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9 외계 행성에 사는 지적 생물의 생김새가 지구인을 닮았을 가능성은 거의 0이라고 나는 믿는다. 지구의 경우를 보건대 유전적 다양성은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 유전자들의 선택 과정도 따지고 보면 우연성을 동반하는 환경적 요인들에 따라 좌우된다. 그렇다면 외계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우발적 사건들과 그곳 환경을 지배하는 우연적 요인들이 어떻게 지구에서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외계인과 지구인의 외형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이다. 형태는 비록 우리와 다를지라도 지적 생명 자체는 분명 외계에 존재할 것이다. 그들 역시 뉴런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스위치 소자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뉴런이 작동하는 원리는 우리의 뉴런과 다를 수 있다. 우리의 뉴런은 상온에서 작동하는 유기체로 돼 있지만 그들의 ‘뉴런‘은 아주 낮은 온도에서 작동하는 초전도 소자일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그들은 우리보다 1000만 배나 더 빠른 속도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외계인의 ‘뉴런‘은 물리적으로 서로 붙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뉴런과 뉴런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더라도 전파 신호를 통한 상호 교신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적 개체 하나가 여러 개의 유기체에 분산돼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분신들이 전파 교신을 통해 서로를 연결하여 하나의 총체적 개체를 이루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지구상에서 실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산적 존재를 가능케 하는 매체가 반드시 유기체일 필요도 없다. 심지어 행성 여러 개에 분산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총체적 지적 자아가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그 자아가 자기의 분신들을 사방에 흩어 놓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때 분신 하나하나는 총체적 자아와 전파를 이용하여 정보와 생각을 교환함으로써 총체성 유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P568

570 만약 우리가 그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머릿속에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지식과 정보가 많이 들어 있을 것이다. 반대의 상황도 상상할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외계 생물들도 ㅡ비록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진화된 존재라고 하더라도ㅡ 우리에게 큰 흥미를 가질 것임에 틀림이 없다. 지구인들은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두뇌는 어떤 구조이며 진화해 온 과정과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고 그들 자신도 우리에 대하여 많은 것을 궁금해 할 것이다. - P570

577 결국 우리는 지구라는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물질 진화의 산물이다. 150억 년의 긴 세월을 거쳐 결국 물질은 의식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의식의 산물인 지능은 인간에게 무서운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이 자기 파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현명한 존재라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파국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어서 지구를 모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하나의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돼야 할 것이다. - P577

581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이 광막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현재 이들의 항해 속도는 꿈 속의 달리기와 같이 한량없이 느린 편일 것이다. - P581

581 은하수 은하에는 지구보다 나이가 수백만 년 더 된 행성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다. 지구보다 심지어 수십억 년 이상 나이를 먹은 행성들도 상당수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가 이 행성들에서 온 여행객의 방문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태어난 지 벌써 수십억 년이 지났다. 그동안 외계 문명권으로부터의 지구 방문이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믿기에는 지구의 나이 45억 년은 너무 길다. - P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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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렇다면 막다른 골목이 아닌, 우리를 무한한 잠재력의 세계로 이끌 열린 통로는 과연 무엇일까? ‘이 모든 것들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의 신비에 대해 지금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대인들이 제시한 해답을 포함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실들을 종합해 봐도, 우리는 아직 그 대답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바로 이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열린 통로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런 마음 자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줄 새로운 사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설령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지금 알고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 P52

53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시대들을 떠올려 보면, 하나같이 사람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과 지나친 독단주의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머지, 다른 사람들 또한 자신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고는 그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명백히 모순되는 행동을 하곤 했다. - P53

53 지난번 강연에서도 언급했지만, 오늘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난 역사 속에서 여러 번 경험했듯이 우리는 매우 무지하며 우리가 가진 모든 해답은 불확실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인정할 때 인류는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향해 계속 뻗어 나갈 수 있는 열린 통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올바른 도덕적 가치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아직 그 해답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 P53

