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주관적 시뮬레이션 과정에 의거하고 있다는 견해가 옳다면 인간의 이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그 진화 과정에서 가공적인 상상상의 경험에 의하여 준비된 것이 구체적 행동으로 옮겨짐에 있어 그 유효성ㅡ즉 그것이 뒤에까지 살아남는 가치다ㅡ이 도태에 의해 시험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먼 조상의 중추신경계에 깃들여 있던 시뮬레이션의 능력이 호모 사피엔스가 도달한 상태에까지 발전한 것은 구체적 경험에 의하여 확인된 인간의 적절한 표상 능력과 확실한 예견 능력에 의한 것이다. 아우스트랄란트로푸스나 피테칸트로푸스 나아가서는 크로마뇽인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가, 그들이 다룰 수 있는 무기로 표(표범) 사냥이라도 나갈 경우에 주관적 모시 장치에 틀림이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조로부터 계승한 선천적 논리 장치는 우리를 기만하는 일 없이 우리가 우주의 사상을 ‘이해‘하며ㅡ 즉 이들 사상을 표상적인 언어로 기술하며ㅡ 예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필요한 정보 요소가 시뮬레이트에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서 끊임없이 풍부해지는 예측 장치인 시뮬레이트는 발견과 창조의 장치이기도 하다. 그 주관적인 작용의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객관적 논리의 규칙을 정식화하기도 하고 수학과 같은 새로운 상징적 도구를 창조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대사상가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수학이라는 존재가 조금도 경험의 힘을 입지 않고 자연을 그처럼 충실히 표상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는데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실제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경험에는 조금도 힘입고 있지 않지만 부지런히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든 경험으로 단련된 시뮬레이트에 모든 것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적 방법에 따라서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조립하고 있을 때에 실은 우리 조상들의 경험의 일체와 현실의 경험과를 조립시키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 P197

이원론적 환상과 정신의 존재
여기에 경계선이 있는 것이며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것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것을 넘어설 때까지는 우리의 활동 속에서 이원론이 계속 진실을 유지하는 것이다. 뇌라는 관념과 정신이라는 관념과는 17세기의 인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실제 생활 체험 속에서 구별되고 있다. 객관적 분석에 의해서 우리 속에 있는 피상적인 이원론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원론은 우리의 존재 자체와 실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주관을 명백히 이해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하려 하거나 그것 없이 감정적·도덕적으로 살아가고자 하여도 도로에 그치고 말 것이다. 도대체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누가 정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영혼 속에 비물질적인 ‘실체‘를 인정한다는 환상을 단념하는 일은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적·문화적 유산과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개인적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복잡성·풍부함·측량할 수 없는 깊이 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산과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라는 존재, 즉 자기에 대한 유일무이하며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인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P199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수십만 년 동안에 걸쳐서 문화적 진화가 신체상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동물의 경우 이상으로 인간의 경우에도 ㅡ 인간의 무한하며 고도한 자율성 때문에 ㅡ 행동이야말로 도태의 압력을 방향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동이 주로 자동적이었던 단계를 지나 문화적으로 된 뒤로는 문화적 특징 자체가 유전 정보의 진화에 대하여 압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시기까지의 일이며, 그 후로는 문화적 진화의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그것과 유전 정보의 진화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렸다. - P204

현대 사회와 유전적 쇠퇴의 위험
현대 사회의 심층에서 이 분리가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거기에는 도태가 폐절되어 버리고 없다. 이 도태에는 다윈적인 의미에서의 ‘자연스러운‘ 것은 이미 하나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사회 속에서 도태가 아직도 작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적자 생존‘이라는 사실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현대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아이를 늘림으로써 ‘적자‘가 유전적으로 생존한다는 사실에 도태가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능, 양심, 용기, 상상력 등은 확실히 현대 사회에 있어서 여전히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 성공의 요인이지 유전적 성공의 요인은 아니다. 그런데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유전적 성공뿐이다. 그러나 전혀 반대로 되어버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통계에 의하면 지능 지수(혹은 문화 수준)와 부부 사이의 아이들의 평균 인수와의 상관 관계는 마이너스다. 똑같은 통계가 한편으로는 부부의 지능 지수 사이에 높은 플러스의 상관 관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장 높은 유전적 포텐셜이 엘리트 쪽으로 흡수되고 그 엘리트는 상대적으로 자손을 만드는 일을 자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도 신체적으로나 지적인 면에서나 부적자의 배제는 자동적이며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춘기의 연령까지 살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들 유전적 장애자의 대부분이 자손을 만들 수 있는 연령까지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종의 쇠퇴 ㅡ자연 도태가 없어지면 쇠퇴는 불가피하다ㅡ를 지켜온 기구가 지식과 사회 윤리의 발달 덕분에 매우 중대한 결함을 지닌 경우 이외에는 거의 작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상의 위험은 흔히 지적되어 온 것인데, 이에 대하여 분자 유전학의 최근의 진보는 기대할 수 있는 구제책을 때때로 제기하고 있다. 이 환상은 일부의 학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으로,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약간의 유전적 결함을 일시적으로 호전시킬 수는 있을 테지만, 단지 침해를 입은 개인에 관한 것에 불과하며 자손에 대해서까지는 불가능하다. 현대 분자유전학은 유전적 유산에 작용하여 새로운 특징을 추가하거나 유전적 ‘초인‘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희망의 공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전 정보의 미시적 스케일은, 지금으로서는 ㅡ아마도 영구히ㅡ 그러한 조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 과학적인 환상을 잠시 덮어둔다면 인류를 ‘개량하는‘ 유일한 수단은 다만 깊이 생각한 다음에 엄격한 도태를 실행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그러한 수단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선진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비도태 또는 역도태라는 상태가 지배적인데, 이것이 위험을 수반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위험이 매우 중대하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일 뿐이다. 10 내지 15세대, 즉 수세기 후의 일이라 하여두자.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와는 또 다른 절실하고 중대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 P204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구 폭발이나 자연 환경의 파괴 또는 메가톤급의 핵의 위협이 아니고 훨씬 심각하며 중대한 질환, 즉 영혼의 질환에 대한 것이다. 관념 구성상의 진화 속에서 일어날 최대의 전기가 이 질환을 만들고 그것을 악화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3세기 동안에 걸쳐 지식이 굉장히 발달하여 온 결과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또 자기와 우주와의 관계에 대하여 수만 년 동안 깊이 뿌리박고 있던 개념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마음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영혼의 질환이라든지 메가톤의 위력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어떤 단순한 사상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자연은 객관적인 것이고 참다운 지식은 논리와 경험을 조직적으로 맞춤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사상이다. 사상의 왕국 안에서도 이만큼 단순하고 또 명석한 사상이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지 10만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백일하에 나타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예컨대 중국 문명과 같은 몇 개의 최고 문명이 이 사상을 모르고 지내오다가 서구로부터 처음으로 배웠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또한 그 서구에 있어서도 이 사상은 실용 위주의 기계 공학 속에 밀폐되어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마침내 두꺼운 껍질을 깨치고 풀려 나오기까지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서 갈릴레이, 데카르트, 베이컨까지의 2천5백여 년 간의 세월이 필요하였던 것은 어찌된 일일까? 이 모든 것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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