 능력이 흔히 위험하리만큼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나 지금 서술한 것도 역시 지엽 말단의 일이었다. 지식의 원천으로 되돌아가자.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불활설은 인식의 명제와 가치 판단과의 절대적 구별을 수립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사실 수립할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우주‘ 속에 어떤 의도가 ㅡ 그것이 아무리 교묘히 은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ㅡ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상, 그러한 구별을 세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에 반해서 객관적 체계에 있어서는 지식과 가치와의 혼동은 일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본질적인 점이며 지식과 가치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논리적인 결절점인 것이다) 이 혼동의 금지라고 하는 ‘제1계율‘은 객관적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객관적인 것은 아니며, 또 객관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ㅡ 그것은 도덕적 규칙이며 규율이다. 참다운 지식은 가치를 무시하지만 참다운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려면 가치 판단, 또는 오히려 가치에 대한 공리가 필요하다. 객관성의 공준을 참다운 지식의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지 지식에 의한 판단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공준 자체에 따르면 이 심판자적인 선택에 선행하는 ‘참다운‘ 지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기 떄문이다. 지식의 규범을 수립하기 위하여 객관성의 공준은 어떤 가치를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그 가치는 객관적 지식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성의 공준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떤 윤리, 즉 지식의 윤리의 기초적 명제를 명료히 표현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 P217

지식의 윤리
지식의 윤리에 있어서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원시적 가치의 윤리적 선택이다. 그 점에서 이 윤리는 모든 물활설적 윤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물활설적 윤리는 모두 저편에서 인간에게 강요하는 듯한 종교적 또는 ‘생래적‘인 내재적 법치겡 대한 ‘지식‘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식의 윤리는 저편에서 인간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 편이 이 윤리를 모든 담론 내지는 행동의 진정한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공리처럼 자기 자신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방법서설》은 어떤 규범적 인식론을 제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도덕적 성찰로서, 정신의 금욕으로서 읽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에는 진정한 서설이 과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사람들의 손에 절대적인 힘을 다시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힘들은 인간을 부유하게 함과 동시에 위협을 주고, 인간을 해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속시킬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에 의해서 조직되고 과학의 소산으로 살고 있지만 또 그 반면에는 마약 중독 환자가 마약에 매달려 있듯이 과학에 매달리게 되어버렸다. 현대 사회가 물질적으로 강대한 것은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이 윤리 덕분이며, 또한 그것이 도덕적으로 약한 것은 지식 자체에 의하여 붕괴되어 버렸는데도 현대 사회가 아직도 의지하려는 낡은 가치 체계 때문이다. 이 모순은 죽음에 이르는 마물이다. 우리의 발밑에 나락이 입을 열고 있는데 그것을 파들어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순인 것이다. 현대 세계의 창조자인 지식의 윤리만이 현대 사회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이며 또 일단 그것을 이해하여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오직 그것만이 현대 세계의 진화를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 P222

지식의 윤리와 사회주의자의 이상
마지막으로 지식의 윤리는, 참다운 사회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기초가 될, 이성적임과 동시에 단호한 이상주의적인 유일한 태도다. 19세기의 이 커다란 꿈은 젊은이들의 영혼 속에 지금도 여전히 통절하게 살아남아 있다. 통절하다는 것은 이 이상이 입어온 숱한 배반 때문이며 또 이 이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범죄 때문이다. 이 영혼의 오저에서 발하여진 염원이 물활설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밖에는 그 철학적 이론을 발견할 수 없이 지내왔다는 사실은 비극적인 일이지만 아마도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각한 사적 예언주의는 그 탄생 이래로 숱한 협위(=위협)를 품고 있었음은 용이하게 간취할 수가 있다. 과연 그러한 협위들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다른 수많은 물활설보다도 사적 유물론이 더 한층 가치의 카테고리와 지식의 카테고리와의 전면적 혼동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바로 이 혼동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이비한 서술 속에서 역사 법칙을 ‘과학적‘으로 확립하였다고 선언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만약 허무 속에 빠져들고 싶지 않다면 이 법칙에 복종하는 이외에는 의지할 곳도, 의무도 없다는 것이다.
단호히 이러한 환상을 단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유치하고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조매라고도 할, 근본적으로 사이비한 이데올로기 위에 어떻게 진정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들 자신은 매우 진지하고 과학에 의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유일한 희망은 1세기 동안에 걸쳐 그것을 지배하여 온 이데올로기의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그것을 전면적으로 포기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의 원천을 그리고 참으로 과학적인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의 도덕적 영감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것은 과학 자체의 원천에서 구할 수밖에는 없지 않을까? 그것은 지식의 기초를 형성하고 지식을 자유 선택하며 그에 최고의 가치 ㅡ다른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며 그것을 보증하고 있는ㅡ를 부여한 윤리 속에서 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회적·정치적 제도의 기초로서, 즉 이러한 제도가 갖는 진정성과 가치를 측량하는 것으로서 지식의 윤리를 받아들인다면 이 윤리만이 훌륭히 우리를 좋은 사회로 인도해 줄 것이다. 사상, 지식, 창조 등의 초월적 ‘왕국‘의 방위와 확장과 풍부화를 지향하는 제도들이 이 윤리에 의해서 불가불(하지 않을수 없어) 형성되는 것이다. 이 왕국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으며 거기에서 인간은 물질의 구속으로부터도 물활설에의 거짓 예속으로부터도 점차 해방되어 마침내 진정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그를 지켜온 제도들은 인간이 왕국의 신민임과 동시에 창조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그 가장 유례 없는 그리고 가장 귀중한 본질을 위하여 봉사해 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아마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러나 지리멸렬한 꿈은 아니다. 이 사상은 논리적으로 수미일관된 힘에 의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진정성의 탐구는 필연적으로 이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구약은 깨어졌다. 인간은 마침내 자기가 이전에 그 속에서 우연히 출현하였던 무관심하며 광대 무변한 ‘우주‘ 속에서 단지 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의무는 어느 곳에도 쓰여져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왕국‘과 암흑의 나락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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