61 무신론자인 나와 과학자 동료들을 (모든 과학자들이 다 무신론자는 아니다) 신을 믿는 동료들과 비교해 봤을 때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도덕적 감성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인간성과 같은 문제들은 종교인이나 비종교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가 운행되는 원리와 도덕적 가치관 사이에는 일종의 독립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P61

61-2 실제로 과학은 종교와 관련이 깊은 사상이나 주장에 영향을 미치지만(우주 탄생의 기원이라든가 진화론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옮긴이), 종교의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나는 믿는다. 종교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온갖 종류의 질문들에 친절히 답을 해 준다. 그중에서도 종교가 가지는 세 가지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첫째, 종교는 우리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디서 왔는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신은 누구인지, 신의 성격은 어떠한지 등에 대해 알려준다. 이것을 종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두 번째로는, 종교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종교적인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가치관에서 일반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는 얘기다. 이를 종교의 도덕적인 측면이라고 부르겠다.
끝으로, 종교는 선한 행동을 하도록 감화inspiration시킨다. 사람들은 나약하다. 옳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양심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심지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교의 감화가 필요하다. 종교의 가장 강력한 측면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감화적인 기능이다. 덧붙여 종교는 예술을 포함해 다른 많은 인간 활동에도 감화와 영감을 제공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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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7 모든 문명이 예술 영역에 있어 독특한 양식을 갖는 일이 허락된다면 양식의 본질인 질적 독자성이 각 문명의 모든 부분과 기관, 제도, 활동 속에는 스며들지 않고 예술 영역에만 나타날 수 있는가를 조사해야만 한다. 이 방향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문명으로 말미암아 특히 중점을 두는 활동 분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헬라스 문명은 인간의 삶을 심미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뚜렷한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본래 심미적으로 미라는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 어의 ‘카로스‘라는 형용사가 도덕적인 ‘선‘을 나타내는 데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인도 문명과 그 ‘자식 문명‘인 힌두 문명은 주로 종교적인 견지에서 인생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분명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유럽 문명은 어떤가 하면, 서유럽 문명 자신의 경향 내지는 편향을 쉽게 발견한다. 말할 나위도 없이 그것은 기계 중시의 경향, 정교한 물적·사회적 ‘태엽 장치‘ㅡ자동차나 손목시계나 폭탄과 같은 물적 기관과, 의회 제도나 사회 보장 제도나 군사 동원 계획 같은 사회적 잠재력 기관ㅡ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연 과학의 여러 발견을 물질적인 목적에 응용하는 일에 관심과 노력과 재능을 집중하는 경향이다.
더구나 이 경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이상으로 예부터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유럽인들은 소위 ‘기계 시대‘의 훨씬 전부터 다른 문명의 교양있는 엘리트로부터 혐오해야 할 물질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역사가가 된 비잔틴의 왕녀 안나 콤네나는 11세기경의 우리 선조를 그렇게 보았고,서유럽 사회의 신예 무기였던 정교한 십자군의 석궁을 공포와 경멸이 뒤섞인 눈길로 보았다. 언제나 재빨리 살해 도구가 발명되는 일이 상례이지만, 이 석궁 역시 중세 서유럽 인의 기계 애용 경향을 누르고 먼저 발명되었다. 전쟁에 비해 매력이 뒤떨어지는 평화적 기술을 적용한 걸작인 ‘태엽 장치‘가 발명되기 수세기 전에 발명되었던 것이다.
근대에 서유럽에 있어 몇 사람의 저술가, 특히 슈펭글러가 이 이질적인 문명의 ‘특성‘이란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그 논의는 냉정한 진단을 일탈하여 마음대로 공상으로 달리고 있다.
따라서 어떤 종류의 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증되었지만, 만일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면서 더 중요한 사실ㅡ그 인간의 생활과 제도에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다양성은 밑바닥에 숨어 있는 동일성을 해치는 일 없이, 그 표면을 덮고 있는 피상적인 현상이라는 사실ㅡ을 간과한다면 겉과 속의 비례 감각을 상실하여 혼돈의 위험에 빠질 것이다. - P306

