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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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현실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그래서 어릴 때는 무척 소설을 좋아했다. 그런데 왜 한동안 읽지 않고 살았을까? 소설을 읽을 시간을, 세상을 증오하는 데에만 썼던 한 해에 가까운 나날들이 나에게 남긴 것은 피로와 스트레스뿐인 것만 같다. 한 가지에 탐닉하는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일. 신기정은 그것이야말로 트집잡을 수 없는 인생의 유일한 법칙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대답은 몹시 못마땅했다. 동생이 모든 걸 우연과 운에 맡기고 되는대로 사는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요, 이런 일은 다 절대로 그럴 리 없는 사람들이 해요. 인간은 원래 그럴 리 없는 존재거든요. 죄다 그럴 것 같은 사람뿐이면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사람은요, 성추행할 리 없는데 그렇게 하고요, 사기칠 리 없는데 사기칩니다. 물론 자살할 리 없는데 자살하고요."

오랜 기간을 두고 조금씩 집 근방을 나다니는 시도를 함으로써 세상에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게 다 있지만 그것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조금 맥이 풀리기도 했다. 세상이 태연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때문에 괴로우리라 생각한 사람들도 자신을 잊은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럴 리 없었다. 윤세오가 자신과 연결된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도 그럴 것이었다. 아직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연의 호의가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은둔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부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정은 세 사람을 두고 해온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누구의 삶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고, 무관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지옥이 다시 열린다. 집에서만 지낼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노린다고. 오래 전 윤세오가 함께 일하자고 회유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돌아간 사람들이, 무엇을 지키려는지 모르면서 간혹 멱살을 잡고 ‘손님‘이나 ‘회원‘을 집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드잡이한 사람들이 불쑥 나타나 윤세오를 비난하고 원망할 것 같았다. 증오는 잊히지 않고 증식하는 법이니까.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살 확률이 크다는건 주기적인 심부름을 통해 아빠가 일러줬다. 사람들을 봐. 널 노리는 사람은 없어. 모두 각자의 시간과 인생을 살 뿐이야.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그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저 제 인생에 전념했다. 저마다의 인생을 사느라 윤세오에게 줄기차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삶에 정착하는 동안 원망과 증오는 제풀에 사그라들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인생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시간은 다 이겨냈다. 조미연에게도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

더라도 완전히 무관해지지는 않았다. 그 이름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그랬다.

지금은 그 일을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우선 인생이라는게 다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희망을 품었다가 결국 그것에 물리는 일. 아마 앞으로도 여러 차례 겪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다른 시절과 마찬가지로 그때에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동시에 일어났을 뿐이다. 그때는 모두 나쁜 일인 줄 알았다. 기쁘고 좋은 일은 소소하게 흘러갔으나 나쁜 일은 내내 남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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