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현실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그래서 어릴 때는 무척 소설을 좋아했다. 그런데 왜 한동안 읽지 않고 살았을까? 소설을 읽을 시간을, 세상을 증오하는 데에만 썼던 한 해에 가까운 나날들이 나에게 남긴 것은 피로와 스트레스뿐인 것만 같다. 한 가지에 탐닉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 신기정은 그것이야말로 트집잡을 수 없는 인생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대답은 몹시 못마땅했다. 동생이 모든 걸 우연과 운에 맡기고 되는대로 사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요, 이런 일은 다 절대로 그럴 리 없는 사람들이 해요. 인간은 원래 그럴 리 없는 존재거든요. 죄다 그럴 것 같은 사람뿐이면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람은요, 성추행할 리 없는데 그렇게 하고요, 사기칠 리 없는데 사기칩니다. 물론 자살할 리 없는데 자살하고요."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집 근방을 나다니는 시도를 함으로써 세상에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게 다 있지만 그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조금 맥이 풀리기도 했다. 세상이 태연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때문에 괴로우리라 생각한 사람들도 자신을 잊은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럴 리 없었다. 윤세오가 자신과 연결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럴 것이었다. 아직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연의 호의가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은둔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부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정은 세 사람을 두고 해온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누구의 삶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고, 무관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지옥이 다시 열린다. 집에서만 지낼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노린다고. 오래 전 윤세오가 함께 일하자고 회유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무엇을 지키려는지 모르면서 간혹 멱살을 잡고 ‘손님‘이나 ‘회원‘을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드잡이한 사람들이 불쑥 나타나 윤세오를 비난하고 원망할 것 같았다. 증오는 잊히지 않고 증식하는 법이니까.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살 확률이 크다는건 주기적인 심부름을 통해 아빠가 일러줬다. 사람들을 봐. 널 노리는 사람은 없어. 모두 각자의 시간과 인생을 살 뿐이야.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그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저 제 인생에 전념했다. 저마다의 인생을 사느라 윤세오에게 줄기차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삶에 정착하는 동안 원망과 증오는 제풀에 사그라들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인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시간은 다 이겨냈다. 조미연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
더라도 완전히 무관해지지는 않았다. 그 이름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그랬다.
지금은 그 일을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우선 인생이라는게 다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품었다가 결국 그것에 물리는 일. 아마 앞으로도 여러 차례 겪을 것이다.지나고 보니 다른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뿐이다. 그때는 모두 나쁜 일인 줄 알았다. 기쁘고 좋은 일은 소소하게 흘러갔으나 나쁜 일은 내내 남아서였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이별은 너무 슬프다.
어른들 모두 처음에는 어린이였다(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이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 P3
"아저씨도 알 거예요. 누구나 몹시 슬픈 날에는 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걸요." "마흔네 번이나 볼 만큼 슬펐었니?" 어린 왕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40
"아저씨는 꽃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만하자! 이제 그만! 나도 몰라!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한 거야.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잖니." 어린 왕자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중요한 일?" 기계기름으로 범벅이 된 손에 망치를 들고 매우 이상하고 흉측한 물체 위에 엎드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 왕자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아저씨도 어른들처럼 말하는군요." 나는 조금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어린 왕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모든 것을 혼동하고 있어요. 다 뒤섞였다고요." - P43
"그때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꽃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고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나에게 향기를 주고 마음을 환하게 해 주었어요. 떠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단순한 거짓말 뒤에 숨긴 연약한 마음을 알았어야 했어요. 꽃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그때 난 너무 어려서 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어요." - P55
나는 두려웠다. 어린 왕자가 들려주었던 여우 이야기를 생각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길들면 눈물 흘릴 일이 생긴다는. - P155
지금껏 주먹구구식으로 철학을 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나에게 나름의 철학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1. 철학이란 무엇인가?(‘나는 누구인가?(존재론)‘ 정도를 이쯤에 삽입하면 철학적 사유의 체계가 잡힐 것 같다.)2.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인식론)3.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윤리학, 법철학, 국가철학)4.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형이상학)그러나 이젠 ‘나‘조차도 불확실하단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겠지.
최근 누군가에게 말에서 비롯된 오해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상대방을 의심하기도 했다. 참고 있자니 열받고 따지자니 좀스러워 보이는 상황. 이도저도 못하는 고뇌의 시간을 겪으며 차라리 내 진심을 온전히 담을 수 없을 바에야 언어가 없었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렇지만 생각을 거듭한 끝에 길게 얘기하든 짧게 얘기하든, 서로를 아끼고 믿는 마음이 없다면 즉시 오해가 생긴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46개의 화두와 그에 대한 저자 나름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화두는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일종의 수단으로 쓰인다고 한다. 한편, 나는 이를 사람 사이의 대화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화두는 짧지만 그걸 던진 자는 그 안에 나름의 의미를 담는다. 그렇기에 그 화두에 답변하려면 제시자의 의도와 당시 맥락 따위의 여러 가지를 고민해야 한다. 고민 끝에 누군가 대답을 내놓는다. 이는 언어의 형태일 수도 있고 행동일 수도 있다. 어떤 형태가 되었든 그 답변에 화두 제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면, 서로의 마음은 통한 것이다. 짧은 말, 혹은 말이 아닌 행동만 보였어도 전혀 오해를 사지 않는 관계는 서로를 매우 잘 알고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몇 번 만나본 것만으로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만남과 기억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한다. 염화미소의 관계는 그제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