310-1 세계 문명 쇠퇴의 내적 특징은 이미 앞서 정의하였다. 그것은 미개인 수준에서 어떤 종류의 초인간적 생활의 높이에 오르려는 대담한 계획의 실패인 것이며, 우리는 이 장거하고 더없이 거대해 보이는 계획을 실천하는 과정 중에 일어나는 위험을 갖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것을 동반자가 산정의 새로운 휴식 장소인 암반에 이르지도 못한 채 자신이 막 출발한 암반 위에 떨어져 추락사하거나 그 위에서의 죽음과 다름없는 보기 흉한 사태에 비유했다. 다시 쇠퇴의 특징을 비물질적인 면으로 설명하면, 이것은 창조적 개인이나 소수자의 정신에서 창조력이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조력이 상실되면 이러한 사람들은 비창조적 대중의 정신을 감화시킬 수 있는 신통력을 빼앗겨 버린다. 창조가 행해지지 않는 곳에는 미메시스(모방)도 행해지지 않는다. 피리 부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이미 마력을 잃어 군중의 발을 춤추게 할 수 없다. 만약에 흥분하고 당황하여, 훈련 하사관 또는 노예 사역자로 변신하면, 이미 이제까지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끌고 갈 수 없어진 민중을 완력으로 누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더 확실하고 재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번복하는 꼴이 된다. 추종자들은 신묘한 음악이 그쳤기에 춤추는 발이 무디어지고 정지하였을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회초리가 자극을 하니 추종자들은 적극적으로 반항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 사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창조적 소수자가 지배적 소수자로 타락하여 이미 거기에 합당치 않게 된 지위를 힘으로 유지하려고 들면 이 지배 요소는 성격이 변화되는 반면, 이미 지배자에 경복하여 지배자를 모방하지 않게 되고 예속 상태에 반항하는 프롤레타리아의 분리라는 결과가 야기된다. 이 프롤레타리아는 자기 존재를 주장할 때 처음부터 두 개의 다른 부분으로 갈라진다. 표면은 온순하게 엎드려 있으나 내심으론 완강하게 반항하는 내적 프롤레타리아와 폭력으로 병합을 거부하는 국경 저쪽의 외적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이다.
이상 고찰한 바에 따라 문명 쇠퇴 특징은 소수의 창조적 능력의 상실, 거기에 호응하는 다수의 미메시스(모방) 철회, 그 결과로 인한 사회 전체의 사회적 통일의 사일 등 세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쇠퇴의 특징을 머리에 두면서 쇠퇴의 원인 탐구에 들어가기로 하자. 그러면 우리들이 연구하는 이 편의 나머지 전부를 쇠퇴의 원인탐구에 할애하게 되는 셈이다. - P310

326-7 쇠퇴의 원인은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다. 서유럽 문명 공유의 예술적 전통을 버림으로써 자기의 능력을 영양 실조와 불모의 상태에 빠뜨리고 다오메(서아프리카의 구 프랑스 식민지)나 베냉(서아프리카 기니 만에 면한 나라)의 이국적 원시적 예술에, 마치 그것이 광야에 내린 만나(<출애굽기> 16:14~36)이기나 한 것처럼 탐식함으로써 서유럽 인들은 모든 사람 앞에 스스로의 정신적 상속권을 포기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서유럽 문명의 전통적인 예술적 기술의 포기는 분명히 서유럽 문명에 일어난 어떤 종류의 정신적 쇠퇴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정신적 쇠퇴의 원인을 그 결과의 하나인 현상 속에서 찾아 낼 수 없음은 자명한 이치이다.
투르크 인이 얼마 전에, 아라비아 문자를 폐하고 라틴 문자를 채용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와 그 일당은 이슬람 세계 내부에 있어서 철저히 서유럽화한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전통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의 문명을 전해 온 문자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더 오랜 옛날 죽어 가는 상태에 있던 문명의 전통적인 문자를 폐지했던 것ㅡ이를테면, 이집트에서 상형문자가 폐지되고 바빌로니아에서 설형문자가 폐지된 것ㅡ도 역시 같은 이유로 설명이 된다.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자를 폐지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의 기술을 대체하는 흥미 깊은 예는 헬라스 문명의 건축 양식이 폐기되고 신식의 비잔틴 양식이 채용된 예이다. 이 경우 바야흐로 숨을 거두려 하고 있는 사회의 건축가들은 비교적 간단한 원 주위에 대륜(고대 건축의 중방의 최하부)을 얹는 구조를 그만두고 십자형 건물의 상부에 원형 돔을 얹는 매우 곤란한 방식의 실험을 시도했다. 따라서 기술적 능력의 퇴보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위해 비잔틴 건축 하기아소피아 성당의 구조상의 여러 문제를 훌륭히 해결한 이오니아의 건축가들이 고전 그리스식의 사원을 세우는 것이 전제 군주의 뜻이며 그들 자신의 뜻이었는데도 그리스 양식의 사원을 세울 능력이 없어서 짓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건축가들이 새로운 비잔틴 양식을 채용한 것은 구양식이 이미 사멸하여 썩어 없어져 가는 과거의 잔해와의 연상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들의 기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사 결과는 전통적인 예술 양식의 포기는 그 양식과 결부되어 있는 문명이 훨씬 이전부터 쇠퇴하여 이제 해체의 도상에 있음을 보이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기술이 쓰이지 않게 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쇠퇴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닌 것이다. - P326

340-1 헬라스 사회 이외의 어느 사회를 조사해 보아도, 문명 쇠퇴의 원인은 외래 세력의 침입이라는 사실로써 추측할 수 있는 인간적 환경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다는 면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외적이 이룩한 일은 기껏해야 막 숨을 거두려는 자살자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일이었다. 외래 세력의 침입이 무력에 의한 공격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 공격을 받은 문명이 역사의 최종 단계, 즉 죽음의 순간에 있을 때 외에는 파괴적이 아니라 분명히 자극적인 정도일 뿐이다. - P340

344-5 지도자의 임무는 그의 동료로 하여금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전체를, 인류를 초월한 저편에 있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원시적이며 보편적인 모방의 능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모방은 일종의 사회적 훈련이다. 이 세상의 소리 같지 않은 영묘한 오르페우스의 하프 선율이 들리지 않는 둔한 귀에도 훈병계 하사관의 호령은 잘 들린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람이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의 소리를 흉내내면, 그때까지 멈춰 서 있던 대중은 갑자기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처럼 대중을 유인하여 따르도록 시키는 운동으로 대중을 따라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은 질러가지 않으면 지도자를 따라갈 수가 없으므로 파멸에 이르는 넓은 지름길 위에 몰려서야 비로소 대오를 정비하여 행진하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파멸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면, 이런 식의 추구가 흔히 불행한 결과로 끝난다고 해도 놀랄 것이 못 되리라. 또한 모방의 능력을 이용하는 방법과는 별도로 모방을 실제로 이행하는 데는 하나의 약점이 숨어 있다. 왜냐하면 모방은 일종의 훈련 과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상황이 적용되지 않은 비창조적 모방은 인간 생활과 운동의 기계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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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9-60 좀 더 최근으로 오면서 책이, 특히 값이 싼 문고판 책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평범한 식사 한 끼의 비용이면 로마 제국의 흥망, 종의 기원, 꿈의 해석 등 모든 사물의 본질과 정체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책을 사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책은 씨앗과 같다. 수세기 동안 싹을 틔우지 않은 채 동면하다가 어느 날 가장 척박한 토양에서도 갑자기 찬란한 꽃을 피워 내는 씨앗과 같은 존재가 책인 것이다. - P559

560 -1 책을 1주일에 한 권씩 뗄 수 있다면 한 사람이 평생동안 읽을 수 있는 책의 총수는 대략 수천 권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대 도서관이 소장한 장서의 기껏해야 1,000분의 1에 불과한 작은 양이다.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몇 권을 읽는가보다 어떤 책을 읽는가에 달려 있다. 책에 기술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보가 태어날 떄부터 완전히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며 새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정보의 내용 역시 점차 수정돼야 한다. 이것이 정보가 갖는 속성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 건립된 지 이미 2,300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인류사에서 책이 없었다면, 다시 말해서 문자 기록이 없었다면 지나간 23세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길었을까? 100년을 4세대로 친다면 23세기는 거의 100세대에 해당하는 긴 기간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정보가 입에서 입으로 말로만 전해졌다면 우리가 과거에 대해 대체 무엇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의 진보가 또 얼마나 느렸을까! 선대가 알아냈던 지식 중에서 어쩌다 얻어 들을 수 있었던 몇 마디의 이야기들만 후대에 전해졌을 것이다. 비록 전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의 정확도는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로부터 주어진 정보를 한때는 귀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같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세대를 거쳐 반복해서 구전하는 동안에 점차 변질되게 마련이고, 결국에 가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퇴색되거나, 아니면 우리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책은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준다. 책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조상의 지혜를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이렇게 해서 도서관은 인류가 이룩한 거대한 지식 체계와 위대한 통찰의 세계를 우리와 연결시켜 주는 고리의 구실을 한다. 도서관이 전해 주는 통찰과 지식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자연으로부터 숱한 고생 끝에 힘들여 발굴해 낸 고귀한 보물이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정열로 우리에게 큰 교훈과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하나의 종으로서의 인류가 고유의 지식 체계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런데 오늘날 공공 도서관의 설립과 유지는 거의 전적으로 대중의 기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키워 온 문명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냐는 우리 각자가 얼마나 충실하게 공공 도서관을 지원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공공 도서관이 인류 문화 창달의 버팀목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깊이 숙고해 봐야 한다. 지구 문명의 지속성 여부는 전적으로 공공 도서관에 제공하는 우리의 기부 규모에 달려 있는 것이다. - P560

561 행성 지구가 태어날 당시와 똑같은 상태에서 똑같은 물리적 특성을 가진 또 다른 지구가 은하수 은하 어디에선가 다시 만들어진다면 거기에도 우리 인류와 흡사한 어떤 생물이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그럴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진화의 과정에서 우연이 휘두르는 폭력의 위력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선 입자가 유전자 중에서 어떤 것을 때릴지 전혀 알 수 없으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돌연변이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진화의 초기에는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가 크게 문제될 바 아니지만 긴 진화의 과정을 통해 돌연변이의 작은 차이들이 누적된 결과는 엄청난 규모의 변화를 가져온다. 오래전에 생긴 사건일수록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지대하기 마련이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생물 현상에서도 우연이 결정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 P561

567 기후 변동의 실제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인간 생존의 근본 문제는 천문학 내지 지질학적 우연성에 이렇게 민감하게 의존한다. - P567

567 인류의 조상이 나무에서 내려온 이후 직립 보행을 하게 됐으며 그 결과로 앞발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손으로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두 눈이 훌륭한 쌍안경의 기능을 갖게 됐다. 즉 도구 제작의 선결 과제가 모두 해결된 셈이다. 큰 두뇌와 복잡한 의사를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능력의 장점을 이제 십분 발휘하게 됐다. 다른 동물들과 여타의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리석은 머리보다 명석한 두뇌를 갖는 것이 살아가는 데 월등하게 유리하다. 지능이 높은 존재들은 문제를 남보다 더 잘 해결할 줄 알고, 더 오래 살 수 있으며 새끼도 더 많이 낳는다. 핵무기의 발명이 있기까지는 지성이야말로 생존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것이다. 핵무기의 출현 이후 지적 능력이라는 것을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게 됐지만 말이다. - P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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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지금까지 많은 걸 언급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빼놓았다. 과학은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심판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이디어는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과학의 급속한 발전과 진보는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검증된 아이디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아이디어가 어떻게 탄생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중세 시대에는 사람들이 ‘많은 관찰을 수행하다 보면 그 관찰 결과 자체가 법칙을 제안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법칙을 찾아낼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그보다 좀 더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다음 문제가 바로 ‘새로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다. 사실 어디서 나오든지 나오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 모든 아이디어는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떤 아이디어가 옳은지 그른지 검증하는 과학적 절차는 그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든 다 똑같다. 관찰을 통해 예측한 값과 측정된 값을 비교해서 검증할 뿐이다. 그래서 과학에선 아이디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해 사실 별 관심이 없다. - P34

36 물리학 분야에서는 지금까지 쌓아 온 관찰 데이터들이 너무 많아서, 이 모든 관찰 결과들을 잘 설명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까지 한 번도 제안되지 않았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누구한테서 나왔든 어디서 나왔든지 간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제안되면 이를 환영하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논쟁을 걸려고 하진 않는다.
다른 과학 분야에서는 물리학만큼 관찰 데이터들이 많지 않아서 물리학의 초창기처럼 논쟁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진실을 판단할 독립적인 방법이 존재한다면 사람들 간에 굳이 논쟁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 P36

36-7 놀랍게도 과학자들은 아이디어 자체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의 과거 경력이나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아이디어를 들어보고, 그것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판단되고, 시도해 볼 수 있으며, 지금까지의 생각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또 지금까지의 관찰 데이터들과 명백히 상반되지 않는다면, 과학자들은 기꺼이 아이디어를 테스트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일 것이다. 아이디어를 제안한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구했는지, 아니면 왜 이 사람이 이런 아이디어를 제안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오든 달라질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아이디어의 실질적인 근원은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는 그걸 인간 두뇌의 상상력, 혹은 창조적 상상력이라 부르지만,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치 ‘움프‘처럼. - P36

37-8 나는 사람들이 ‘과학에는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사실 과학에는 예술가의 상상력과는 다른, 아주 재미있는 종류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지금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관찰 결과들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까지 제안된 다른 아이디어와는 매우 다른 것이어야 하며, 검증 가능할 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상상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검증할 수 있는 규칙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도 일종의 기적에 가깝다. 아무런 실마리도 없는 상황에서 ‘중력이 거리의 역제곱에 비례한다‘는 규칙을 찾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 보라. 그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우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이 법칙을 통해 우리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수많은 실험들에 대해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다. - P37

38-9 자연을 묘사하는 규칙들은 매우 수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관찰이 가설을 심판한다‘는 과학의 원리에 기반한 것은 아니며, 모든 과학이 수학적일 필요도 없다. 단지,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규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면 현상을 좀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자연의 법칙은 왜 정교하게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가 또한 아직 풀지 못한 미스테리이다. - P38

39 자, 이제 가장 중요한 대목에 다다른 것 같다. 과학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관찰을 통해 검증된 규칙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관찰이 잘못된 규칙을 도출할 수 있는가? 제대로 성실하게 검증만 했다면 어떻게 틀릴 수 있단 말인가? 왜 물리학자들은 항상 법칙들을 바꿔야만 할까? 이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 내 대답을 먼저 들려드리자면, 규칙은 관찰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틀릴 수 있으며, 관찰이라는 실험 과정은 항상 부정확하다는 것이다. 규칙은 그저 추측된 법칙이며 외삽의 결과일 뿐, 관찰에 잘 부합된다고 해서 반드시 그 규칙이 성립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관찰이라는 그물망에 걸러지지 않은채 "꽤 쓸만한 추측"으로 남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물망의 코가 예전에 쓰던 것보다 점점 작아지면 - 다시 말해 관찰의 정확도가 점점 더 높아지면 - 때론 그 규칙도 그물망에 걸러지게 될 수도 있다. 규칙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외삽인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이다. - P39

41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추측한 대로 일이 벌어지게 될 거라는 원리, 그것뿐이다. 지식이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만 얘기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알려 주는 원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재미있다. 이를 얻기 위해 우리에겐 그저 무모한 짓이라도 시도할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 P41

41 모든 과학 법칙과 모든 과학적 원리, 그리고 관찰을 통해 얻은 결론은 구체적인 세부 사항들을 빼놓은 ‘단순 명제‘ 가 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어떤 법칙도 완벽히 정확하게 진술할 순 없기 때문이다. 실험자는 자신의 질량 법칙을 기술할 때 질량은 물체의 속도가 아주 높지 않다면 많이 변하지 않는다‘ 라고 법칙을 서술했어야 옳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처럼 과학은 구체적인 규칙을 만들어서 관찰의 그물망을 통과하는지 알아보는 일종의 게임이다. 한 과학자는 ‘질량이 항상 불변한다‘ 라는 구체적인 규칙을 내놓았고 이 재미있는 가능성은 결국 틀린 것으로 판정되었지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진 않았다. 그저 불확실했을 뿐인데, 불확실하다고 해서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무엇이든 구체적인 주장을 하되 확신을 하지는 않는 편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 P41

42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어 낸 모든 결론들은 그저 반증되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잠정적인 결론‘이며, 불확실함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추측을 할 뿐이며, 완벽한 실험을 하진 못했기에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팽이가 회전할 때 질량이 늘어나는 효과가 너무 작기 때문에 "아, 아무런 차이가 안 나는구나."라고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올바른 법칙‘, 다시 말해 관찰이라는 정교한 그물망을 수없이 통과하고 끝내 살아남을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지적 능력과 상상력,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만큼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대성이론이다. 과학 분야에서 아주 작은 성과라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 P42

42-3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의심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데 익숙해 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과학 지식을 다루어 본 경험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가치있는 일이며 과학을 벗어나 다른 분야에서도 매우 유용한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 아무도 풀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조금 열어 놓아야 한다.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 알고 있는 해답을 법칙이라 굳게 믿고 있으면, 영영 문제를 못 풀 수도 있다. - P42

43 만약 과학자가 어떤 문제에 대해 답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그는 정말 그 답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그가 "해답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짚이는 구석이 있기는 해." 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그 문제를 명확히 파악한 것은 아니다. 그가 설령 해답이 무엇인지 확신을 갖고 "이것이 바로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이야. 내기를 해도 좋아." 라고 확신에 찬 말을 할 때에도 머릿속엔 여전히 조금의 의심이 남아 있다. 과학자의 머리에서 의심을 몰아낼 수는 없다. 하지만 과학이 진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무지함과 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의 해답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기에 내일의 더 나은 해답을 찾아 새로운 탐색의 길을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관찰 방법이 개발되는 것뿐만 아니라, 테스트해 볼 수 있는 새로운 가설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 P43

43-4 만약 새로운 길을 탐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또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거나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 확신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힘들여 검사해 볼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지금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확실한 정도가 제각기 다른 여러 진술들의 집합체‘ 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또 거의 확실한 것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매우 익숙해 있다.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가 있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무지 이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가? 내 경우 대부분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쉬운 일이다.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점점 알아가게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 P43

44-5 의심을 할 수 있는 자유는 과학에서 중요한 문제이며,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다고 나는 믿는다. 이 자유는 오랜 투쟁의 결과로 얻게 된 것이다. 의심할 수 있도록, 확신하지 않도록 허락받은 것 자체가 투쟁이었다. 나는 우리가 이 투쟁의 고귀함을 잊어버려 많은 가치를 잃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나는 우리 자신의 무지함을 떳떳이 인정하는 철학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얻어 낸 진보의 가치를 아는 과학자로서이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낀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유의 가치를 알리고, 의심이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며, 인류의 새로운 잠재 능력을 가능케 하는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을 느낀다. 무엇이든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선의 여지는 언제든지 열려 있다. 나는 미래의 세대들에게 바로 이 자유를 요구하고 싶다.
과학에 있어 의심은 분명한 가치를 지닌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대답 없는 질문이 될 것이다. 다음 두 강연에서는 바로 이 점에 대해 좀 더 깊이 논의하면서, 다른 분야에서도 의심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의심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매우 가치 있는 것이란 점을 보여 주기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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